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 그 두번째 이야기

2001.07.06 | 미분류

백두대간 종주 그 두번째 이야기

지난 첫번째 이야기에 이어 두번째 이야기가 도착했습니다. 7월말까지 뜨거운 여름의 햇살을 이겨내며 진행되고 있는 녹색연합 백두대간 조사팀의 행보에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일시 : 2001. 6. 08 ∼ 6. 10 / 구간 : 우두령 ~ 괘방령 ~ 작점고개 / 추풍령
•일시 : 2001. 6. 11 ∼ 6. 13 / 구간 : 작점고개 ~ 회룡재 ~ 지기재
•일시 : 2001. 6. 14 ∼ 6. 16 / 구간 : 지기재 ~ 화령 ~ 피아재 ~ 밤티재
•일시 : 2001. 6. 17 ∼ 6. 19 / 구간 : 밤티재 ~ 늘재 / 윗늘티

△ 6월 8일 우두령에서 괘방령까지

05:40 기상
어제 그 힘든 운행과 새벽까지 이어진 천병석 마산리장님과의 술자리 때문인지 대원 모두 일어나는 게 시원치 않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 마산리
마산리는 과거에 100호 남짓 가구가 있었으나 이제 50호 정도가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주민 가운데 대부분이 노인으로 초중학생은 전혀 없고 고등학생만 두 명 있을 뿐이다. 고랭지라 농사 짓기도 어려울 터, 주민들이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을 주민들의 이른 술자리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데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붙은 가게로 모여든다. 7∼8명의 남녀 노인이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말씀 나누는 것들을 보아 자주 있는 일인 듯하다. 다른 마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바람재
처음 출발 때 가벼이 오르던 것과는 달리, 바람재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라 힘들다. 힘겹게 능선에 오르니 정상에 안테나와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무선증폭시설이다. 이 곳은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도 교신이 가능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이라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과거에는 주한미군이 주둔했으며, 지금도 한 달에 1∼2회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3대 가족의 소풍
바람재에서 형제봉 오르는 길에 할아버지·할머니, 아빠·엄마, 초등학생 넷… 삼대에 걸친 한 가족을 만났다.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소풍을 다녀오는 모양이다. 주말도 아닌지라 아이들에게 “너희들 학교는 가지 않니” 물으니 “오늘은 가족과 함께 하는 날이라 가지 않아도 된다”고 답한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토요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여행 등을 이유로 학교에 나가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기행문을 써서 제출하면 출석처리가 된다고 하니 우리 때와는 아주 다르다. 이런 기회를 이용해 아이들이 자꾸 들과 산, 강이나 바다로 나가 자연을 느끼고 자연에서 배웠으면 좋겠는데… 도시의 부모들은 바쁘다, 아이들끼리 멀리 나가는 것도 쉽게 허락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 강화도에 사는 초등학생 다섯 명이 자기들끼리 5박 6일 동안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했다. 무척이나 힘들었을 제주에서의 경험은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받은 어떤 교육보다 값진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황악산 비로봉(1,111m)
북쪽에서 내려온 백두대간은 태백산에 다다른 뒤 힘찬 기운을 남서쪽으로 바꾸며 속리산을 향한다. 천 미터 이상을 오르내리던 산줄기는 속리산을 지나면서 급전직하, 수백 미터 높이를 겨우 유지하며 황악산으로 이어진다. 기세가 한참 꺾인 대간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곳이 바로 황악산이다. 황악산에서 기세가 오른 대간은 지리산 천왕봉까지 힘찬 기운을 이어간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 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김남주 시인의 「고목」)

여시골산에서 괘방령 내려오는 마루금 따라 철조망이 길게 쳐있다. 철조망의 줄을 잇기 위해 살아 있는 수십 그루에다 대못을 박아놓았다. 지난 3월 울진 훈련 때에도 아주 큰 규모의 소나무 숲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수난을 받은 흔적을 본 적이 있다. 일제 때는 전투기 연료로, 70년대에는 생활연료로 쓴다며 소나무마다 수십 군데 칼자국을 내고 깡통을 대서 송진을 받았던 흔적… 소나무들이 겪었을 아픔에 목이 메었고, 그 못된 짓을 저지른 이들에게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올랐다.

