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소식 – 3월 16일 이주노동자 가족들의 집회에서

2004.03.21 | 미분류

집회에 가면 늘 그런 분이 있습니다.
예상보다 시간을 넘기고 조금은 지루해진 집회 끄트머리. 앞의 연사는 열심히 뭔가를 말하지만 다들 딴청을 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피켓을 내려놓지 않는 분.
3월 16일, 97년 싱가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 필리피나 이주노동자 ‘Flor contemplacion  ’를 기리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오전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정부기관 OWWA(Overseas Workers’ Welfare Administration)앞에서 규탄집회를 하고 오후에는 촛불행진을 합니다. 집회에선 이주노동자들의 가족들이 나왔습니다. 필리핀에선 가족 중 이주노동자가 없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합니다. 천만 명 가까이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홍콩, 그리고 한국 등 심지어는 자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쿠웨이트, 사우디 등 중동까지 182개의 나라에 가서 돈을 벌어야 하는 필리핀에선 당연한 모습이겠지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IMIGRANTE INTERNATIONAL에는 여러 개의 파트가 있는데 그중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을 위한 그룹도 있습니다. 특히 카미얀은 부모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을 위한 활동들을 합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겪는 방황과 상실감을 극복하고 부모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10년동안 해외에 나가 돈을 벌다 온 아버지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집회에서 이 분을 만났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세 시간 가까이 피켓을 들고 있는 이분. 페드로 할아버지입니다. 그 역시 이주노동자의 가족입니다. 그의 아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축일을 하고 있다 합니다.
이 할아버지가 든 피켓의 내용은 우리의 미래를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든 이 구호가 당신을 위한 내용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한평생 필리핀을 경험해 온 할아버지가 말년에 정말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나 가족을 끔찍이도 여기는 필리피노들에겐 더할 말이 없겠지요. 그러나 필리핀에선 일자리를 찾을 수 없고, 또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기보단 해외로 내보내 돈을 벌어오길 더 바라는 마당에선 자꾸만 밖으로 내몰릴 수밖엔 없을 겁니다.

하루에 2700여 명이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가고 예닐곱 명이 죽어서 돌아온다는 필리핀,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이 해외로 나갈 때 OWWA에  처음엔 25달러, 그리고 해마다 900페소(한화 약 2만5천원를 내게 합니다. 일종의 보험같은 것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의료보험혜택을 위한 기금조성이라 합니다. 이미 이 돈이 530만 페소 가까이 됩니다. 해외에서 일을 하다 돌아온 노동자들은 이래저래 아픈 곳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병원비 할인혜택을 해 준다는 이 기금이 실제 그렇게 쓰인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올해만 해도 지금까지 461명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였습니다. 게다가 선거를 앞둔 대통령 아로요는 그 돈을 선거운동자금으로 쓰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벌어온 외화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는 이것만 봐도 분명합니다. 거기엔 아메리칸드림도, 코리안 드림도, 재팬 드림도 없습니다. 단지 끝없는 노동과 희생만이 있습니다.

Bread Winner라는 단어를 듣습니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 가장을 뜻하는 말. 바로 필리핀의 이주노동자들이 필리핀의 Bread Winner입니다. 다른 쪽,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으로 경제를 유지하는 나라 코리아는 그들을 노동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때때론 범죄자로 몰기도 합니다. 임금체불과 폭력, 살해, 강제 추방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코리아도 필리핀 정부와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한국엔 3만3천여 명의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기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곳에서 봅니다. 오늘 집회에선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 관한 전시물이 있었습니다. 그 중 작년에 남편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리피나 Levie Argana.  그 남편의 이름 유창식을 아마 필리피노들은 기억할 겁니다. 그에게 죄를 묻지 않는 한국 정부를 기억할 겁니다. 이 사례는 계속 이렇게 필리핀에 남아 코리아를 기억하게 할 겁니다.
아름다운 배려와 연대의 나라 코리아를 기대하긴 아직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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