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도, 바다학교로 가는 길

2005.09.01 | 미분류

바다, 단 두 마디의 단어가 이끄는 이상야릇하며 거부할 수 없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바다와 연관되고, 움직이는 하나하나의 행동은 바다를 향했다.  어릴 적, 원양어선을 탔던 옆집 아저씨는 꼬박꼬박 월급을 집으로 부쳤지만, 옆집 아주머니는 칭얼대는 두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났다.  아저씨는 발길을 다시 뱃머리로 돌렸다. 태평양 전쟁으로 20대에 할아버지를 잃은 할머니는 갯것을 팔러 전국을 다녔고, 어머니 역시 먹고 살려고 물질을 나섰다.  부산항 연안부두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손에는 고등어가 들려 있었다.



술을 마실 때도 바다 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소주 한잔을 마셔도 갯바위, 방파제가 안주였고, 저 바다를 이겨보려 악도 썼다. 이생진의 시를 읽으며, 그 모습을 흉내 내던 젊은 날. 바다는 이성의 논리를 벗어난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어느 때, 그곳에, 누가, 서 있느냐에 따라 모양새를 달리하는 푸르름이 바다에는 있다.  바다는 언제나 같지만 또 언제나 같지 않다는 것은 쌓여진 삶의 기억으로 진작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끝없는 푸르름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을까.  녹색연합이 강화도, 부안, 남해군에 이어 올해로 8번째 맞이하는 바다학교가 소야도에서 열린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의 조그만 섬, 소야도 가는 길에 여러 생각들이 엉켜 풀리지 않는다.

도시의 확장으로 쫓겨 온 오이도 주민들은 남부럽지 않은 거대한 네온사인 성곽을 쌓았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오이도와 대부도를 연결하여 큰 호수, 시화호를 이뤘다.  12킬로미터, 왕복 4차선 도로. 시화방조제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답답함에 시선 둘 곳이 없다. 시화, 반월공단, 영흥도 화력발전소와 송전탑, 송도신도시와 LNG 저장창고. 방조제의 안과 밖의 물색이 완연히 다르다. 차라리 안개라도 자욱하다면 낭만적인 분위기라도 연출될 것인데. 시화방조제 위의 상현달이 40도 가량 내려 앉았다. 선착장에 앉아 두 시간이 훌쩍 지났음은 달의 운행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야도로 가는 바닷길



소야도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덕적도행 여객선을 이용한 뒤 덕적도 진리선착장에서 다시 소야도행 종선을 이용하는 방법과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소야도로 직접 운행하는 여객선이 있다. 덕적도와 소야도 사이의 거리는 500미터에 불과해 어선으로 5분이면 닿는다. 여객선 터미널의 안내방송으로 덕적군도에 안개가 자욱하다는 전갈이다. 인천항이나 대부도선착장에서 덕적군도나 서해5도로 갈 요량이면 늘 일기에 주의해야 한다. 주의보가 내리지 않더라도 바람이 거세거나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배가 뜨질 않는다. 다행히 배는 떴고 일행을 실은 배는 자월도를 지나 덕적도 아래 소야도로 향했다. 자월도와 소야도 사이의 바닷길은 이미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이용했던 길이고,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월미도로 향했던 길이다. 현재 자월도와 소야도 사이의 바닷길은 인천항을 출항하는 항로로, 자월도와 영흥도 사이는 인천항으로 입항하는 선박들의 항로로 이용된다.



옹진군은 인천광역시 서쪽과 남쪽의 경기만에 흩어져 있는 섬들과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대연평도, 소연평도의 서해5도로 이루어진 군이다.  북도면, 송림면, 백령면, 대청면, 덕적면, 자월면, 영흥면 등 7개면 31개 동리가 있으며, 덕적군도를 포함하여 유인도 26개와 무인도 74개가 있다.

아직도 1995년 핵폐기장 사태의 앙금이 남아있다는 굴업도,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당당한 대한민국 최대의 무인도 선갑도, ‘수중모래섬’의 해양생태계보전지역으로 유명한 이작도와 승봉도 역시 옹진군 권역이다.  연평도 근해의 조기어장은 예부터 조기파시로 유명했지만, 현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다.

덕적군도에서 백령도까지 이어지는 꽃게 어장은 과도한 바닷모래 채취로 황폐화 일보직전이다.  수산업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인구감소율 역시 증가하였다.  최근에는 수산업보다 농업의 비중이 높은 실정이다.