16:00 괘방령 도착
어제와 달리 일찍 운행을 마쳤다. 운행이 끝난 곳은 괘방령(궤방령)이다. 옛날 서울과 부산 사이 세 관문 가운데 상로(商路)로 주로 이용되던 곳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괘방령을 남으면 방(榜)에 이름이 걸린다’고 해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나 영남 내륙지방에 부임하는 관리들도 이 곳을 이용했다고 한다.

김천시 봉산면 향천리 복산 마을
오늘 우리의 숙소는 복산 마을회관이다. 노인회관이 함께 있는 곳이라 밤늦도록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술도 마시고 놀이도 하셨다.

운행을 하루 쉬는 주말 숙소를 잡는 방법에 대해 나와 대원들 사이에 견해가 달랐다. 나는 요즘 농촌이 바쁘기 때문에 이틀 내리, 더욱이 일요일 오전 늦게까지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와 달리 다른 대원들은 숙박비용과 마을주민들이 일요일 일찍 마을회관을 찾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마을회관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논의(?) 결과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앞으로 마을회관을 이용할 때의 규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 6월 9일 괘방령에서 작점고개(여덟마지기 고개)까지

05:00 기상
새벽에 이유는 모르겠으나 대원들과 다투는 꿈을 꿨다.

추풍령, 생맥주와 치킨
대간 상의 가장 낮은 고개인 추풍령(200m)에서 점심을 먹었다. 누구나 점심이 성에 차지 않은 모양… 누군가 닭고기를 먹고 싶다고 한다. 철길 건너 치킨 집을 내가 발견하고 소리쳤다. 선희, 정희 씨 냅다 철길을 건너 뛰어 간다. 그 가게는 문 닫았지만 다른 가게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목을 축이고, 맛있는 치킨으로 배를 채웠다.

금산(384m)
배를 가득 채우고, 주인 아주머니가 건네 준 얼음물을 받아, 즐겁게 추풍령 고개를 넘을 찰나 산 아래 채석장에서 분쇄기의 커다란 굉음이 들린다. 금산 정상에 오르니 산이 통째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이 만들어낸 천 길 낭떠러지… 마루금을 절단 낼 태세다. 대원들이 저마다 아쉬움과 함께 분노를 표시한다. 도대체 저렇듯 엄청난 훼손을 누가 어떤 목적(도시의 건물, 도로·항만 등의 사회간접자본 확보)으로 하는 지, 해결방안은 과연 없는 것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작점고개 도착
작점고개까지 이르는 대간은 가파른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는 그저 그런, 마을 뒷산 같다. 묘함산 근처 포장도로를 따라 작점고개에 거의 다다를 무렵 주말지원팀인 녹색연합의 윤기돈 간사와 푸른영상의 이상엽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서로 악수를 나눈 뒤, 윤기돈 간사가 미리 답사(?)한 작점고개까지 이동했다.

△ 6월 10일 추풍령

‘구름도 자고 넘는 바람도 쉬어 넘는 /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추풍령이란 이름은 김천 직지사에 머물던 사명대사가 고개를 지나는데 바람이 마치 가을바람처럼 선선하게 불었다고 해서 ‘가을바람’ 추풍령 이라 불렀다고 한다.
추풍령은 경부선 철도, 경부고속도로, 국도가 모두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빠짐없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 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이 곳을 더욱 부산하게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조령(문경새재)이 가장 크고 분주한 고개였다면, 오늘날은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고갯길의 으뜸인 셈이다.

