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 세계여름을 시원하게 한다?

2002.07.16 | 미분류

TV에 매혹적인 여성모델이 등장하는 ‘에어컨 광고’가 부쩍 늘어나는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작은 ‘논쟁’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한 6년전 일인가보다. 그 당시 녹색연합 사무실은 합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낡은 6층짜리 건물의 6층을 쓰고 있었다. 그 건물이 얼마나 바깥환경과 친숙한(?) 건물이었는지 겨울과 여름의 대조적인 날씨를 있는 그대로 실감할 수 있는 그런 사무실이었다. 게다가 옥상을 바로 머리위에 두고 있는 덕분에 여름이면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듬뿍 받은 사무실은 늦은 저녁시간까지도 한증탕을 무색하게 만드는 실정이었다.
승강기가 없는, 그나마 계단도 두 사람이 서로 지나치기 불편할 정도로 좁은 그 사무실에서 제일 괴로운 날은 한 달에 한번 회원 소식지가 나오는 날이다.
1층 입구로부터 6층까지 그 좁은 계단을 한 사람당 대여섯번씩 오르내리고 나면 온 몸은 그야말로 땀범벅이 된다. 발송 주소를 붙이고 우체국으로 가져가려면 다시 1층까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식히기 위해 선풍기 앞자리 다툼을 해가며 30여명이 엉겨붙고 있자면 시원한 에어컨 생각이 절로 날 지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같이 도시락 점심을 펼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불쑥 ‘제안’을 했다.
“우리도 사무실에 에어컨 놓으면 어떨까요?”
물론 환경단체에서 반(反)환경적인 에어컨을 두는건 좀 그렇지만 업무의 효율성을 따져본다면 그게 오히려 환경운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법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쳤다.
그 도발적인(?) 제안에 모두들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한마디를 한다. “전 녹색연합에 에어컨을 놓으면 녹색연합 활동 그만 둘래요”.
그런 생활습관은 길들여지기 나름이라며 우리들의 원칙을 그렇게 쉽게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그 친구의 진지한 눈빛에 논쟁은 싱겁게 끝이 나 버렸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단순하고 무지한 논리일 것 같은 그 말이 아마도 그 후 4번의 이사를 더 거친 지금의 사무실에서도 에어컨을 볼 수 없는 이유가 되고 있지 않나 싶다.

요즘은 일반 가정집에도 에어컨이 없는 집보다 있는 집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도시 지역에는.
하지만 그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지는 꼭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과연 모 에어컨 광고의 문구에서처럼 에어컨이 한 대씩 팔릴때마다 세계 여름이 조금씩 시원해지는걸까? 뜨거운 한여름에 길을 지나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한가지 불쾌한 경험을 되살려 보자. 주로 건물 옥상이나 베란다에 설치되어 있는 실외기(실내에 에어컨을 가동하고 나오는 열을 밖으로 내보내는 기계)를 길가에 두어 무심코 지나가다가 그 뜨거운 바람을 훅 맞게 되는 경우이다. 그렇지 않아도 푹푹 찌는 더위를 참으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걸어가는데 난데없이 얼굴로 불어닥치는 그 덥고 상쾌하지 않은 바람은 불쾌지수를 두배쯤 올리는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도시의 ‘열섬현상’을 만드는 요인이다. 도시의 모든 건물 곳곳에서 가동되고 있는 에어컨은 실내를 시원하게 만들면서 대신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열을 바깥으로 내뿜는다. 그렇게 배출된 열들은 도시 전체의 온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사람들은 날이 더 더워졌음을 탓하며 에어컨 가동을 더욱 늘린다. 더러워진 대기오염으로 인해 지구가 온실처럼 더워지는 ‘지구온난화’와 마찬가지로 에어컨에서 나오는 더운 열들은 20평, 30평의 공간을 시원하게 만드느라 넓은 도시 전체를 ‘열섬’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환경문제는 왜 생기는 것일까? 라는 새삼스런 질문을 한번 해보자.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욕심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환경은 제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니고 그 질서를 지키며 존재하고 있다. 식물들은 자연천이 과정을 거치며 제 나름의 생김과 없어짐을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있고, 동물들 또한 생태계의 자연법칙을 지키며 그 질서에 자신의 존재를 맡긴다. 거기엔 ‘거스름’이란게 없다.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고 다른 생물들과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옛날 방식과는 달리 문명의 혜택을 내세우며 인간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다 보니 이제 지구는 우리에게 절절한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종(種)중에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외의 에너지를 쓰는 종은 유일하게 인간밖에 없다. 이 불필요한 에너지의 결과는 기아와 쓰레기로 남는다. 물론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만 소비하며 살아가기엔 인간의 문명이 너무도 커져버렸고 가능하지도 않다는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필요 이상의 욕심으로,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우리가 만들어내고 이용하는 대규모적인 생산물들이 결국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도달해서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협의 마지막 목표는 결국 우리들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되도록이면 빠르게, 크게, 편하게 라는 현대의 중독증은 결국 우리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는 시간을 ‘빠르게’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여름은 당연히 더운 계절이고, 따라서 더위를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여름철 제 몸의 흐름에 맞는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노동하고 나서 끼얹는 한 바가지의 찬 물은 여름이 유리 신체에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건강 선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선물을 에어컨이라는 기계와 맞바꿔 버렸다. 여름엔 긴 팔을 입고 일을 해야 하고, 겨울엔 반바지 차림으로도 땀을 흘리는 우리네 생활의 기형적인 변화는 결국 우리를 여유도 없고 참을성도 없는 소인배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지구는 원천적으로 큰 것을 담아내지 못하게 되어있다. 넓고 넓은 우주속에 지구는 한낱 작은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에 어울리는 건강한 삶의 체계는 작아야 하고, 건강한 삶이란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정신없이 편한것만 보고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번쯤은 뒤를 돌아보자. 내가 달려온 길에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찬찬히 살펴보자.
암세포처럼 무조건적인 증식, 번영, 그리고 편한 것만 선호하며 살아온 이기적인 생활방식을 버리고 함께 살아가는,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삶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참된 본성을 되찾자. 그리고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자. 땀흘리며 사는 것이 여름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나는 아마 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어느 추운 날 내복 차림으로 명동 한 복판에서 ‘에너지 절약을 위한 내복입기 캠페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제 철에 하던 자연스러운 짓을 캠페인을 해가며 하자고 우겨야 하는 우리네 생활이 과연 정상인건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 월간 ‘참여사회’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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