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案문명⑨-1] 독일 퍼블릭 액세스 운동 : TV 상업화 맞서 시민들이 직접 제작

2003.03.14 | 미분류

지난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발명품 중 하나는 텔레비전이다. 이 경이로운 매체는 사회제도는 물론 일상생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TV는 크게 보아 공론(公論) 형성과 오락 제공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공론기능은 약화되는 대신 오락기능은 비대해지는 추세다. TV 프로그램들이 날로 상업화하면서 시청률 경쟁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TV가 갖는 공론 형성 기능은 회복이 불가능한 것일까. 1980년대에 등장한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 운동은 바로 이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퍼블릭 액세스권(權)’은 시청자가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이에 따라 시청자가 기획부터 제작까지 책임지고 만든 프로그램을 뜻하는 ‘액세스 프로그램’이란 말도 생겨났다.

독일에서 퍼블릭 액세스 운동을 대표하는 TV 채널은 ‘베를린 개방 채널’이다. 지난달 초 구름이 짙게 낀 날에 방문한 베를린의 옛 동베를린 지역은 통일된 지 13년이 지났는데도 거리 곳곳에서 아직 단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차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볼타거리 5번지를 찾아갔다. 베를린 개방 채널은 과거 공장이 들어섰던 건물의 1,2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위르겐 링케(60)국장은 퍼블릭 액세스 운동계에선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 한국도 두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독일의 개방 채널 운동은 1983년 루드비히스하펜에서 시작돼 이듬해 곧바로 베를린에 도입됐습니다. 이후 개방 채널 운동은 베를린이 선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난해 현재 독일에서 전파를 내보내는 개방 채널은 모두 73개. 케이블과 라디오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라디오 개방 채널만 운영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베를린 개방 채널은 주로 케이블을 통해 시청자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한편 라디오 방송도 내보내고 있었다.

먼저 방송국 내부를 둘러봤다. 1층은 TV 스튜디오, 2층은 라디오 방송용 공간과 행정업무를 위한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담한 규모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활력이 넘쳐 보였다. 상근직은 모두 13명. 기술담당 직원이 8명이고 나머지는 행정담당이었다.

이번 주의 프로그램 계획표를 요청했다. ‘4개의 청소년 단체와의 대화”독일 영화의 추억’등이 눈길을 끌었다.

스튜디오 관계자는 특히 심야시간에 방영되는 토론 프로그램에 가장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민이 손수 만든 프로그램을 일절 편집하거나 삭제하는 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청자라면 누구나 개방 채널에 자신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는 베를린시 방송법에 따른 것이지요. 외국인을 포함해 누구든지 한 달에 1백20분까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고, 한번에 60분까지 그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 있습니다. 원할 경우 개방 채널로부터 기술적인 조언이나 기자재 지원까지 받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시민들의 참여는 어느 정도일까. 링케 국장은 “하루 평균 10편 정도의 작품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달 평균 3백편 가량이다. 대단한 참여 열기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 개방 채널 측은 심사를 거쳐 방영할 프로그램을 선정한다. 상업용 광고 프로그램이나 그런 의도가 다분한 프로그램은 사절이다. 그러나 정해진 법규에 저촉되는지 아닌지를 심사할 뿐 일단 선정된 작품은 내용을 마음대로 편집할 수 없다.

“개방 채널에서는 극우성향의 프로그램도 방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독일의 상징인 철십자도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인 선동을 담고만 있지 않다면 방송할 수가 있지요.”

베를린 개방 채널은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도 방송할 수 있다.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을 중시하는 개방 채널의 이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유학생 박기만(32)씨는 개방 채널 예찬론자다. 베를린 공대에서 음향기술과 음악학을 전공하고 있는 朴씨는 베를린 개방 채널의 음향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최근에는 ‘쇠네베르크구 사람들의 예배’라는 제목의 작품 제작에도 참여했다.

베를린 개방 채널의 행정담당자 디트마 프리톤(40)씨는 “개방 채널 일을 사랑한다.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인지 방송국의 분위기는 마치 활기찬 비정부기구(NGO) 사무실처럼 느껴졌다.

본래 공론의 장(場)이란 하나가 아닌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볼타 거리에서 취재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서베를린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물원 공원 내의 전승기념탑이 눈에 띄었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이 전승기념탑 위에서 시작한다. 천사 다미엘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진리임을 깨달았을 때 영화는 끝난다. 여럿의 목소리가 함께 어울리는 민주주의. 퍼블릭 액세스의 목표도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를린=김호기 교수(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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