어제 치킨을 먹었던 가게 아주머니 집에서 이틀동안 묵었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나는 종주기를 작성했다. 추풍령에서 물건도 사고, 저녁에는 김천에 나가 낮에 작성한 종주기를 더불어숲, 제주범도민회 게시판에 올리고, 윤기돈 간사를 통해 녹색연합에 보냈다. 우리 대원(나)의 백두대간 종주를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첫 소식을 보낸 셈이다. 몸은 지치고 거칠고 투박한 글이지만 그때그때 여건이 닿는 데로 소식을 꾸준히 올려야겠다는 내 마음 속의 다짐이 처음은 지켜진 셈이다(앞으로 계속 지킬 수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간식으로 윤기돈 간사가 사온 참외를, 저녁식사는 ‘이방장’ 윤수 씨가 정성껏 만든 돼지보쌈을, 맛있게 먹었다. 뒤늦게 오신 주인 집 아주머니와 아이들도 처음엔 머뭇거리더니 이내 맛있게 먹는다.

△ 6월 11일 작점고개에서 회룡재까지

05:30 기상
일어나기가 무섭게 짐 정리, 방 청소, 짐 나르기로 모두들 바쁘다. 집 키를 우리에게 내준 채 이틀동안 친정 집에 머무르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가 아직 오시지 않는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짧은 엽서를 남기고, 우리는 지원차량으로 작점고개까지 서둘러 이동한다.

추풍령에서 속리산 입구인 비재까지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산세가 약하고 높이가 낮은 구간이다. 몇몇 산을 빼고는 3∼400미터가 고작인 자그마한(?) 산들이다. 날씨도 잔뜩 흐리고 바람도 부는 터라 걷기에 여간 편한 게 아니다.(초본식물과 관목으로 어우러진 방해물(?)들이 곳곳에 존재하지만)
90년만에 가장 심하다는 가뭄은 논바닥만이 아니라 등산로마저 푸석푸석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내리막길이라도 앞 대원의 발길에 흙먼지가 밀려온다. 우리 조사가 조금 늦춰진들 어떠하리, 농민들의 팍팍한 마음을 깨끗이 씻어줄 큰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곳곳에 기도시설
용문산에서 국수봉 사이 등산로 곳곳에 천막이나 제단 등 어느 종교집단의 기도용 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리 기도도 좋지만 이렇듯 산 정상지역이나 능선 곳곳에 허가도 받지 않은 시설을 마구잡이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늘다람쥐와의 만남
국수봉 내려오는 길에 나무 가지에 기대어 있는 맑고 고운 눈의 하늘다람쥐를 만났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 다니는 하늘다람쥐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천연기념물 제28호이다. 회갈색 털에 유난히 큰 눈동자, 밤에만 활동하는데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활공해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 하늘다람쥐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원들 저마다 이를 놓칠세라 카메라를 들이댄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하늘다람쥐, 저공비행으로 대원들 바로 앞을 지나 건너편 숲으로 사라진다. 어느 누가 “사진을 못 찍어도 좋다. 본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말한다.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백두대간 마루에 있는 유일한 학교, 이 곳도 이미 폐교된 지 오래다. 지금은 부산녹색연합 생태학교로 이용된다고 하나, 거의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듯하다. 교실 앞에 걸린 백두대간 생태박물관이란 현판은 현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운동장 왼쪽 끝에 ‘허영호와 함께하는 한빛은행 백두대간 대장정팀’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수북히 쌓여있다. 또 욕이 나온다. 몹쓸 사람들, 하룻밤을 여기서 지샐라면 조용하고 깨끗하게 지내고 가야지, 분리수거도 전혀 하지 않은 쓰레기 더미에, 학교 주변 곳곳에 싸놓은 똥까지…
폐교의 아픔을 느낀 것도 잠시, 교실 앞 그늘에서 점심도 먹고 짐짓 여유를 부리며 낮잠을 잔다.

