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대 산업재해 인도 ‘보팔 참사’ 20주년

2004.12.05 | 미분류

역사상 최대 산업재해 인도 ‘보팔 참사’ 20주년
8000t 유독물 아직 방치

1984년 12월3일 새벽,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보팔 주민 라비아 술탄과 그의 남편은 눈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잠이 깬 뒤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고추를 태우는 것 같은 매운 냄새가 났다. 배는 부풀어 오르고 눈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으나 거리에는 사람과 동물의 주검이 즐비했다. 남편은 몇달 뒤 죽었다.” 이제 55살이 된 술탄은 3일 〈로이터통신〉에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역사상 최대의 산업재해’ ‘화학물질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보팔 참사가 일어난 지 3일로 20년이 됐다. 이날 보팔시 외곽에 있던 미국 화학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의 농약공장에서 원료저장 탱크의 밸브가 파열돼 맹독성 물질인 메틸 이소시안염(MIC) 40t이 새어나와 안개처럼 도시를 뒤덮었다. 인도 정부의 공식통계로 3500여명이 그날 목숨을 잃었고, 1만5천명 이상이 후유증으로 죽었다. 환경운동가들은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3만3천명이 넘는다고 말한다. 약 50만명이 가스에 노출됐고 지금도 10만명 이상이 폐결핵, 암, 호흡곤란, 실명, 피부질환, 정신질환 등에 시달린다.

20년이 지난 지금 유니언 카바이드와 2001년 이를 인수한 다우 캐미컬은 그 사고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워런 앤더슨 당시 유니언 카바이드 회장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인도 법정의 출두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1986년 인도 정부는 유니언 카바이드와의 협상에서 보상금으로 4억7천만달러만을 받고 더이상 어떤 책임도 묻지 않기로 합의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2일 피해자들이 직접 소송을 제기하면 약 300억달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인도 정부는 피해자들과 어떤 논의도 하지 않은 채 합의해주었다고 지적했다. 부상자들은 2만5천루피(60만원), 사망자 가족들은 10만루피(240만원)씩을 받았을 뿐이다. 사고가 일어났던 공장 근처 판자집에서 만성적 기침에 시달리는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사키나 비는 “호흡곤란과 세번의 유산을 한 딸의 치료비로 보상금보다 몇배나 많은 돈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노동능력을 잃은 많은 피해자들은 공장 주변의 빈민가에 살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유니언 카바이드가 참사현장 정화작업도 거부해 약 8천t의 유독물질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인디펜던트〉는 현장취재 기사에서 공장에는 여전히 숨조차 쉴 수 없는 끔찍한 냄새로 가득했으며 여전히 유독물질을 담은 자루들이 창고에 흩어져 있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공장 안에 남아 있는 화학물질들이 주변의 빈민들 식수원인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 라시다 비는 “ 내가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지난 20년간 하루도 진통제를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와 올케는 후유증으로 죽었고, 조카와 올케의 아이는 실명했다. 그는 책임자 처벌과 보상을 요구하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고는 오염사업을 제3세계로 이전한 유니언 카바이드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일어났다. 저장탱크의 고압, 저온 상태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하지만 회사는 이를 지키지 않고 경보체계도 갖추지 않았다. 당시 공장 작업반장이었던 티 아르 초우한은 증언했다. “온도표시 경보기가 설계 결함 때문에 오래 전부터 작동하지 않았지만 회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원래는 가스 누출을 알리는 경보사이렌이 설치돼 있었지만 사고나기 4개월 전 소리가 안나는 경보기로 바꿨다. 여러번 작은 누출사고가 일어나 경보가 울렸기 때문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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