소야도 역시 마찬가지다. 해마다 높고 낮음을 반복하는 어획고라지만, 최근 몇 년의 빈작에 어민들의 시름이 쌓여간다.

바다학교에서 만난 것은

녹색연합은 1998년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갯벌생태계교육자를 양성하기 위한 환경교육을 시작한다.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악명 높은 부안갯벌에서 뒹굴었고, 지난 3년간은 남해군에서 갯벌교육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갯벌교육이지만, 8년 전 강화에서 시작된 갯벌교육은 갯벌 가치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었고, 갯벌 파괴에 대항한 전면적인 문제제기였다.

소야도로 휘돌아가는 뱃머리를 곧 걸어 나올 듯한 장군바위가 맞이한다.  고요함이 분주한 덕적도에 대비되었다.  예전에 덕적초등학교 소야분교였던 상록수휴양원으로 가는 해안길에 도둑게가 주변으로 분주하다.  덕적초등학교 소야분교는 연평, 장봉, 덕적, 영흥초등학교, 자월초등학교 승봉분교와 함께 개교하였다.  1930년대 일이다.



바다학교 일정은 8월 17일부터 4박 5일의 일정이었다.  바닷물이 나가자 마을 앞은 온통 사막이다.  바다의 모래사막이다. 보리수나무가 무리지어 있다고 하는 떼뿌루 해안과 죽노골 해안의 모래갯벌에는 개량조개의 숨구멍이 드러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래언덕에는 순비기, 갯메꽃, 해당화가 흐드러진다. 바다는 하늘색을 닮았고,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가섬과 간데섬, 물푸레섬이 자연산 굴 언덕으로 바닷길을 놓으면서 피뿔고둥, 명주고둥, 새꼬막이 모습을 보인다. 조그만 삽자루 하나씩 뒷짐 진 마을 아저씨는 낙지 구멍 찾기에 조심하고, 동네 아낙들은 자갈, 모래 섞인 갯벌에서 바지락을 주워 담는다. 모래언덕의 식물들, 야행성 갯벌 저서생물, 물 속에서 먹이 활동에 열심인 바위게. 바다학교 참가자들은 이 모두 소중하게 하나하나 더듬어 갔다.

백중사리에 하는 야간 바닷가 탐사

일년 중 바닷물의 가장 많이 들고 난다는 백중사리다. 평소 인천의 조수간만의 차이는 6~7미터지만, 백중사리 물때에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9미터까지 난다. 일년에 딱 한번, 이맘때에는 키조개와 같은 조간대 최하부의 생물까지 만날 수 있다. 저녁 10시가 되자 해안가로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허리에 채집망을 하나씩 지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 시간에 맞추어 바다학교의 야간갯벌 탐사도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큰구슬우렁이. 긴 입을 쭉 내밀고 야간 먹이활동이 시작된다. 갯벌의 잘피밭-거머리말- 사이로 노래미 치어들이 노닐고, 민꽃게가 순간 자취를 감춘다. 빠지는 물에 시작된 조개잡이와 갯벌교육도 드는 물에 마감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바다의 시간에 충실했다.



일요일 오전 11시,

소야교회의 종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설교와 무관하게 옆집 안부 묻기에 바쁜 일상의 모습이 정겹다.
교회 장로님은 오리 세 마리 삶아 놨다며 예배드리고 모두 드시고 가라고 당부다.
보건소 아주머니는 별 약이 없다며 주섬주섬 약을 한 봉씩 마련한다.  휴양원 원장님은 소야도에서도 영화촬영이 있었다며, 동네자랑이 대단하다.
좁은 골목길과 돌담장, 사이로 낀 이끼, 말려놓은 빨간 고추, 폐허가 된 집터, 마을을 감싸는 담쟁이. 옛 기억은 고스란히 화석이 되는 퇴적의 섬. 새로움은 옛 것을 뒤덮겠지만, 그 모양새가 도시의 분주함을 아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이야기 했더라, 보기에 좋은 것은 힘들 게 보는 것이라고. 익숙해지는 편안함에 무엇이 남고, 또 무엇이 사라지는가. 아직도 소야도와 같은 섬이 있다는 것은 한 자락 희망이다.

▶ 2005 녹색연합 바다학교에 참석한 교육생, 선생님, 실무진, 그리고 소야도 주민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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