“번데기 이젠 중공산이여”
경북 상주시 공선면 봉산2리는 스물 두 가구의 작은 마을로 누에치기로 이름난 곳이다. 마을회관도 마을을 닮은 듯 아담하다. 김성배 이장님(63세)이 누에가 그대로 묻은 채로 마을회관에 도착, 문을 열어 주신다.

밤 10시 경에 이장님과 전옥석 어르신(64세)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 맥주 한 잔을 함께 나누며 누에치기와 백두대간,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몇 마디 “지금도 번데기 먹고 있어요? 번데기 이젠 먹지마, 다 중공(중국)산이여”, “사변 때 여기 백두대간을 지나가는 인민군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래도 그들은 여자나 농민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어, 그것만은 분명히 지키더라고”

△ 6월 12일 회룡재에서 지기재까지

05:00 기상
오늘 새벽까지 누에치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셨던 이장님이 우리가 찾아뵙기도 전에 마을회관으로 오셨다. 인사를 끝내고 마을 어귀를 지나 논길로 들어선 순간 이장님께서 “어이 어이” 부르시며 뛰어 오신다. 누가 조사야장을 빠뜨리고 온 것이었다.

상주 장암리 윗늘티에 사는 작아 읽새 이명학님께 전화를 했다. “가뭄이 농민들 마음도 흉흉하게 만든다.”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른다. ‘온 나라가 가뭄으로 어려워하는 이 때 웬 백두대간 조사냐’는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빨리 비가 와서 팍팍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돌려놓았으면 좋겠다.

싸리나무, 철쭉, 가시덤불 따위가 우리의 운행을 가로 막는다. 거기에다 바람도 별로 없으니 운행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나마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산세가 높은 곳은 주변 산줄기와 멀리 깃든 마을이 보이는 등 조망이 좋은 데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서 운행하기에 좋다. 반면에 산세가 낮은 곳은 마을이 바로 곁에 있어 정겨운 논밭을 볼 수 있고, 농사에 바쁜 일손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낮게 엎드려 있는 풀꽃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되니… 산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18:00 지기재 도착
지기재 바로 근처에 있는 지기재 마을은 서너 가구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나마 몇 채 안되는 집 가운데 한 곳은 폐가이다. 그 곳을 우리 숙소로 잡기로 했다. 그야말로 ‘흉가 속의 쑥대’ 였다. 하지만 집 마루턱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은 무척 좋다. 바로 앞엔 너른 논과 과수원이, 저만치 우리가 넘어 온 산들이 큰 줄기를 잇고 있다.

△ 6월 13일 지기재 ‘흉가 속의 쑥대’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아침에 깨어나니 비다. 반갑고 소중한 ‘비님’ 정말 고맙습니다. 더욱 세차게 내릴 수는 없는지요.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농민들로 기쁘겠지만 우리도 기쁘다. 가뭄도 조금은 해갈, 우리도 운행을 멈추고 하루를 이 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어제부터 그렇게 울부짖던 옆집 형식이네 소가 오늘도 그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제 송아지를 다른 곳에 팔았다 한다. 그 슬픔에 어미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울부짖고 있을 뿐이다.

△ 6월 14일 지기재에서 화령까지

05:05 기상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개어 있었다. 가뭄 해갈에 큰 도움을 줄 정도로 비가 계속 내렸으면 했는데… 어쨌거나 우리도 이제 길을 떠나야겠다.

형식이네 집 소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이틀 동안 우리에게 잠자리를 내준 빈집을 되돌아봤다. 우리가 쉬고 가서 그런지 엊그제 처음 보았던 모습이 아니다. 사람이 깃들어 살아야 집이 제 몫을 하는 법인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한 해도 넘기지 못한 채 집은 ‘흉가’로 바뀌고 만다. 대간 종주 중 농촌 어느 곳에서나 썰렁하게 남아 있는 빈집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집이 무너지고 마을이 무너지고 있었다.

