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피난지에서의 4박 5일

2004.08.24 | 미분류

옛날, 부족국가 시절에 울진은 삼척에 속해 있었습니다. 삼척의 그 당시 이름은 ‘실직국’ 이었고 강릉은 ‘예국’이라 불렸습니다.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예국이 실직국을 침략했습니다. 실직국의 안일왕은 갑작스런 침략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그냥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산 속으로 산 속으로 헤매다가, 조그만 마을을 발견하고 숨어살게 되었지요. 그리고는 경치에 취해 아주 눌러 앉아 살았답니다. 그후로 왕이 피신해 살던 마을이라 해서 ‘왕피리’, 그 곳을 흐르는 물이라 해서 ‘왕피천’ 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더는 갈 수 없어 고스란히 남은 땅, 왕피천 – 고명관,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0년 10월호)

초복, 중복도 지나고 여름이 끝난다는 말복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더위는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그래 떠나자, 아닌 말로 더위도 난리의 일종이 아니가. 왕이 피신한 곳으로 가서 나도 왕이 되어 청년이 되어 더위도 식히고 자연과 하나 되는 법을 배우면 좀 좋은가. 또 모르지, 나만 잘났다고 우쭐대던 왕자병, 공주병 기질을 산 속 깊이 묻어두고 하산할 수도 있을지…..
그렇게 왕피천으로 떠났다. 실직국의 안일왕이 다급하게 피난가던 그 날도 이러했을까. 구름 한점 없었고 가마솥 그 자체, 남아있는 모든 것을 태울 기세였다. 그러나 버스는 쭉쭉 달려 원주, 제천을 지나고 몇 개의 터널을 지나고 구불구불한 고개가 이어졌다. 울진은 먼 곳! 그래서 다른 곳보다 생태계가 잘 남아있다는 어딘가에서 들었던 말을 생각하며 한 고개 두 고개 내 마음도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중간 목적지에 도착, 큰 짐을 숙소로 보내고 몇 가지의 필요물품만 작은 배낭에 넣고 왕피천 따라 걷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바위벼랑 사이로 산양이 뛰어다니고 물 속으로 수달이 이리저리 먹이를 찾는다는 땅, 문명에 기댄 채 살아가는 나에게도 그들이 보일까, 아니, 야생의 그들이 문명인의 방문을 허락해 줄까, 그래, 며칠은 나도 야생의 동물이 되어보는 것도 달콤한 일, 인간도 원래 동물계의 일종이 아닌가, 힘들겠지만 자연과 하나되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보는 거야.

영양군 수비면 오무마을에서 울진군 서면 왕피리 왕피분교까지, 그렇게 되뇌이며 자갈밭을 헤치고 물을 건너고 다시 어렴풋이 남아있는 산길을 걸었다. 야생의 친구,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잠시 발길을 멈추고 낯선 발자국과 이름모를 배설물에 친근감을 보이기도 했다. 피난가는 왕이 아닌 야생의 왕이 된 것 같았다면 과장일까?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멀리서 어렴풋이 인가가 보일 무렵 자그맣게 들리는 안도의 한숨, 나는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동물이면서도 동물과는 뭔가 다른, 그 아리송한…..
다시 인간이 되어 한농복구회에서 차려준 무공해채식으로 저녁을 먹고 아우름 김경하 선생님으로부터 야생화 사진을 곁들인 왕피천의 풍광과 사계절을 보고 들었다. 조별 모임까지 마치고 첫날밤은 꿈자리로 이어졌다. 그날 밤 야생의 왕이 되어 벼랑을 타고 열길 물속을 뛰노는 꿈을 꾸었던가, 아니었던가.

