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지난 명함을 정리하면서..

2002.11.13 | 미분류

큰 명함첩을 새로 샀다. 무려 600개의 인연을 담아둘 수 있는..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무언가 정돈되지 않은 듯한 느낌 때문에 날 잡아 정리하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숙원의 작업에 손을 댄 것이다.
여기저기 대여섯개의 작은 명함집에, 서랍속에, 명함지갑안에 흩어져있던 명함들을 다 꺼내놓고, 분야별로 정리하려 책상 가득히 늘어놓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괜한 일을 벌였나 싶어 후회를 하는데 문득 명함속의 이름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어? 이건 누구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워낙 한번 정도 만나는 사람들이 많은 일이라 받을 때 어디서 받은 건지 기록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해내지 못하기 일쑤다.. 도무지 생각이 안나는건 일단 예비휴지통으로 제껴두고..

맞아, 내가 이 사람도 만났었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고 살았지?
아직도 그 신문사에 있나? 아니다, 어디로 옮겼다는거 같던데.. 참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 내가 이 사람도 만난적이 있나? 어디서 만났을까? 무슨 얘길 나누었었지?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옆좌석에 앉아있다 잠시 대화에 끼어들었던 우리춤 연출가,
지방 내려가는 기차에서 옆자리 인연으로 만나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얘기 나누던 직장인..
그렇게 단 한번의 만남, 오래된 명함으로만 남아있는 인연이 앞으론 또 얼마나 많을까..

모양이 제각각인 명함 종이만큼이나 그들과의 인연도 다 달랐던 것 같다.
즐거웠던, 마음이 불쾌했던, 호감이 갔던, 다시 보고싶지 않았던, 꼭 만나고 싶었던…

그렇게 한참을 정리했는데도 명함집이 부족하다.
작은 명함집 한개는 새로 산 명함집에 아예 자리를 잡지도 못했다.
마흔도 안된 내 길지 않은 삶에 무슨 인연이 그리 많았던지..
지난 10년여의 시간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연을 가졌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 명함은 그들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걸까..
작은 종이쪽지에 그려진, 이름 석자, 소속, 직함 등이 내 삶에 잠시동안씩 끼어들었던 인연의 모습들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거나 너무 오래 되어 실효성(?)이 없어진 명함들을 버리려 보니 제법 많다. 거의 70여장이 되려나..
그것들을 휴지통으로 버리려니 내 삶의 인연의 끈이 몇십개쯤 툭 끊어지는듯한 느낌이다.
그래, 이게 삶이겠지..
기억속에서 흐려져가는 낡은 인연들을 버리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고..

황홀했던 가을풍경이 황량한 겨울에 밀려나는 것이 안타깝다 했더니 한 선배가 그런 얘길 해줬다.
“그건 밀려나는게 아니라 늦가을이 초겨울이 편안하게 들어와 차오르도록 자.기.를.완.전.히.비.워.주.는.거”라고…

지난 인연을 다 잡지 못해 아쉬워 하기보다 다가올 새로운 인연을 위해 마음을 비워두는 연습을 하는게 삶이구나 하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 단 가을이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웠듯이, 그래서 조용하게 겨울에 자리를 내어줄 수 있듯이 지난 인연에 오롯한 정성을 다했었다면..

초겨울, 지난 명함을 정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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