걷기가 너무 좋다. 길은 평탄하고 날씨는 적당히 흐리고 바람도 알맞게 불어준다. 산아래 마을은 바쁘다. 경운기를 비롯한 농기계 소리가 가득하고, 흥겨운 음악소리도 들린다. 어제 내린 비가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듯하다.

윤지미산 정상 바로 아래 바위에서 오랜만에 주위 산들을 둘러본다. 북쪽으로 우리가 가야 할 속리산이 보인다. 먹구름과 하얀구름이 한 하늘에 사이좋게 어우러진다.

15:40 화령 도착
오늘 목적지인 화령에 오후 네시가 채 못된 시간에 도착했다. 화령 고갯마루의 화령정에서 피로를 풀었다. 고갯길의 내력을 알리는 글이 내걸려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령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좋기는 한데 온통 한문이며 낡아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쉰 뒤 상곡1리 마을회관으로 이동, 하룻밤을 지냈다.

△ 6월 15일 화령에서 피아재까지

기상 05:40
상곡1리 마을회관에서 화령까지 가는 오르막길에서 재미있는 두 장면.
하나, 윤수 씨가 사진을 찍기 위해 “조금 천천히 걸어와요” 하며 그 큰 몸으로 뒤뚱뒤뚱 달려가자 정희 씨가 재미있는 몸짓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윤수 씨 다시 한번 씩씩거리며 뒤쫓아 갔으나 이번에는 선희 씨도 정희 씨와 앞으로 달려가 버린다. 아침부터 윤수 씨의 약을 올리는 두 아가씨, 약이 오르면서도 웃으며 세 번이나 힘든 뜀박질을 하는 윤수 씨가 나머지 대원들을 즐겁게 한다.
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자그마한 스쿠터 한 대. 자그마한 오토바이에 한 가족이 타 있다, 아니 매달려 가고 있다. 엄마, 중학생, 초등학생 2명, 모두 네 명이 오토바이로 학교 가는 모습… 엄마나 아이들 모두 웃고 있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정겹게 보이기도 하다.

봉황산 오르는 길에 야생동물의 배설물이 보인다. 배설물의 굵기나 냄새로 보아 너구리의 흔적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백두대간이라 하지만 야생동물을 직접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배설물이나 발자국, 주변 흔적, 울음소리 따위로 이 산 이 숲에 어떤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 지를 확인한다.

비재에서 형제봉 오르는 길에 ‘못제’라는 고산습지가 있다. 습지란 물을 머금고 있는 땅인데 지금 이 곳엔 물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일부 습지식물만이 어렵사리 살아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못제에는 후백제의 견훤에 얽힌 전설이 있다.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주변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이때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견훤은 세력 다툼을 하며 거의 매일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싸움을 벌인 족족 황충은 패하고 만다. 이에 황충은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캐기 위해 부하를 시켜 견훤을 미행했다. 황충의 부하는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내 이 사실을 황충에게 알렸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형제봉 주변 봉우리들은 모두 전망대 구실을 할 정도로 주위 산들을 보기에 좋은 곳이다. 속리산 천황봉부터 문장대에 이르는 바위 능선과 주병산, 백화산 등 주변 산들의 빼어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형제봉 내려오는 가파른 내리막길도 수많은 산들과 어우러진 해넘이 모습 때문에 힘들지 않다.

19:20 피아재 도착
피아재에 도착, 만수리 마을회관으로 이동 짐을 풀었다. 300m에서 800m의 얕은 산줄기를 오르내리는 운행도 오늘로 끝이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속리산 구간, 1,000m의 높은 봉우리들과 험난한 암릉들을 오르내려야 한다.

△ 6월 15일 피아재에서 밤티재까지

기상 05:10
바람도 한점 없는 무더운 날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계속 딲으며 힘들게 오르막을 올라서자 속리산 주봉 천황봉(1058m)이다. 천황봉에서 땀방울로 온통 얼룩진 옷과 몸을 말리며 주변 경관을 감상한다. 비로봉, 입석대, 신선대, 문장대로 이어지는 속리산 주능선의 암릉들이 그 빼어난 자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속리산에 떨어진 빗물은 한강, 금강, 낙동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가기 때문에 ‘삼파수’라 불리며, 속리산 줄기는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을 낳아 태안 안흥진으로 인천 문수산으로 이어진다.

