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속한 생태계보전지역 지정을 기다리는 왕피천 사람들

2004.10.22 | 미분류

굽이굽이 길은 멀었다. 안동을 벗어나자 길은 좁아지고 고개가 이어졌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강물과 산의 흔적들이 이어지는 사이 가끔씩 인가의 불빛들이 멀리 보였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소읍들도 그야말로 작고 아담했다. 어둠 속을 뚫고 도착한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 왕피천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으로 두메산골, 오지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곳이다. 사람도 산천을 닮아서일까. 영양읍에 도착하니 영양군청 직원 두분이 고향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군은 다 합쳐봐야 인구가 2만명에 불과해요. 종업원수 20인 이상의 공장이 단 한 곳도 없답니다. 그래서 전국 어느 곳보다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라는 이영우계장(영양군청 기획감사실)의 말에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존본능의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뒤이어 그는 생태계보전지역 지정이 더 이상 지연되어서는 안된다고 기존에 계획되어 있던 송방에서 오무까지의 도로공사도 잠정 중단되어 있는 상황인데 도와 주민 등 이해당사자들의 말은 많지만 군에서는 최대한 환경을 헤치지 않는 방향으로 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수하리(수비면)에 적지않은 재정을 투입해 반딧불이 생태체험장과 공원을 조성하였고 신원리(수비면)에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생태마을을 꾸밀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은 연구해볼 사항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라는 그의 말에는 경제성과 주민이익도 따져보지 않고 전시행정 차원에서 만들어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수많은 공공사업들의 전철을 밟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배여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고민에 대해 충분한 답을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루가 갔다.



다음날 낙동정맥을 넘어 왕피천 상류인 수비면으로 향했다. 연못과 조화를 이룬 부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탐방객을 기다리는 반딧불이 생태공원을 지나 왕피천을 따라 내려갔다. 송방까지의 도로는 완벽(?)했다. 지난 2년간의 수해로 무너진 도로는 옹벽으로 말끔히(?) 정비되어 거대한 콘크리트 성벽처럼 보였다.

그만큼 왕피천의 반쪽은 불구의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간에게 깔끔한 것이 자연에게는 상처가 되는 현장은 그 뒤로도 계속 나타났다. 오무마을로 접어드는 강가, 짓다만 교각이 흉물로 변해가고 있었고 건너편 임도에서는 확장공사로 인한 포크레인의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우연히 만난 김영호(독림가)아저씨는 도에서 계획하고 있는 오무까지의 5미터 도로는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오무에는 지금 일곱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요. 그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요. 경제적 효용과 주민편리를 무시한 채 개발업자들의 배만 불리는 형태로 진행되는 건설은 반대합니다. 길도 3미터 정도의 소로면 충분합니다. 그것보다도 하루빨리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는 것이 왕피천도 보전하고 주민들의 삶도 윤택하게 하는 길”이라고 목을 돋구었다.

오무마을 초입에 있는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그의 휴양림엔 개한마리가 쓸쓸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생태계보전지역 지정을 찬성한다는 김영호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왕피천의 모습은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일까? 산림청도 하루빨리 열린 자세로 왕피천을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울진으로 향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을 통과해 지난 봄에 올랐던 통고산을 가로지르는 임도로 향했다. 지난 봄의 조사에서 느꼈던 점은 지난 2년간의 수해가, 수해가 아닌 인재라는 것이었다. 임도가 지나간 자리마다 백미터 정도의 깊이와 너비로 무너진 산사태의 현장들, 그 곳에서 시작된 흙더미들이 강물을 범람시키고 교각을 파괴한다는 사실이었다.

왕피천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곳곳은 지금 수해복구와 산림자원 보호라는 명목하에 무너지면 파내고 다시 더 크게 무너지는 과정에 있다. 통고산 임도 곳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봄의 현장들은 더 깊숙이 산허리가 파내어져 있었고 길은 넓어져 있었다. 멀리서도 임도는 봉합된 수술자국처럼 뚜렷했다.

문제는 그 수술자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는데 있다. 나도 몰래 손마디를 내려봤다. 지난 봄 조사때 무너진 임도에서 돌에 깔려 다쳤던 오른손  손가락의 마디는 거의 제모습을 찾고 있었다. 사람의 생살도 이렇게 다시 살아나는구나! 그런데 자연과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시간의 보상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 그 무지로 인해 무너지면 더 깊숙이 파내고 더 넓히는 임도길은 아무래도 다시 살이 붙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왕피천 본류를 향해 왕피천 깊숙이 들어갔다. 통고산을 넘어 구절양장의 비포장길을 따라 40여리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왕피리, 어느 누구보다 생태계보전지역을 바라는 왕피리 주민들, 문명과 멀리 떨어진 관계로 조금은 불편한 삶이지만 그들은 왕피천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섞여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바램처럼 왕피천은 하루빨리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재생가능한 지구의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왕피천의 환경과 인간의 삶이 회복불가능의 상태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이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공존하는 길이 될 것이다.  

글 : 자연생태국 자원활동가 황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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