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배춧잎 넣기

2004.01.15 | 미분류

2003년 08월 15일 (금) 21:12

Q: 난 누구일까요. 1973년 태어남. 출산 비용 65원. 무게 1g 남짓. 세종대왕이 후견인…. 힌트, 별명은 배추잎.

답은 만 원권 지폐. 현재 발행되는 9종의 화폐 중 가장 고액권이다. ‘배추잎’ 애칭을 얻을만큼 초록으로 인쇄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초록 잉크는 다른 색에 비해 싸고 종이에 잘 배어 인쇄 효과가 좋다. 녹색은 사람들에게 신뢰감도 준다.
게이트 사건마다 ‘배추잎’은 단골로 등장한다. 수표와 달리 자금 추적이 불가능한 고액 현찰인 탓이다. 검찰.경찰은 종종 뇌물 전달 과정을 밝혀내기 위해 상자나 가방에 직접 현찰을 넣어본다. 이를 통해 실제로 뇌물이 건네졌는지, 얼마나 들어가는지 등을 알아본다.

여러번 ‘배추잎 넣기’ 실험을 해봤다는 전(前) 대검 중앙수사부 수사관 A씨의 얘기. “가장 작은 비누 상자에 5백장, 와이셔츠 상자에 1천장, 큰 케이크 상자나 컵라면 박스에 5천장, 사과상자에 3만장이 각각 들어갑니다.” 또 접는 지갑에 1백장, 골프가방에 1만장, 007 가방에 1만5천장, 은행 막대자루에 2만장을 각각 집어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형 승용차 조수석 앞의 보관함에는 예상보다 적은 2천5백장이, 반면 택배회사가 쓰는 이삿짐 박스에는 무려 4만장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새 돈 기준이다. 헌 돈은 10%쯤 덜 들어간다. 1만원권 한 장은 가볍지만 많이 모아놓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배추잎이 가득 든 비누상자는 5㎏, 007 가방은 15㎏, 사과상자는 30㎏이나 되니까.

최근 어떤 추리소설보다 황당한 얘기가 검찰의 입에서 나왔다. 2000년 현대그룹이 4억 원씩 든 서류상자 50여개를 여권 인사에게 보냈다는 수사 발표였다. 당시 미니밴으로 돈을 날랐던 운전사는 “하도 돈이 무거워 차가 잘 나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1만원 한 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결코 하찮은 돈이 아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한 달 용돈은 ‘배추잎’ 10장에 불과하다는 설문 조사가 나와 있다. 매달 한 장씩 빈곤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만원계(契)’도 있다.’돈이 있으면 금수강산, 없으면 적막강산’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한 대검 수사관의 얘기가 더 교훈적이다. “배추잎을 가득 채웠던 가방에선 하나 같이 지독한 냄새가 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 let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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