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2차탐사 후기

2005.01.28 | 미분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차탐사였습니다. 남성의 수가 많았던 1차탐사에 비해 이번 2차탐사에는 여성들의 수가 대폭 늘어나 한쪽으로 기울어진 성비의 불균형이 역전되었답니다. 그래서 들렸던 말, 1차탐사가 ‘가족적’이라면 2차탐사는 ‘가축적’이라는 말. 그렇다고 오해마세요. 2차탐사에 여우같은 마누라를 산으로 보내고 적적한 밤을 보내신 광주전남녹색연합 여성회원들의 부군되시는 분들,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지요. 해석하자면 모든 허위의식을 벗어버리고 자연과 하나 되었다는 겁니다.

식사 때와 회의 때는 물론이고 올무와 덫을 수거하러간 산에서도 들에서도 우리는 한 무리의 가축들처럼 뛰어다녔지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개발과 문명에 길들여진 가축이기를 거부하고 야생의 본성을 찾기 위해 산으로 들로 들어간 한 무리의 소 떼나 염소 떼였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문명의 때를 완전히 벗고 들소나 산양이 될 수는 없겠지만요. 하지만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이번 탐사는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기쁨을 안겨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1. 무릉도원에 들다.

1월 19일 밤, 탐사를 위해 우리가 집결한 곳은 진안군 주천면 무릉리 마을방문자센터, 이곳은 농림부에서 지원하는 농촌체험마을 공모에 선정되어 마을에서 운영중인 곳으로 나무기둥과 황토벽에 기와지붕을 얹은 곳이었지요.

무릉리는 주천면 소재지에서 완주군 동상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그 유명한 운일암 반일암계곡을 지나 우회전하면 나오는 마을로 양지말, 어자, 선바위, 강촌 등의 자연부락을 가지고 있답니다. 운일암 반일암을 지나 무릉리로 들어가는 입구는 그야말로 좁답니다. 좁은 입구를 달려 십여분 들어가면 시야가 확 트인 넓은 곳이 나오는데 입구로 접어들 때는 뭐 이런 곳에 사람이 살겠나 싶지만 마을에 도착하면 생각이 달라지는 곳이지요.

무릉하면 무릉도원이 먼저 떠오르듯 이 마을도 살기 좋은 마을 같았습니다. 넓은 곳에 여기저기 퍼져 있는 가구수가 70여호 정도가 되는, 여기까지는 다른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지만 도시에서 귀농한 분들도 꽤 있고 젊은 농군들이 여럿 모여 우리들 어릴 때처럼 정겹게 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면 다르다고 하겠지요.

어찌됐든 우리는 여기서 여러 날을 머물렀답니다. 마을 주민들이 갖다 준 김장김치와 동치미도 맛있게 먹었고 이튿날 저녁에는 힘든 산행에 지친 우리들을 위해 마을 주민들 중 한분이 집으로 우리들을 초대하여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민들과의 만남…..



무릉리는 역시 무릉도원이었답니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 같은 비결서에 전해 내려오는 곳으로 십승지(十勝地)라는 곳이 있는데 삼재 즉 전쟁과 흉년, 그리고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피난처 열 곳으로 지금은 그저 두메산골로 보이는 그러한 곳이지요. 입구가 좁아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무릉리는 비결서에 포함되진 않았다지만 우리들 눈에는 무릉리가 바로 그런 곳으로 보였답니다. 봄이면 분명히 도화가 만발할 것 같은 무릉리, 지금은 인삼, 장뇌삼을 비롯한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는 그 곳에서 우리는 만발한 도화는 볼 수 없었지만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넉넉한 인심과 웃음을 보았습니다.

2. 만덕산(萬德山), 마법의 귀를 등지고 걷는 길

첫날 우리의 집중적인 탐사대상은 만덕산이었습니다. 곰재에서 슬치휴게소까지 15킬로미터 남짓, 만가지 덕을 가졌다는, 아니 만가지 덕을 행하여야만이 오를 수 있다는 만덕산을 올라 걷고 또 걸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걷다보면 우리도 만가지는 몰라도, 자연과 가까워 질 수 있는 한가지 덕은 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 말입니다.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내린 눈으로 만덕산은 더욱 그 품을 넓히고 푸근한 가슴을 열어 주었답니다. 사방은 온통 새하얀 순백의 천지, 산은 넓고 고른 순백의 바다 같았습니다. 그 넓고 푸근한 길을 따라 오르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같이 푸근하고 따뜻해졌지요.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곰재를 지나 구릉지를 올라서자마자 개간한 터가 나타났지요.



푸근해진 마음은 몇 분도 안 되어 사라지고 덕을 쌓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용도가 불분명한 그 개간지들을 뒤로 하고 능선을 올랐습니다. 하얀 눈밭을 헤치고 호흡을 고르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 능선에 서는 순간 펼쳐지던 그 광경…..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광경 또한 그리 오래 가지 못했지요. 두 눈을 집중하여 사방을 한 바퀴 돌고 아래로 내려다보는 순간,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익산-장수 간 고속국도 공사구간의 다리교각이 보이고 교각의 끝에는 장대한 터널의 입구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었지요.



조금 무서워 바위능선에 선 다리가 떨렸다면 과장일까요. 눈 쌓인 능선에 서서 칼바람을 맞으며 다시 걸었습니다. 더러는 기막힌 풍경과 훼손지를 사진으로도 담고 노트에 기록하며 무거워지는 발걸음에 힘을 주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천가지 만가지 헤아릴 수 없는 덕을 행하고 있는데 인간은 문명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꾸만 자연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습니다.

뒤돌아본 어느 지점에서는 마이산이 보였습니다. 말의 귀를 닮았다는 산, 저 크고 잘생긴 마법의 귀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자 발걸음에 힘이 붙고 몸이 가벼워졌지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도 노트에 기록하는 손도 따뜻하게 녹아 내렸지요.

마을과 작은 암자로 갈라지는 몇 개의 산길을 뒤로하고 능선을 걷는데 자꾸만 벌목현장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멀리 보니 호남정맥 마루금 가까이까지 개간된 넓은 밭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 현장들은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지만 슬치휴게소에 가까운 박이뫼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문득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대대손손 계속 이어온 멀쩡한 논밭을 갈아엎어 골프장으로 만들고 다시 대간과 정맥의 마루금까지 밭을 만드는….. 경제논리든 경기부양이든, 그건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바보짓과 미친 짓에 불과하다는….. 나도 그 짓거리의 공범이라는 사실에 머리는 어지럽고 다리는 휘청거렸습니다. 다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마이산의 봉우리는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더는 가슴 아파 눈을 감고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숨어서 마술 같은 그 귀는 분명히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세상에 널리 공명시켜 주겠지요. 대간과 정맥처럼, 산과 물처럼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호남정맥 환경탐사의 하루는 그러한 바램으로 지나갔습니다.

글: 황완규(자연생태국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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