50억 원 없으면 3000명은 '수장'됩니다

2007.12.08 | 미분류

[발리는 지금] 기후 변화는 ‘생존’의 문제다

지난 12월 3일부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13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리고 있다. 192개국에서 정부 대표자, 과학자, 국제기구, NGO, 기업 등 약 1만 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2013년부터 기후 변화를 막고자 전 세계가 어떤 대응을 할지를 놓고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격론을 벌이고 있다.

“저는 카트레츠에서 온 우르술라 라코바(Ursula Rakovaㆍ43)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카트레츠라는 섬에 대해 처음 들어봤을 텐데요. 원래 카트레츠가 어디 있는 섬인지 지도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10~15년 후면 물속에 가라앉아 사라질 섬이기 때문입니다.”

기후 변화의 희생자들

4일, 남태평양 섬나라 원주민이 회의장 한편에서 자신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야기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를 인용할 것도 없이 이들이 기후 변화로 인해 겪는 고통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unequivocal) 사실’이었다. 남태평양 보겐빌(파푸아뉴기니 령)에 속하는 6개의 작은 섬을 통칭해 카트레츠라고 부른다.

몇 해 전부터 섬이 하나 더 생겨서 7개가 됐다. 두 개의 봉우리로 연결돼 있던 섬 중간에 바닷물이 차올라 하나였던 섬이 2개로 나뉜 것이다. 카트레츠에는 모두 600가구 3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미 약 20년 전부터 섬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해 농사를 전혀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주민은 짜서 마실 수 없는 물 대신 코코넛을 마신다. 오로지 물고기와 코코넛이 섬 주민의 주식이다. 지난 43년 동안 섬을 떠난 적이 없는 라코바 씨는 아침마다 코코넛 나무가 해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지난 20년간 제방도 쌓아봤지만 무심한 파도는 늘 제방을 삼켜버렸다.



섬 주민 모두 보겐빌로 이주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 보트로 3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보겐빌에 땅을 사서 이주를 해야 하는데 주민은 돈이 없다. 아니, 섬에서 돈을 쓸 일이 없으니 돈에 대한 개념도 없다. 가난한 정부도 뾰족한 수를 못 내고 손을 놓고 있다.

“보겐빌에는 차가 몇 대나 있어요?” “차, 없어요. 우리 섬에서 차를 몰면 쭉 가다가 바다에서 산호초를 들이받을 걸요”
  “그럼 전기는?” “전기, 없어요.”
  “어, 그럼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겠네요.” “없어요.”
  “다른 섬이랑 연락은 어떻게 연락해요?” “카누 타고 가지요.”
  “이렇게 회의에 참가하려면, 라코바 씨한테 연락을 해야 하잖아요?” “아, 보겐빌 옆에 카트레츠보다 좀 더 큰 섬이 있어요. 그 섬이랑 태양광 무전기로 교신을 해요.”

카트레츠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장작을 연료로 쓰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들이 선진국이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가장 먼저 기후 변화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라코바 씨는 이번 회의에서 자신과 같은 기후 변화의 희생자들이 직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라코바 씨의 바람이 이번 회의에서 이뤄질 수 있을까?

발리는 지금 물밑 협상 중

7일, 회의를 시작한 지 닷새 째. 다음 주 월요일 정부 수석대표들이 도착하기 전에 실무자들이 물밑 협상을 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97년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가 정한 1차 의무 감축 기간이 끝나는 2012년 이후의 대응 방안이다. 이른바 ‘포스트 2012’ 논의.
  
미국을 제외한 다수 국가가 온실가스 의무 감축을 골자로 한 교토의정서 체제를 흔들지 않는 데 동의하는 분위기이다. 앞으로 협상에서 선진국이 얼마만큼의 의무 감축량을 설정할지, 중국ㆍ인도로 대표되는 개발도상국이 의무 감축에 참여할 것인지 등이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EU)은 온실가스를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20%, 2050년까지 50%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또 개발도상국이 참여하면 2020년까지 30%를 감축하겠다며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여전히 1990년 기준으로 2012년까지 5.2%의 온실가스를 감축한다는 교토의정서조차 비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기후 변화 대응에 관한 의미 있는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지난 상반기 발표된 IPCC 4차 보고서로 전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또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과 IPCC의 노벨평화상 수상도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탓인지, 첫날 개막연설에서 오스트레일리아가 교토의정서 비준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과 긴밀히 공동으로 보조를 맞춰왔던 오스트레일리아가 입장을 바꾸면서, 미국은 이번 회의에서 더욱 고립되고 있다. 중국도 개발도상국도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를 막고자 ‘의미 있는 참여’를 고민해야 한다고 발언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첫 주 회의 분위기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회의 분위기를 처음으로 깨뜨린 것은 의외로 일본이었다. 일본 대표는 첫날부터 “교토의정서 체제를 넘어서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교토의정서의 산파 역할을 한 일본이 교토의정서 체제를 흔든다는 NGO의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둘째 날, 일본 대표는 “원자력에너지를 ‘청정 개발 체제(CDM)’로 인정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을 접한 기후행동네트워크(CAN : Climate Action Network)는 기후 보호에 반하는 발언을 한 대표들에게 수여하는 ‘오늘의 화석연료상’ 일본에 수여하기도 했다.

