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벼이삭과 손수건의 노란 물결 – 활동가의 반핵농활기

2003.10.09 | 미분류

나라 생일 연휴인 지난 4일과 5일, 녹색연합 활동가 몇몇은 이른바 ‘반핵농활’을 다녀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안’하면 ‘새만금’했던 터라, 새만금 근처에는 몇 번 발걸음 한 적이 있지만, 부안하면 ‘반핵’하는 요즘의 부안 땅을 밟는 건 처음이다. 대학에 내내 농활한번 못가본 초짜 활동가인 내가 녹색연합에 연닿게 된 개인적인 애정이 있었던 지라 조금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마을로 들어가는 인적없이 비어있는 학원가, 부안마을로 들어가는 길 양편으로 노란색 문구들이 도배된 벽들이 흉흉하다. 여기 저기 온통 노란색 물결이다.



부안읍내도 마찬가지다. 건물들이 들어서 번성한 읍내는 평범한 시골 읍내의 평화로운 일상처럼 보인다. 노란 반핵 셔츠를 입은 아이들도 보이고 아주머니들도 보인다. 하지만 온통 휘날리고 있는 노란색 물결과 바닥과 벽에 스프레이로 쓰여진 다소 과격한 문구들이 일상과 분리된, 아니 이 평화로운 일상에까지 들어온 두달간의 정서를 말해주고 있었다.

읍내 어느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으며, “요즘 벌이 좀 괜찮아지셨어요?”라는 물음에 아주머니는

“아, 밤이면 밤마다 문닫고 밖에들 나가 집회하는데 괜찮을 리가 있겠어?” 하신다. 이 식당 맞은편에는 철야단식투쟁을 하고 계신 선생님들이 있다. 아이들과 생이별을 한지 1000일째를 맞는 이날, 단식은 4일째지만 1000일만큼의 초췌한 얼굴이다. 잠깐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는데, 천막 뒤에서 교복입은 아이들이 “선생님!”하며 배시시 웃는 얼굴들을 내민다. 서울에서 내려온 우리보다 더 힘이 되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리라. 선생님들 얼굴에도 힘이 돈다.



읍내를 빠져나와, 농활하러 가는 곳은 진서면. 한창 가을걷이로 바삐 움직여야 할 때인데, 인적이 드물다. 양옆으로는 노랗게 벼이삭이 물결치고 있는데 가을걷이하는 모습이 한곳도 보이질 않는다. 마을은 비어있다.

우리를 맞아주시는 이들이 한가족일줄 알았는데, 아저씨 한분이 쓸쓸히 맞아주신다. 부인과 아이들은 부안읍내에 가 있단다. 이 집을 비어논 것도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며, 가끔 아저씨는 이렇게 집에 기르는 개 두 마리 밥이나 주러 오가고 계신다 한다.
오자마자 옷 갈아입고 밭으로 간다. 오랜만에 걷는 시골 길이 정답다.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논둑 가엔 목화가 하얀 새솜을 달았다. 집들을 지날 때마다 큰 개가 컹컹 꼬리 저으며 짖는다.
나락이라도 신나게 베다 올줄 알았는데, 빈 밭에 주저앉아 마늘을 심었다. 단단히 말려놓은 마늘 종자를 쪼개 한 조각씩 엄지로 꾹 눌러 박는 일이니 금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 땅보고 고개들면 고랑 끝은 아직도 멀었다. 오후도 넘어가는 때에 도착해서 해지기 전까지 얼마나 도와드릴 수 있으려나 걱정이다. 결국 몇고랑도 채 못하고 7시반 촛불집회에 가기위해 흙을 턴다.



어둑해진 부안 읍내를 다시 찾았다. 단식농성 천막이 있는 자리를 보니 낮에 왔던 그 거리가 분명한데 분위기는 다르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과 엠프에서 힘차게 울려나오는 노래소리, 쌀쌀해진 날씨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나는 노점상 앞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이런 노점상의 아주머니도 노란 반핵조끼를 입고 노점상에도 노란 반핵기가 걸렸다. 이른바 ‘반핵차림’을 한 사람들. 아빠 등에 업히고 엄마가 끄는 유모차에 실려 나온 아기들도 노란 반핵 두건을 썼다. 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사람들은 교복처럼 노란색 일색이다. 지지발언 사이사이, 연휴를 틈타 농활 온 대학생들의 문화공연이 이어지고, 부안의 중고생 놀이패들도 흥을 돋운다. 개사 한 ‘반핵가’도 흥겨운 분위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장구를 불러내고 있었다.



이날은 촛불집회 71일째, 등교거부 41일째였다. “아이들을 보내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일랑 오죽허셨겄소. 그동안 힘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등교거부를 철회하는 선생님들의 발표가 따뜻하고 결연하다. 상경투쟁까지 이어지며 일제시대 등교거부 아래 광복이후 최장기간 등교거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다시 농활했던 집으로 돌아와 두달간 집을 비워놨던 부부와 두 꼬마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자운아, 너 학교 가고 싶니?”묻는 말에 “엄마, 아직 핵 안짓는다고 안했는데, 나 학교가도 돼?”며 되묻는다.
반핵운동을 하면서 가장 마음 아픈 건 아이들의 모습이다. 풀 베러 간 집의 아들은 이제 막 글을 읽고 하는 때인데, 다른 건 못읽고 못써도, ‘반핵’ ‘핵없는 세상’ ‘바보 김종규’는 읽을 줄 알고, 그리는 그림도 핵표시 로고를 그리며 논다. 그동안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진서 민들레’라는 대안학교가 아닌 대체학교도 마련했다.



사실 등교거부의 한계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걸 풀려는 시점이면 정부에서 대화의 제스쳐를 보내오고 하여 그에 대한 협상처럼 비칠 수는 없는 일이라 미뤄지고 미뤄졌었다. 이번에도 결국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지만, 불안해하는 부모님들의 마음과 아이들, 그리고 점점 떨어지는 등교거부율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런 운동의 결과보다 등교거부 운동을 하면서 얻은 건, 부모님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의 변화다. 그동안 아이들 교육을 얼마나 학교에 전적으로 위탁했던가, 아이들 교육열은 높지만 그에 대한 생각은 부족했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고. “부모들이 아이들 보내고 싶어하거든요. 불안도 하고 그러니까.” 유급까지 말이 나오던 터라. 부안주민들의 변화는 교육에만 있는게 아니다. “지금도 새만금은 하고 핵은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들이 있다. 그래도 새만금 할때만 해도 생각지 못했던 삶과 개발에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핵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게 되고, “새만금이나 핵이 우리의 삶을 위한 진정한 개발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부안의 싸움은 이만큼 주민들의 교육과 환경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놓고 있고, 오늘의 부안에 공동체 의식을 모아내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 얻은 것이 그것이라면, 안타까운 것은 싸우느라 돌보지 못했던 아이들과, 자식같이 키운 농작물이다. “그동안 매주지 못한 잡초씨가 밭에 다 떨어져, 올해 한해 농사만이 아니라 그 다음해까지도 힘들어지죠.” 아주머니는 삭발투쟁으로 짧아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멋쩍게 웃어보이신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 부엌에 들어와 밥을 한다며 더 정성껏 대접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었다. 이 길로 다시 서울로 뒤돌아 올라오려니, 다 심지 못한 마늘밭과 다 매지 못한 풀, 그리고 아직도 먼 싸움길 걷고있는 노란 옷들이 눈에 밟힌다.

글 :  조직국 윤지선

***** 녹색연합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4-0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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