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주적인 핵발전과 핵폐기장 정책

2003.07.03 | 미분류

반민주적인 핵발전과 핵폐기장 정책
                                                                                 홍성태 (상지대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1. 노무현 정부는 핵심과제로 ‘지방분권’을 제시했다. 지나친 서울 집중, 수도권 집중이 우리나라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노무현 정부가 ‘지방분권’을 핵심과제로 정한 것은 적절하다고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전과 산자부가 핵발전 정책을 고수하고 핵폐기장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 한전과 산자부는 핵폐기장 정책을 한층 민주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먼저 한전과 산자부는 핵폐기장 건설을 지역개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용어를 그럴 듯하게 바꾸더라도 핵폐기장은 핵폐기장일 뿐이다. 우리가 이 시설에 반대하는 이유는 혐오시설이어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위험시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시급한 것은 핵발전이 폭발했을 경우를 상정하고 대피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절대적인 핵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위험한 것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는 핵폭탄만이 아니다. 우리의 핵발전소도 ‘절대적인 위험시설’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책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핵폐기장이라는 또 다른 ‘절대적인 위험시설’을 세우려 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전과 산자부는 주민투표라는 민주적 방식으로 핵폐기장 건설을 이루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위험시설’을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선전하면서, 심지어 거의 ‘복지시설’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여론몰이를 하면서 추진하는 주민투표는 허울뿐인 민주주의이다. 한전과 산자부는 핵폐기장을 강행하기 위해 이미 오랫동안 여러 방식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지역주민들을 갈라놓고 지역사회를 파괴해왔다.

한전과 산자부는 우선 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잘못의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핵발전 정책 자체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발전 정책을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 한전과 산자부가 추구하는 주민투표 방식은 기존에 해 오던 ‘이간과 매수’의 방식을 민주주의의 허울로 포장해 놓은 것일 뿐이다.

핵은 언제나 ‘절대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위험을 올바로 알리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한전과 산자부는 일방적인 여론몰이와 사실상의 ‘매수’를 통해 주민의 표를 사서 핵폐기장이라는 ‘절대적인 위험시설’을 세우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반민주적인 시도는 한전과 산자부를 민주화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줄 뿐이다.

참여정부가 시대의 흐름에 걸맞는 개혁정부가 되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핵폐기장의 건설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행태를 전혀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한전과 산자부의 민주화이다. 이런 점에서 반핵운동은, 반핵폐기장운동은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민주화 운동이다.  

2. 참여정부가 중대한 역사적 과제로 추구하는 ‘지방분권’의 과제는 단순히 공간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와 함께 사회적으로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공간적으로 ‘지방분권’은 무엇보다 서울 집중 혹은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분산하는 과제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과 자원이 이 좁은 지역에 몰려 있어서 우리는 이미 엄청난 기회비용을 소모하고 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사회적 자원들을 그냥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간적 지방분권’은 틀림없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공간적 지방분권’은 ‘사회적 지방분권’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과제이다. 서울 집중, 수도권 집중은 박정희식 개발정책의 역사적 산물이다. 박정희는 고도성장을 위해 자원을 집중적으로 운용했으며, 그 결과로 이 나라의 사람과 자원은 서울로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과 자원이 서울로 몰려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계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무엇보다 강력한 전기생산방식인 핵발전을 추구했다.
  
핵발전소는 ‘천천히 터지는 핵폭탄’이라는 말도 있듯이 대단히 위험한 시설이다.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고도의 문명적 위험을 안고 사는 것을 들 수 있는 데, 이 점을 강조하는 ‘위험사회’론에서 가장 큰 위험으로 드는 것은 다름아닌 ‘핵발전’이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울리히 벡이나 미국의 찰스 페로우는 모두 핵발전의 위험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으로 본다. 체르노빌에서 이미 경험했듯이 핵발전의 위험은 말 그대로 재앙적 위험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감수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이 위험을 만들어내지 않는 길뿐이다.

박정희는 값싸게 전력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강력한 핵발전 중심의 발전정책을 폈다. 그러나 그것은 마땅히 들여야 할 비용을 제대로 들이지 않기 때문에 값싼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온갖 안전비용을 모두 들이면 핵발전은 어떤 에너지보다 비싼 발전정책이다. 핵폐기물 처리장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화장실없는 아파트 단지를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비용을 고려한다면, 핵발전은 어떤 발전방식보다도 비싼 발전방식이다. 나아가 만의 하나라도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지역은 영원토록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고려한다면, 핵발전은 그야말로 ‘악마의 에너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방분권’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핵발전이 철저하게 중앙집권적으로 관리되는 발전방식이라는 점이다. 핵발전소의 운영이나 관리에 일반 지역주민이나 시민단체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그저 핵공학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설명을 수동적으로 듣고 그들의 지시를 피동적으로 따라야 할 뿐이다.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데도 말이다.

