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래, 푸른 뱀.

2004.08.20 | 미분류

[길에게서 길에게로]흰 고래, 푸른 뱀

[뉴스메이커 2004-08-19 14:11]


울산에서 부산까지

길의 시작은 울산 울기등대 밑 대왕암에서였다. 고래턱뼈 조각상을 번쩍이게 할 것만 같은 아침 햇살을 만난 뒤 장생포를 돌아보지만, 이제 고래의 신화 따위는 기껏 고래고깃집 식탁 위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온산공단 앞 마당바다 앞에 소슬하게 솟아 있는 처용암을 지나 31번 국도를 따라간다. 간절곶에 다다르면 바다로 열린 언덕 위에 빈 벤치 하나 놓여 있다. 그리고는 청사포까지 온통 푸른 길이다. 하릴없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의 푸른기에 밀려 기장 앞바다마저 지나치면 이윽고 최백호의 ‘청사포’. 앙증맞게 파란 등대, 달맞이 고개 위의 성냥갑 같은 집들, 조금은 덜 떨어진 듯 보이는 한 쌍의 연인과 함께 거기 마냥 서성거릴 일이다. 더 나아가봤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 냄새 풍기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해운대일 뿐이니까.

고래를 기다리며

태초에 고래가 있었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사람살이의 가장 오래된 기록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제법 사실적으로 ‘경연(鯨宴)’이 묘사되어 있다. 물을 뿜어대는 고래에서부터 새*끼를 등에 업은 고래, 작살을 맞은 고래, 그물에 걸린 고래, 뿐만 아니라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배와 고래의 해체와 분배에 관한 그림에 이르기까지 고래와, 고래에 얽힌 사람의 삶에 관한 기록은 그토록 낱낱하게 남아 있다.

내력은 그렇게나 긴데도 울산 앞바다가, 장생포가 근대적인 의미의 고래잡이의 터전으로 부상한 것은 1891년부터였다. 당시 러시아의 황태자였던 니콜라이 2세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장생포 앞바다에서 거대한 고래떼를 보고 무릎을 쳤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태평양어업주식회사를 세우고 한국 정부로부터 포경권을 얻어 본격적인 고래 사냥에 나섰다. 당시 포획한 고래의 해체 장소로 쓰이던 장생포는 그렇게 포경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상업 포경을 금지할 때까지 장생포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지만, 동해바다의 고래들은 처참한 수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계속되는 남획으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참고래도, 유달리 모성 본능이 강하다는 혹등고래도, 영리하면서도 사납기 그지없다는 귀신고래도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그토록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젊은 시절을 보내던 나였지만, 정작 장생포를 처음 가본 것은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뒤였다. 이미 장생포에 잡아야 할 고래는 없었고, 설혹 있다 해도 그 고래를 잡을 힘이 내게는 없었다. 장생포 역시 모든 희망도 꿈도 잃어버린 늙은 고래처럼 그렇게 웅크리고만 있었다. 쓸쓸한 선창가, 이미 폐선이 되어버린 낡은 포경선 두어척, 오래된 고래고깃집들, 비릿한 바다내음이 내가 본 장생포의 전부였다.




내년 울산에서 열릴 국제포경위원회 연례회의를 앞두고 장생포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 금년 10월에 고래전시관이 문을 여는 것을 필두로 방어진항에 고래해체장을 건립할 예정이며, 고래연구센터를 세우고 고래관광선을 띄우고 고래축제를 확대하여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고래도시’로 재부상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과학 포경이나 솎아내기 포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포경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그렇지만 장생포는 알고 있을까.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는 것을. 시인의 말마따나 차라리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늙은 포수처럼 이제는 기다림마저 놓쳐버린 나는 장생포의 어둑한 선착장에서 자꾸만 신화처럼 떠오르는 흰고래의 환영만을 망연자실 바라볼 뿐이었다.

TIP  열두 가지 맛을 낸다는 고래고기를 맛보면서 나는 열두 가지 심사에 시달렸다. 지금 내 혀 끝을 거쳐 뱃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고기는 소위 ‘익사’한 고래의 유물이다. 꼬들꼬들한 육질이나, 사르르 녹는 맛이나, 은근한 향취 따위가 모두 그렇게 덧없이 무너져버린 희망의 대가라니! 사실 이런 쓸데없는 감상부터 버려야 했을 거였다. 고작 음식 한 점을 두고도 이런저런 생각부터 헤집어대는 나는 애당초 미각을 즐길 수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고래고기를 시식하려던 무모한 시도는 끝내 고린내라는 씁쓸한 뒷맛으로 남고 말았다.