이튿날은 몸풀기로 시작되었다. 모둠별로 서로에게 제 몸을 한없이 맡기는. 그리고 아침밥을 먹고 다시 양서파충류와 야생화에 대한 강의를 듣고 숲으로 나갔다. 숲해설가 양경모 선생님이 들려주는 숲해설은 재미있었다. 붉나무와 개옻나무의 차이, 쪽동백과 생강나무 잎의 크기 차이,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와 신나무 그리고 복자기 등의 구분법, 가시가 달리는 배열법이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산초나무와 초피나무의 모양새 등등, 그 동안 아리송했던 것이 풀리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의아해했던 정선아리랑 가사 중에 나오는 동박이 생강나무라는 사실-정선은 동백의 북방한계선을 훨씬 넘어선 곳이기에-을 얘기해 줄 때에는 내 귀가 더욱 커졌다.

뒤이어 조별로 다른 숲을 거닐며 자신과 닮은 자연물을 구해 서로 이야기해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그렇겠지 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과 흙을 노래한 이도 있었고 불쏘시개로 쓰이는 소나무 잎처럼 세상에 불씨가 되고자 하는 이도 있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뒤에서 모둔 것을 감싸 안는 나무껍질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이도 있었고 그 속에 큰 깨달음의 바위가 아닌 그저 작은 돌이 되어 이곳저곳 의문의 눈을 가지고 뒹굴고 싶다는 나도 있었다. 서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어진 물고기 관찰, 수영인지 물고기채집인지 분간이 안가는 일을 끝내고 모여 배운 내용들. 세로줄무늬가 화려한 것은 피라미이고 가로줄무늬가 화려한 것은 갈겨니라는 사실, 어릴적 내가 퉁갈래라고 불렀던 것이 사실은 자가사리라는데, 메기처럼 징그럽게 못 생겼고 더욱이 물기까지 했던 그래서 무지무지 싫었던 그놈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이제는 볼 수 없는 고향친구가 떠올랐다.  

입이 벌어지다
내가 속한 모둠의 이름은 ‘극락왕생’이었는데 왕피천의 생태계를 잘 보전하면 우리도 극락에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욕심이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극락은 먼 내일의 일,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왕피천을 타고 속사에서 구고동까지 내려가 천축산을 오르고 다시 내려와 왕피분교로 되돌아오는 “내려갔다 올라갔다 돌아오자!”의 대장정! 점심을 먹고 왕피천 중류를 거슬려 내려가는 것으로 그 첫 발걸음을 떼었다. 한발 한발 내려가자 절경들이 연거푸 나타났다. 모두들 입이 벌어졌다. 누구도 보지 못한 왕피천의 진면목에 다시 왕이 된 기분이었다. 협곡이 150여 미터 이어진 곳을 지나자 다시 물길 한가운데 큰 돌기둥이 서 있는 곳이 나타났다. 어떤 동양화가 이보다 아름다울까…..



그러나 왕이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그것도 야생의 왕이 되는 것이라면. 온몸에 상처를 내야만 허락되는 것이거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절벽을 오르고 서로 손을 잡고 급류를 건너고 섬뜩한 몇 번의 통과의례, 용소를 끼고 80도에 가까운 좌측 벽을 오를 때는 낙석이 일행을 덮쳤다. 충청도식 ‘돌-내-려-가-유’가 아닌 재빠른 발음에 몇은 피했지만 한 대원은 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랴, 밤이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반도 이남에 있는 계곡의 소 중에서 가장 길고 커다는 용소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그렇게 몇 날 같았던 한나절을 끝내고 폐교된 구고분교에서의 첫날밤 야영,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의 웃음을 섞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야행성의 눈을 반짝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왕피천의 문화를 알기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오래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농익은 옛날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산양의 쓸개는 바람병(뇌졸중같은 뇌혈관 계통의 병)에 특효라 그 값이 금보다 비쌌다는 이야기부터, 수달의 가죽은 왕비나 공주, 고관대작 부인들의 요강깔개(요즘으로 치면 변기깔개)로 쓰였다는 이야기까지, 그 속에 믿거나 말거나 호랑이 이야기도 있었다. 할아버지 한분은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이야기를 해 주셨고 제 흥에 겨워 잘 나가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셨고 그 옆에서 할머니는 ‘날 건달이였지 뭐, 내 고생한거 말하면 거짓말이라 할끼다’하며 초탈한 듯 웃었다.

