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벌은 모든 것을 안고 불타버렸습니다.”

2004.02.18 | 미분류

지난 2월 14일 오후 1시 30분, 천성산 홍룡사 인근에서 발발한 불은 오후 내내, 그리고 밤새 화엄벌을 태워버렸습니다. 등산객의 담뱃불이 산불의 원인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오후 동안 헬기 6대와 지역주민, 공무원 등이 힘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성의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해거름에 방재 작업을 일시 중지한 채, 타오르는 천성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이 산, 저 산, 무심한 듯 쉽게도 불길은 천성을 넘나들었습니다.



홍룡사 인근의 산불긴급회의를 둘러보고, 천성산 내원사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9시. 내원사 계곡은 천성산 화엄벌의 불길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초속 20m의 강풍이 불어 닥쳤고, 이내 내원사를 삼킬 기세였습니다. 스님들의 눈에는 소리 없이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아픔으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고, 주위에는 독경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대기하던 소방차 3대의 붉은 싸이렌만 밤새 내원을 밝혔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정이 다 되어 올라간 화엄벌 기슭은 세찬 바람에 제 몸둥이를 하늘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곧 닥칠 화마의 열기를 알고나 있는지…

아침이 밝았고, 열기가 식지 않은 화엄의 언덕을 올랐습니다. 능선과 계곡을 타고 거슬러 올라온 불길에 화엄벌은 온전히 ’화엄’이 되었습니다. 밤새 보충된 13대의 헬기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양산천과 인근 저수지에서 물을 실어 날랐습니다. 겨울 내내 말라버린 화엄늪의 갈대는 모조리 재로 남았고, 불에 탄 화엄늪습지보호지역 안내판 만이 이곳이 생태계의 보고임을 증명하였습니다. “화엄늪은 생태적으로 중요한… 희귀식물들과… 수생곤충… 일반인의 출입을 삼갑니다. 2002.2…”

화엄벌, 1000명의 성인이 설법을 받고 부처가 된 땅. 2002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이곳에, 남은 것은 옛 전설의 기억뿐 입니다. 원효산 정상의 군부대에서 내려본 화엄벌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밤새 죽어간 생명은 무엇을 원망하는지, 보는 이는 절로 긴 한숨만 토해 냅니다.



1994년 11월, 천성산 일대는 경부고속철도 부산·경남권 사업구간의 일부로 환경영향평가 최종보고서가 승인된 지역입니다. 당시 보고서의 동·식물상 조사 부분에서는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동·식물은 없음”이라고 명확하게 명시했습니다. 더욱이 천성산 계곡에는 도롱뇽 한 마리도 서식하지 않으며, 현재 생태계보전지역,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무제치늪, 화엄늪의 존재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천성산을 단 한번 만 올랐더라도 이런 엉터리 보고서에 근거한 사업은 승인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공사는 진행되었고, 급기야 천성산 도롱뇽이 인간의 법정에 원고로 나서 사업의 불합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산불 전날, 경부고속철도 사업구간 내에 위치한 천성산의 한 저수지에서 천연기념물 327호 원앙 70여마리,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약 500마리의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다행히 화엄의 불길은 이곳을 넘지 못했고, 원앙은 죽음으로부터 비켜났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허나, 다음날 찾아간 이곳의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원앙은 모두 30마리를 넘지 않았습니다. 산불로 인해 동원된 13대의 헬기가 밤낮으로 이곳에서 물을 퍼 날랐기 때문입니다. 관찰된 3마리의 원앙 중 한 마리는 날개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나머지는 화마의 강풍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이, 오늘날의 세계는 분명 과학·기술의 세계이며, 산업과 개발은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풍요롭게 할 유용한 수단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술력의 무분별한 사용은 필연적으로 환경재앙을 야기합니다. 20세기 초반, 한 생태학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바람직한 토지이용을 오직 경제적 문제로만 생각하지 말라. 낱낱의 물음을 경제적으로 무엇이 유리한가하는 관점뿐만 아니라 윤리적, 심미적으로 무엇이 옳은가의 관점에서도 검토하라. 생명공동체의 통합성과 안정성 그리고 아름다움의 보전에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옳다. 그렇지 않다면 그르다.”

(공지)
2월 20일 10시 도롱뇽 소송 마지막 심리가 울산지법에서 진행됩니다. 법원심리에 앞서 9시 30분부터 울산 법원 앞에서 “환경영향 평가에서 사라져 간 생명들”이라는 이름의 퍼포먼스가 진행되오니 참관을 원하시는 분은 천성산 홈(www.cheonsung.com)- 게시판을 통하여 참관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산시청 앞에서 7시에 울산법원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합니다.

글 : 자연생태국 윤상훈 (02-747-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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