이것은 핵발전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어촌 지역의 자연과 사회를 담보로 잡고 대도시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극히 불의한 발전방식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핵발전 정책은 이처럼 당연한 권리를 원천적으로 무시한다. 핵발전은 본래 반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이 나라의 핵발전은 특히 반민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3. 찬핵논자들의 주장대로 핵발전소가 그렇게 안전하다면, 당연히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곳에 핵발전소를 세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핵폐기장이 그렇게 안전하다면, 당연히 핵발전소 옆에 핵폐기장을 세워야 한다. 정말로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이 안전하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옳은 것이다.

그러나 핵발전소는 모두 소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핵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진 소비지까지 거대한 송전탑을 세워서 전기를 보내야 한다. 이렇게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돈이 들어야 한다. 핵발전소를 소비지에 세운다면, 당연히 이런 송전탑을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전탑이 빚어내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막대한 비용의 문제가 아니다. 송전탑은 자연경관과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까지 위협한다. 핵발전소를 소비지에 세운다면 송전탑이 빚어내는 이런 파괴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정부와 한전은 이렇게 분명한 해결책을 내팽겨친 채,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해서 엉뚱한 해결책을 추진하고 있다. 소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을 세우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한전은 왜 이렇게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걸까?
10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지지 않은 것은 잘못된 정책의 내용만이 아니다. 그것을 추진하는 잘못된 방식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지역사회를 분열시키고, 지역개발이라는 미끼를 던지고, 지역이기주의라는 비난을 가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사이 세상은 많이도 변했건만 어쩐 일인지 이 나라의 핵정책은 그 내용과 방식이 모두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환경정책의 대원칙은 혜택을 입는 사람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핵발전소는 소비지에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핵폐기장은 그 옆에 세워야 한다.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지역의 순서로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을 유치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졸지에 핵발전소로 바뀌거나 핵폐기장으로 바뀔 위협에 처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불평등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서울에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을 세울 수 없다면, 정부와 한전은 핵발전의 절대적 위험을 분명히 시인하고, 지금의 위험한 핵정책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기하고, 태양의 시대로 나아간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잘못된 핵정책을 바로잡는 데에 있다. 지금의 위험한 핵정책을 고수하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낡은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 박정희가 세워 놓은 강력한 중앙집권체계는 이를테면 ‘행정수도의 이전’과 같은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공간적 지방분권’은 반드시 ‘사회적 지방분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박정희가 세워놓은 중앙집권체계를 지방분권화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히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에너지의 생산방식도 포함되어야 한다. 중앙집권체계는 돈이나 힘만이 아니라 에너지나 물의 흐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발전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따라서 지방분권의 견지에서 핵발전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만일 지방분권이 진정한 지역자치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지역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삶의 단위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 무엇보다 중앙집권적인 발전방식인 핵발전이 주요한 개혁대상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런 핵발전의 확장을 전제로 한 핵폐기장 건설사업을 밀어붙이면서 지방분권을 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지방분권운동이다.
  
반민주적인 핵발전을 통해 전기를 대량생산해서 맘대로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발상은 후진국 시절에나 어울리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선진국은 이미 두가지 점에서 큰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첫째, 핵발전을 추구하더라도 철저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추구한다. 그 결과 핵발전을 폐기하는 쪽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둘째, 더욱 선진적인 나라들은 핵발전의 위험과 한계를 직시하고 대단히 적극적으로 재생에너지 생산기술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결과 기술개발이 촉진되고 에너지 문제에 대한 시민의식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필요한 정보조차 제대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돈과 힘을 이용해 핵발전을 강행하는 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찬핵론자,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비대해진 핵산업이 이 나라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면, 사회체계 자체를 선진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핵발전은 이미 기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후진적인 전기 생산방식이다. 이 반민주적이고 후진적인 전기 생산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선진국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정말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면, 후진적인 전기 생산방식을 고집하는 한전과 산자부부터 발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그들이 핵발전을 ‘행복에너지’라고 우기며 여론을 호도하는 데에 바로 우리의 큰 불행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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