천황석문과 비로봉을 지나 입석대에 이른다. 입석대를 본 선희 씨 “저것을 누가 세웠을까?”라는 감탄을 하며 조금 걷자 바로 옆 표지판에 임경업 장군이 세웠다는 설명글이 적혀 있다. 선희 씨 “저것을 어떻게 지고 왔을까”라고 하자, 용미 씨 “지고 온게 아니라 여기 엎어져 있는 걸 세운거죠”라고 대답한다. 선희 씨 어이없는 표정, 용미 씨는 허탈한 표정. 서로 자신의 유머를 이해 못한다며 핀잔을 준다.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속리산은 지금은 속세의 사람들이 수없이 찾아드는 ‘속세의 산’이 되어 버렸다. 문장대에 이르면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조금 적지만 주말이면 문장대휴게소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넘친다. 매점 상인의 호객 행위, 문장대에 오른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속리산 제1경인 문장대(文藏臺)에는 세조에 얽힌 전설이 남아있다. 세조가 법주사 언저리에서 요양하며 목욕소라는 지명을 낳고 복천암이라는 암자를 지으며 ‘열섬의 환약과 열두동이의 탕약’으로도 낳지 않는 괴질을 달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월광태자라는 귀인을 만나게 된다. 귀인이 알려주는 대로 오른 곳이 문장대이고 거기에 오르니 삼강오륜을 설파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조는 감읍해 기도를 올리고 신하들과 그 책의 내용을 강론했다고 한다.

18:35 밤티재 도착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내려오는 길은 백두대간의 암릉 구간 중에서도 위험하기로 손꼽는 구간이라고 한다. 암봉과 암봉 사이의 구멍도 잇따라 통과하고 밧줄을 힘겹게 부여잡고 암봉을 오르락내리락 어렵사리 밤티재로 내려왔다. 예정대로라면 늘재까지 가야 하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밤티재에서 멈추기로 했다. 밤티재에는 녹색연합 윤수영 간사와 윤종식 님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수영 간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 숙소가 문제다. 장암2리 마을회관을 숙소로 할 예정이었으나 섭외가 잘 안된 모양이다. 마을로 내려오니 작아읽새 이명학 님이 자기 집(윗늘티)에서 쉬고 가라 했단다. 지난 번 속리산 조사 때 하룻밤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오늘은 사람 수가 너무 많다(대원 6명, 지원팀 4명). 하지만 염치불구하고 이명학 님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 6월 17일 밤티재에서 늘재까지

06:10 기상
어젯밤 늦게까지 이어진 호화만찬(?)과 운행 구간을 짧게 조정한 탓에 아침에 여유가 넘친다. 나는 어젯밤에 이어 오늘 아침에도 후라이팬을 찾으로 화령 상곡1리로 달려갔다. 후라이팬은 우리 조사팀의 주방장 윤수 씨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취사도구이다. 이것을 이틀 전 묵었던 숙소에 놔두고 왔으니 윤수 씨의 투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어찌하리, 어제오늘 힘든 몸을 이끌고 화령을 넘고 또 넘는다.