발리에서 ‘보이지 않는’ 한국

발리 회의에서 2012년 이후의 기후 변화 대응 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발리 로드맵’이 나올 예정이다. 발리 로드맵에는 각국이 합의한 협상 분야, 절차, 시한이 담길 예정이다. 이 발리 로드맵에 따라서 2009년까지 포스트 교토의정서 체제 협상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2009년까지 결과가 나와야 2012년 이후 공백 없이 2013년 새로운 체제가 시작될 수 있다.
  
‘시한’ 외에 협상 방식은 계속 논의 중이다. 일단 선진국은 자신의 추가 감축 논의를 확대해 개발도상국의 의무 감축 논의도 같이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개발도상국은 우선 선진국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우선이고, 개발도상국과 관련된 논의는 따로 하자고 맞서고 있다.
  
이번 회의가 열대우림 파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만큼 개발도상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 보장에 대한 목소리가 거세다. 개발도상국은 그간 계속해서 선진국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개발도상국의 의무 감축량 할당에 반대함은 물론 논의 자체를 거부해 왔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기후 변화 적응, 완화에 대한 재정적, 기술적 지원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산림 전용(Deforestation)’ 방지를 CDM 사업으로 인정할 것인가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브라질 아마존과 인도네시아의 열대림이 심각하게 파괴되는데, 이 나라들이 산림을 보전하는 만큼 CDM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지금 국내는 대선으로 정신이 없다. 대선 과정에서 기후 변화나 에너지 문제는 전혀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 결과가 이곳 회의장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곳 발리에서 한국 정부는 존재감이 없다. 그동안 당사국 총회에서 취해왔던 ‘드러내지 않기’ 전략이 성공한 셈이다.
  
NGO도 한국 정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EU,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요 나라를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현재 세계 온실가스 배출국 9위이자 1990년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00% 이상 증가한 한국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한국이 2013년부터 의무 감축 대상이 될 거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유행’과 ‘생존’ 사이에서

“라코바 씨, 주민 3000명이 보겐빌로 이사하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땅값이 제일 비싸요. 호주 돈 700만 달러가 들어요.”

3000명이 이사하는 데, 우리 돈으로 55억 원 정도 드는 셈이다. 강남 아파트 몇 채면 수장당하기 직전의 이 작은 섬 주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발리에 모여서 기후 변화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 하는데, 이들을 돕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벌써 이번 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양이 도마에 올랐다. 라코바 씨는 카누ㆍ보트(카트레츠→보겐빌), 비행기(파푸아뉴기니→브리즈번→시드니→멜번)를 타고 이틀 만에 발리에 도착했다. 그가 배출한 온실가스 양을 우리가 탓할 수 있을까? 회의에 참가한 사람 각각은 자신이 배출한 온실가스가 헛되지 않도록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대신 “모든 이슈는 기후 변화로 통한다”로 바뀌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인기가 많을수록 ‘관심 있는 척하는’ 사람도 많다. 기후 변화가 거대한 시장을 만들고 있다. 정부, 기업, NGO가 이 문제에 뛰어들고 있다.
  
원자력 산업계도 마음먹고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탄소 포집 저장 기술처럼 이산화탄소를 없앨 수 있는 신기술을 저마다 소개한다. 지구는 망가져 가는데, 대책 없이 기후 변화라는 이슈 자체만 커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이 필요하다.
  
결국 답은 다시금 라코바 씨와 같은 기후 변화의 희생자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기후 변화 문제를 풀길 원한다면 말이다.

● 글 / 사진 : 이유진 녹색연합 에너지ㆍ기후변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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