청사포로 무너지다

해운대를 지나서 꽃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고개에서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 -최백호 [청사포]

낭만가객 최백호는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고개 아래 청사포로 무너지지만,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는 나는 고래도시 울산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청사포로 간다. 그 푸른 동해바다를 끼고 가는 길은 깊고 푸른 관능으로 가득하다.

동경 밝은 달에 밤새 놀며 다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디 내것이지만 빼앗겼음을 어이할꼬 -[처용가]

본디 고래도시였지만 이제는 공업도시가 되어버린 울산, 그 폐해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온산 앞바다에 우두커니 떠 있는 처용암이 주는 상징은 처연하다. 용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지방 호족의 자제라고도 하고, 어쩌면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무역상일 것이라고도 하는 처용은 아내의 불륜을 보고도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어쩌랴. 용의 나라는 깨졌고 뭍에 가득한 물신(物神)들은 어떤 축귀(逐鬼)로도 쫓을 수 없으니.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그러나 죽음보다 더 깊은 관능으로 바다는 여전히 푸르다. 서생포 왜성과 간절곶 등대를 지나서, 기장 앞바다를 지나서 마침내 청사포에 이르면, 왜 길이 그토록 푸르렀는가를, 그 푸르름이 왜 그렇게 관능적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옛날 이곳 청사포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면 아내는 어김없이 바닷가 바위 위에 올라서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이별과 해후가 반복될수록 둘의 사랑은 더욱 애틋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바다로 나간 남편은 풍랑을 만나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몇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서서히 죽어가는 아내, 바다속에서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남편의 혼백. 그 간절한 그리움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던 바다의 신은 푸른 뱀을 보내 아내를 인도한다. 그렇게 만난 부부는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몽환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청사포(靑沙浦)는 원래는 청사포(靑蛇浦)였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부산의 연인들은 바다를 보러 가자면 으레 청사포를 떠올렸다. 그때는 모두 달맞이 고개에서 내려다보는 청사포 앞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넓고 깊은 바다인 줄 알았다. 오죽했겠는가. 그곳이 비록 푸른 모래 한 점 없는 작은 포구라 해도, 찰랑거리는 물결이 발등조차 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바닷가라 해도 이미 열정과 구애로 들뜬 연인들에게 그 바다는, 그 바다의 밤은 하염없이 깊고도 아득했으리라.

여인아 귓가에 간지럽던 너의 속삭임 아직도 물결 위에 찰랑이는데 찰랑거리는데 순정의 첫키스 열정의 그날밤 수줍던 너의 모습 이제는 바람의 흔적마저 찾지 못할 청사포

최백호의 회상은 덧없이 이어지지만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에서 나는 추억으로 무너졌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흐르는 건 흐르도록 놓아둘 수밖에. 파랗게, 파랗게 흐르는 시간과 다시는 못만날 빛과 바람까지 그렇게, 그렇게 보내줄 수밖에. 그렇지만 또 어쩌겠는가. 잠든 기억을 아프게 비집고 뒤척이며, 솟아오르는 푸른 비늘 하나는.

TIP  이왕 부산까지 흘러왔으니 자갈치시장쯤은 꼭 들러야 한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비록 살 수는 없어도 볼 수는 있다. ‘부산 남포동 낄끼리 연락선, 뱃고동 뒷나발 부는데’, 자갈치아지매와 판때기장수들, 오로지 활력 하나로 먹고 산다. 그래서 사실은 자갈치시장이 부산에서 가장 큰 바다다. 옛날 이곳은 자갈 많은 ‘자갈마당’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에서도 나는 속된 관능을 연상한다(이건 순전히 대구 ‘자갈마당’ 탓인가). 어쨌거나 정력에 좋다는 꼼장어 한 접시와 화이트 소주에 제법 취기가 오른 나는 집에 두고 온 마누라 생각에 잠시 몸을 뒤틀었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편집회사 투레 대표〉 rotack@lycos.co.kr]

기사제공 :  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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