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산 인연의 날 스케치

2003.11.11 | 미분류

좀더 더디 가면 안되나요?
11월 9일, 천성산과 인연을 맺은 생명의 발걸음이 하나씩 둘씩 부산시청에 모였습니다. 걸을 때 마다 뒷발굼치가 신발에서 빠져나간다는 지율스님의 단식은 이미 37일째입니다. 하지만 속으로 곪아가는 돈과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보고자 발버둥치는 저 높은 양반들은 스스로의 입과 글로 한 공약을 한 생명과 함께 묻어버리고 있습니다.



  

아, 대가없는 진실에 가슴앓이하며 짧은 비명을 질러보아도, 바뀌는 것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랑, 생명, 눈물, 희망의 감상적인 메아리는 다시 울려 은자(隱者)의 발걸음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부산시청에 모였습니다.



처음 대면하는 이의 안부를 익숙하게 묻기도 하고, 손바닥 도장을 만들어 말없는 지율스님과 인사도 했습니다. 재판장이 듣도록 우리 모두 도롱뇽 흉내를 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부산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를 따라 부산시청에서 서면까지 속삭이듯 무한의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모든 것이 이제 헐거워져가는 지율스님과 약속했습니다. 내 한 풀잎을 가져다 깨달음을 삼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겼다고 잔잔한 웃음도 지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흐린 가을볕 속에 세상은 가는 현처럼 아름다웠고, 최악의 경우에도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동받고자 바랍니다.

아래에 지율스님의 이야기 몇 자를 옮겨봅니다.



“쏟아지는 폭우가 그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늪가에서 꼬마잠자리가 먼저 자리를 잡고 나비와 작은 곤충들이 늪가를 배회하기 시작합니다. 끈끈이주걱도 머리를 들고 이삭귀개도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풀숲에 숨어있던 장지뱀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고 그 위로 참매 한 마리가 선회합니다. 천성산의 작은 늪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정원입니다.”

“이제 자연의 방문자로 이 땅에 온 우리의 모습을 겸허히 돌아보고 인간이 아닌 뭇생명의 눈으로 개발의 문제를 되짚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도롱뇽소송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와의 아름다운 연대관계를 유지하며 조화로운 지구가족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담은 새로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한쪽은 제트엔진을 달고 요란하고, 한쪽은 짚신을 신고 묵묵히 들길을 걷듯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겼다 이미… 우리는 무엇을 내도 이기고, 저들은 무엇을 내어도 진다. 우리의 뜻이 대가없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승패가 없다. 이미 풀꽃들의 간들거림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비님 지리하게 내립니다. 그래도 이런 날 산사의 툇마루에 앉아 멍청하게 한 나절 보내고 싶습니다. 기왓장 사이의 연초록 이끼 천년의 세월을 이긴 결과이듯 알록달록 단청의 붉음을 머금고 타 내리는 빗줄기도 우주가 토해내는 화엄경의 한 자락이겠지요. 빗줄기 세어질수록 수제비 공양 내음이 법당 부처님의 코끝을 간지면 그 결에 못이기는 척 끼어들어 공양주 보살 칭찬이나 해야겠습니다.”

“당신이 이르신 연관의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대상의 평화, 객관의 안위가 우리들 행복의 전제가 됨을 이해하기 되었으니 말입니다.”

“잠 안오는 밤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천성산에 구멍을 내지 않겠다고 기억도 흐른 꿈의 끝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며 새벽잠에서 깨어났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내 깊은 무의식까지 찾아와 나를 위협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 깊은 어둠이 싫다. 슬픈 꿈이었다.”



글 : 자연생태국 윤상훈 dodari@green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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