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案문명⑤-1] 미국 지역사회 갈등해결 운동 : 이웃간 다툼 대화로 푸는 ‘또다른 법정’

2003.02.05 | 미분류

<말싸움에서 인종분규까지 시민중재단이 함께 해결>
<샌프란시스코서만 年 1200건 상담>

지역사회는 갈등의 용광로다.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가족 간이든 이웃 간이든 갈등이 없을 수 없다. 학교나 각종 기관 단체, 나아가 관청과 주민 간의 갈등은 더 첨예할 수 있다.

그래서 갈등을 효율적으로 풀어가는 시스템은 바람직한 사회상의 한 척도로 여겨진다. ‘이웃을 돕는 이웃이 우리의 갈등을 해소해 준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주민 스스로가 갈등을 풀어가는 ‘지역사회 갈등해결 운동’이 1980년대 이래 미국 사회에 뿌리내려 왔다.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사소한 일로 필리핀계 10대 소년이 백인 소년들이 탄 차를 향해 총을 쏜 사건이 발생했다. 차를 타고 가던 백인 소년들이 알은체했을 뿐인데, 필리핀계 소년은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착각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곧 백인 소년들이 보복을 선언했고 집단폭력 사태가 임박한 듯했다. 이를 감지한 경찰이 ‘커뮤니티 보드(지역사회위원회)’에 갈등 해결을 의뢰했다.

커뮤니티 보드는 곧 청소년 상담 전문가 등 3명의 자원봉사자로 패널을 구성하고 사건의 당사자들을 불렀다. 하루 두시간 정도씩 주말마다 수차례의 대화 중재가 이어졌다.

처음엔 꾸준히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중재자가 먼저 나서는 경우는 없다. 시간이 지나며 상대를 이해하겠다는 자세가 보일 때 조금씩 서로 얘기를 주고받도록 했다.

“처음엔 사소한 오해였는데,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일을 확대할 뻔했네요.” 마침내 양쪽의 소년들은 분을 삭이고 사건을 끝내는 데 동의했다.

경찰과 법원을 대신한 커뮤니티 보드의 사무실은 히스패닉계가 많이 사는 24번가에 있었다. 길가의 2층 건물에 6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 전임 직원이 된 도나 살라자르(52.여)가 “작지만 지역사회 갈등해결 운동의 중심지”라며 사무실로 안내했다.

“상근 직원은 적지만 등록된 전문 자원봉사자가 2백25명이나 됩니다. 그들이 매월 1백여 사안씩, 연간 약 1천2백건의 각종 지역사회 문제를 상담해 주고 있지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레이 숀홀츠라는 변호사에 의해 시작된 이 지역사회 갈등해결 운동은 80년대 이후 미국 전역으로 확산돼왔다.

현재 미국 내 5백여 지역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10년 전엔 전국조직본부(NAFCM)까지 워싱턴DC에서 발족했다. 최근엔 유럽과 중남미 국가들에도 이 운동이 확산됐다.

이 단체가 취급한 사건들을 보면 지역사회의 거의 모든 활동을 포괄한다. 동네 가게주인과 손님 간의 말싸움, 집주인과 세입자 간 시비, 이웃해 사는 서로 다른 인종 간의 분규 등 사적.공적 분규 모든 일에 개입해 왔다. 연간 1천건 이상의 상담요청 중 절반은 당사자가, 나머지 절반은 경찰.법원.학교.시청 등 공공기관이 의뢰해 온 것이다.

“상담 요청이 오면 3명의 훈련된 자원봉사자들로 해당 문제의 패널을 구성합니다. 사안에 맞춰 남녀.연령.인종 등을 조합해 패널을 짜지요. 패널이 양쪽 당사자들을 불러 중재를 하게 되는데, 우리가 개입하면 80% 이상 해결을 봅니다. 물론 상담 비용은 무료이고요.”

위원회의 찰스 리걸(46)사무총장이 해결능력의 비법은 ‘초기개입과 학습효과’라고 설명했다.

커뮤니티 보드의 역점사업 가운데 하나는 교내 폭력이다. 오늘날 미국 내 5천여개의 학교가 운영하고 있는 ‘또래 중재(Peer Mediation) ‘역시 80년대 초 이 단체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또래 중재는 초등 또는 중.고등학교에서 중재자가 될 학생을 선발해 갈등해결 기술을 집중 훈련시킨 후 학생 간 폭력이나 갈등문제를 직접 해결케 하는 프로그램이다.

샌프란시스코 윌리엄 라발라 초등학교의 경우 또래 중재 학생들이 ‘갈등 매니저’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교내를 순찰한다. 그러다 학생 사이의 시비를 목격하면 당사자들에게 “중재를 해서 풀어주길 원하니”라고 묻는다.

양쪽이 동의하면 당사자들에게 기본원칙부터 설명해준다. 기본원칙은 세 가지. 첫째, 서로가 번갈아가며 말한다. 둘째, 말할 때 상대방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셋째, 합의에 도달하도록 노력한다. 중.고등학교 역시 비슷한 과정인데 좀더 복잡하다.

이 같은 교내 갈등해소 프로그램은 그 효과가 입증돼 91년 이후 참가 학교가 40%나 늘었다.

위원회는 최근 갈등해결 기술을 중재자만 아니라 전교생과 교사.학부모들에게까지 확산시키고 있다. 교과과정에 접목시키는 새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다. 또래 중재자만 그동안 1만여명을 선발해 훈련시켰다. 최근엔 샌프란시스코에서만 연간 1천명 이상을 훈련하고 있다.

갈등해결 프로그램은 학교 외에도 기업이나 각종 사회단체, 병원.사회복지 시설 등 공공기관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이 단체는 중재자들을 양성하는 3~4일 간의 정기훈련 과정과 현장 방문교육 프로그램, 나아가 지역사회 포럼.워크숍 등 각종 프로그램을 왕성하게 선보이고 있다.

최근엔 미국변호사협회(ABA) 전국대회에 초청돼 사례발표를 하기도 했다.

위원회의 살라자르는 자원봉사자 비키 오펜하이머 (50.여)와 관할 미션 경찰서의 루비노(54)경사를 소개했다. UC버클리대 직원인 오펜하이머는 중재 자원봉사자로 일한 지 1년 경력이지만 누구보다 열렬한 활동가다.

오펜하이머는 “그동안 집 문제와 이웃 간 분규 등 6~7가지 경우에 패널로 참가했어요. 정말 너무나 멋진 경험이었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루비노 경사는 “커뮤니티 보드는 경찰관들에게 가장 고마운 단체”라고 말했다. 경사는 “여러 분야에서 도움을 받고 있지만, 특히 관내에서 매달 20여건 발생하는 청소년 비행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감정적으로 민감한 청소년들에겐 따뜻한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지역사회의 각종 분규와 갈등을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해 가자는 갈등해결 운동은 분명 기존의 경찰.법원 등 공식기구를 보완 또는 대체하는 시민문화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운동은 90년대에 들어 커뮤니티 보드의 설립자 숀홀츠에 의해 러시아.체코.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민주주의 기술’로 전파됐다.

숀홀츠는 ‘민주적 변화를 위한 파트너’라는 단체를 설립해 동유럽 국가들의 정부 관리와 노조원, 교육 관계자 등 7천여명을 훈련시켰다. 지역주민들에 의해 시작된 미국 민주주의의 테크닉이 학교.지역사회를 넘어 국가 전체로, 나아가 세계로까지 뻗어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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