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생태학교] 지리산, 그 녹슨 문을 열고

2005.08.30 | 미분류

산은 늘 새롭다. 어느 산에 가건 매번 무언가를 채워오고, 또 비우고 온다. 나에게 있어서 산에 든다는 것은 곧 자유로움, 행복함이다.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보다 산에 들면 몰입이 최고조에 이르고 몰입하면 할수록 자유로움을 느낀다. 2002년 겨울의 첫 산행. 삼척에서 보낸 그 한 달 동안 나는 산양을 세 번이나 만났다. 등산로가 아닌 길을 깊이 쌓인 눈과 나무를 헤치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 앞길도 그렇게 만들어 갔다.

이번에 지리산에 가서, 처음 산양과 마주쳤을 때와 같은 벅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야생동물의 흔적이 아닌 역사의 흔적. 산에는 생태와 역사와 문화가 모두 어우러져 있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것을 이번 지리산행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산을 보는 시야가 조금 더 트였다. ‘빨치산’이라는 3모둠의 조이름과 걸맞게 우리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아지트와 최후 격전지, 그리고 지리산 역사관에 가서 빨치산의 최후와 만났다. 지리산, 그 녹슨 문을 열고.




이현상 부대의 아지트는 외부에 대한 조망이 쉽고, 바위, 소동굴, 산죽, 수목 등이 어우러져 아지트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이 지역은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가 토벌대의 수색 및 공격을 피해 바위를 이용한 동굴, 비밀 아지트, 움막 등을 설치하여 지휘본부 주둔과 경계임무를 겸했던 곳으로 토벌대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요새로서 장기간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었던 곳이다.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한 당시 작전에는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4개 연대 외에 주변의 10개 경찰서가 참가하여 약 1만여 명의 사단규모가 되었고, 지리산을 2중 3중으로 물 셀 틈 없는 경비망을 벌였다. 이현상이 야간행동의 상식을 역이용, 주간행동에 주력한다는 김진영, 김은석의 제보에 따라 토벌대는 8개조의 돌격조로 개편, 분산시켜 빨치산의 가장 중요한 루트 6개소에 잠복, 배치시켰다. 그리하여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경 33명의 수색대와 교전을 벌이다가 빗점골 합수내 너덜겅 바위에서 이현상이 사살되고, 그의 부대도 토벌되었다. 이현상 아지트와 최후격전지를 가서 떠올린 단어는 최후! 였다. 이현상과 빨치산 부대를 토벌하여 성과를 올렸다는 안내 표지판의 글귀를 앞서 온 누군가처럼 파내버리고 싶었다.

경남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서는 생활사 박물관을 둘러보고 빨치산 토벌대였다는 정윤권 할아버지(75세)를 만났다.




정윤권 할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해방, 여순반란, 6.25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그대로 겪었던 분으로 당시의 힘겨웠던 삶을 천식을 앓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할아버지는 5년간 빨치산 토벌대였고, 호적이 불타고 다시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이가 2년 어리게 등재되어, 군 생활을 2년간 더 하셨다. 해방된 지 50년 밖에 안 됐지만 몇 백 년은 더 된 것 같다던 할아버지는 역사를 되돌리고 싶다고 하셨다. 다신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 세대로 끝이 나도록.

지리산 역사관에는 화전민의 생활과 함께 지리산 빨치산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화전민들이 사용했던 나무절구, 베틀, 나무 김장독, 호미, 쟁기 등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토지세에 대한 부담으로 화전을 일굴 수밖에 없었던 화전민의 거친 손이 떠올랐다. 역사관에 전시된 물건을 손으로 만지면 안 되지만, 하나하나 손을 대어 만지고 싶었다. 역사관에 전시된 빨치산에 관한 자료는 얼마나 많은 빨치산을 죽였고 전적 성과를 올렸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토벌대가 빨치산과 양민을 분리해서 앉혀놓은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토벌대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만한 그 사이 길은 생사의 길이었다. 역사관 한 켠에는 마을과 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빨치산의 모형이 아무 소리도 없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빨간색 물감과 부러진 인형의 다리를 보며 그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방명록에 쓴 우리 대장님의 한 마디.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번 청년생태학교는 생태, 역사, 문화, 마을, 사람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이었다. 100여 종에 이르는 야생화와 나무, 그리고 어류와 야생동물을 관찰했고, 빨치산 루트를 돌며 현대사를 몸으로 느꼈으며, 마을을 둘러보고 주민과 이야기 나누며 지역의 문화를 접했다. 조원들 간의 애정은 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으짜쓰까? 보고자바서!” 지리산에 다녀온 뒤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관한 책과 빨치산에 관한 소설을 읽고 있다. 빨치산, 해방, 조국. 단어를 새로 배우는 느낌이다. 아직은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 지경은 아니지만, 가열차게 가열차게 가열하고 있다.

글 : 3모둠 김지혜(함박꽃)님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