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의 끝자락에서

2004.03.15 | 미분류

활엽수가 대부분인 겨울철 우리나라의 산은 흡사 먼지를 잔뜩 머금은 담요같이 보입니다. 멀리서 보이는 회백색의 앙상한 활엽수는 참으로 볼품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겨울산을 볼 때면 산껍질을 한꺼풀 벗겨내어 해묵은 겨울 담요를 털어내듯 툴툴 털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몇주전에 불타버린 화엄벌을 보러간 이후 천성산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만약 화엄벌이 불타지 않아 바람결에 굽이쳐 일렁이는 황금억새 물결을 실제로 보았다면 천성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나 이번이나 천성산은 제게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산이었습니다. 아마 겨울산에 대한 제 해묵은 편견 때문이겠지요.

3박 4일의 일정 중 3일째 되는 날, 점심을 먹고 어느 계곡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쉽지만은 않은 이틀의 일정을 보낸뒤라 조금 피곤하기도 해서 큰 바위에서 벌러덩 누웠습니다. 잠시 후 사위는 고요해지고, 쪼르륵거리는 개울물 소리만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눈시리게 맑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예의 그 앙상한 활엽수 가지들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심심하고 볼품없는 활엽수 가지의 끝자락마다 돌기같은 것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잎이 피어날 조그만 봉오리들이 오돌토돌, 생뚱맞게 맺혀있었습니다. 꽃봉오리처럼 화려하고 도톰하게 살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봉오리 안에는 무언가 꼬물거리고 있으며 게다가 제가 그렇게 볼품없다고 여기던 활엽수 가지가 해내고 있는 꿈틀거림이었습니다. 그것은 소담스런 생명이었습니다.



지금껏 너무 멀리서만 바라보는데 익숙했었나 봅니다. 제게 겨울산의 이미지는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 안, 또는 황망히 걷는 도시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그 텁텁한 겨울산이 실제로는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는줄 가까이서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화려한 것만 바라보는데 익숙했었나 봅니다. 제겐 백합이나 목련의 꽃봉오리만 봉오리였습니다. 앙증맞고 소소한 잎봉오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른 성불암에는 향이 천리나 뻗어나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천리향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처럼 화려한 자태였으며 그 아리동동한 꽃내음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방울처럼 동그스름한 꽃망울을 둘러싼 한 꽃무더기 만으로도 온 산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듯 했습니다. 또 성불암을 지나 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요행히 봄꽃의 절정이라는 얼레지를 보았습니다. 할미꽃마냥 고개를 설레설레 떨구고 있지만 별모양의 꽃잎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부르르 떨고 있는 듯 했습니다.

역시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붙잡고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듯 보였습니다. 또한 산행 중에 만난 고깔제비꽃과 현오색 등 봄의 신호탄들은 조용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하게 산 이곳저곳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제게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것은 해발 700미터 가량의 공룡능선에서 바라본 양옆 산등성이, 산자락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심심하고 보잘것 없는 겨울산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어떤 이는 흡사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멧돼지털을 보고 있는 듯 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겐 옹기종기 모여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잎봉오리들이 수십 억개씩 모여 모두 저마다 꼬물꼬물거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천수만 가창오리 수천마리의 화려한 군무보다도 더 화려하고 아찔하고 두근거리는 모습을 겨울 담요 같다고 여겼던 겨울산에서 보았습니다.



천성산에서의 일정중에서 원효터널 구간의 시작점과 끝점의 공사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고속철도관리공단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4곳 정도에서 공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천성산은 절대보존녹지이며 보호종인 꼬리치레 도롱뇽이 살고 있으며 생태적으로 중요한 화엄늪과 무제치늪 등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름있는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천리향과 얼레지와 고깔제비꽃과 현오색이 없더라도,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잎봉오리들과 수많은 생명들이 꼬물대는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천성산은 그곳에 그대로 있을 이유가 있습니다.

글 : 손승우 (녹색연합 청소년 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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