09:20 밤티재 출발
어젯밤을 함께 보냈던 지원팀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밤티재를 넘는다. 밤티재에서 늘재 넘어가는 길에 적잖은 등산객들과 마주쳤다. 주말을 이용해 구간종주를 하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전세버스를 이용해 수십 명 단위로 구간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이들이 백두대간을 찾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종주 방식이 백두대간 등산로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클 수밖에 없다.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횟수도 많아지는 산행방법은 ‘한빛은행 대장정’의 경우처럼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껏 쉬면서 늘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1시 40분, 두 시간이 조금 넘었다. 늘재(널재)는  고개 좌우로 표고차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고개로 ‘넓은 재’가 변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래서 고개 아래 마을 이름도 윗늘티, 아랫늘티이다. 늘재에는 320년 된 음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둔 성황당이 있다. 나무 허리에 걸쳐진 물색을 보지 않았으면 ‘이곳이 과연 성황당인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내 고향 제주에도 예로부터 ‘당오백 절오백’이라 해서 마을마다 신당(성황당)들이 있었다. 해마다 두 세차례 큰 굿을 하기도 해서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수십 군데 정도만 마을차원에서 보호하고 있을뿐 대부분 사라지거나 방치되고 있다.

피사리
점심 먹고 낮잠을 잔 뒤 이명학 님 논으로 피사리를 하러 갔다. 이명학 님은 천 7백여평의 논을 무농약으로 짓고 있다. 논에 풀어놓은 우렁이가 피를 없애는데 큰 역할을 하나 워낙 큰 가뭄이라 논 물이 거의 말라버려 우렁이가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단다. 주위의 다른 논들은 피가 없이 깔끔(?)하다. 독한 농약을 이용, 피들을 절멸 시켰기 때문이다. 독한 농약은 피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먹을 벼에 독한 영향을 미치고, 농약을 치는 농부들의 몸마저 망가뜨릴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의 고령화와 농업의 위축은 결국 이를 더욱 부채질하게 되니… 도시의 소비자들은 쌀에 벌레 나온다 탓하고, 눈으로 보기에 깨끗하고 보기에 좋은 것만 찾으니… 저 농약을 거침없이 뿌려되는 나이 든 농부들을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막걸리 한 잔씩 돌리며 농업정책과 기존 농사방법의 문제, 무농약 농사의 어려움 등에 대해 이명학 님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이명학 님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피를 뽑는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풀을 뽑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 어머니도 밭 일 가운데 김매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하신다. 뙤약볕에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하는 게 어찌 즐거울 수 있을까, 그래서 구성진 노랫가락이 있고, 막걸리가 뒤따르는 게 아닐까.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생명을 살리는 농업(농사)’가 얼마나 힘든 노동과 고뇌, 피와 땀을 요구하는 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곡식은 비료나 지력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일꾼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겠다.

△ 6월 18일 ~ 19일 윗늘티 (이명학 님 집)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큰 비다.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비다. 운행을 위해 이명학 님 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아침 일곱시 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는 비가 아니다. 장대비다, ‘비님이 오셨다’. 장대같은 비는 우리의 발걸음도 멈추게 했다. 즐겁게 오늘 운행을 포기한다.

이명학 님은 3년 전 도시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2리 윗늘티 마을로 귀농한 서른 다섯의 농사꾼이다. 마음씨 좋은 아내 정낙순 님과 아름소리, 새보름이라는 예쁜 두 딸이 한 가족이다. 누렁이, 똘똘이 두 마리의 개, 맬롱이, 맬정이, 맬순이 등 고양이 네 마리도 모두 한마당 식구이다.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위해 배우고 실천하고 있으며, 귀농통문에 글도 쓰고 있다. 대안교육에도 관심이 많으며 김광석 노래를 즐겨 부른다. 닷새 동안의 만남을 정리할 때가 다가오자 그는 못내 아쉬워하고 아이들이 서운해 할 것이라며 여러 차례 이야기 했다.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며칠동안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노래와 이야기들은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산행 중 힘들 때 대원들은 가끔씩 그가 들려준 민요를 읊조리기도 한다. 4박 5일 동안의 잠자리를 흔쾌히 내주고, 항아리 가득 담겨있던 포도주가 바닥이 날 때까지 우리는 매일 밤 그(그의 가족)와 함께 노래 부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끼며, 백두대간 종주 조사 중 가장 진한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계속…【사이버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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