짐꾼으로의 전락
본격적인 천축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두 왕도 왕자도 공주도 아니었다. 천축산 여성등반대원들과 4명의 남자포터, 단지 짐꾼이었다. 쏟아지는 땀만큼을 물로 채우며 한걸음 한걸음 올랐다. 일행 중 누군가가 가는 도중에 잠깐씩 서서 야생화나 나무공부도 좀 하자고 했지만 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르는 게 목적이었다. 다행인 것은 아침에 동네 어르신들의 옛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힘이 되었다. 요 며칠 우리의 산행이 그들에겐 일상이었다는 사실, 장작더미를 지게에 지고 길게는 사오십리 고개 넘어 장에 가던 이야기,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장에 가던 할머니들의 고단했던 시절, 그리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삼십년도 채 안된….. 장을 보고 걸어오던 어머니를 동구 밖에서 기다리던 경험이 있는 나는 잠시 어머니 생각을 했고 그 생각으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힘든 길이었지만 가는 도중 부실한 짐꾼과 힘 좋은 짐꾼에 대해 비교도 해가며 그럭저럭 재미있게 오를 수 있었다. 그날 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결말을 요구하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차피 인간에 의해 파괴된 것이라면 인간이 복구해야 하지 않느냐고 목을 돋구기도 했고 그렇다면 인위적인 힘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 것인가? 생태적인 삶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우리부터라도 잘 하자’라는 판에 박힌 맹세로 끝났던 대화였지만 쏟아지는 별을 보며 빛나던 눈빛들, 우리 모두 밤하늘의 별로 박히고 싶었던 밤이었다.  

내 마음의 오지에서 들리는 질문들
드디어 야영의 마지막 아침이 되었다. 시원섭섭, 적당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완전 틀린 말도 아닌, 잠시 숲을 관찰하고 주먹밥을 싸서 내려오던 그 날 아침의 기분은 그러했다. 우리가 내려온 골짜기는 우렁골(물론 다 내려와서 주민들에게 물어서 안 이름이지만), 천축산 여러줄기에서 내려온 물줄기들이 모여 왕피천 본류로 합류하는 계곡이었다. 왕피천 본류도 아름다웠지만 각 지류들의 아름다움도 빼어났다.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내려서는 지점을 지도에서 너무 앞서 잡는 작은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물길이 언제나 이어지듯 우리의 발걸음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왕피천 본류로 내려섰다. 그리고 온 몸 풍덩, 나무꾼이 되고 선녀가 되었다.



그날 밤, 모둠별 야영경험 나누기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자신들이 훔쳐본 천상(?)의 세계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목청을 높였다. 물론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정보화기술로 인해 터럭만한 거짓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열을 매긴다는 것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일, 자연과의 교감, 그 짜릿한 기억 앞에서 모두가 하나되는 일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은 잠을 잤던가? 아쉬움으로 뒤척이며 마지막 아침을 맞았다.

왕도 되고 짐꾼도 되고 했던 4박 5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제 무엇이 될까.

왕피리에서 삼근리까지 나오는 길은 공사중이었다. 삼십리 꼬불꼬불한, 이런데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싶을 정도의 오지, 초입은 이미 시멘트 포장이 끝나 있었고 길은 계속 넓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저 길을 어찌하나, 말릴 수도 없는 일, 내가 저 사람들의 입장이 되고서도 길을 내지 말자고 할 자신이 있을까? 어려운 일이지만 그 입장이라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미 고속의 편리, 그 우상에 길들여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또 그 논리를 조종하는 거대시스템을 향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쏠리며 달려오는 내내 내 마음의 오지에서 나를 향해 끊임없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글 : 황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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