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에서 얻는 깨달음..

2003.02.07 | 미분류

필리핀은 정말 ‘부족함’이 많은 나라입니다.
여기 온지 보름이 겨우 넘었을뿐인데 벌써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내가 얼마나 편하고 풍족하게 생활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가장 크게 느끼는 부족함은 바로 ‘물’ 문제입니다.
제가 지내고 있는 아시아센터에는 상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는 물은 생수를 배달시켜 사먹고 있고(물론 음식도 다 그 물로 합니다), 다른 용수도 물탱크에 채워주는 물을 사서 씁니다.
물탱크에 한번 채우면 7명의 우리 식구가 이틀 정도를 쓰는데 그 물값이 300페소 정도입니다(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7천원 정도). 일주일에 세 번 시킨다고 생각하고 한달을 계산해보면 8만원이 넘는 돈이니 이곳 생활비를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 물값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참고로 이곳 대졸자 한달 월급이 우리 돈으로 20-25만원 정도)
그러니 자연 물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국에서처럼 물을 ‘물쓰듯’ 썼다간 생활비를 물값으로 몽땅 날려버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제가 온지 보름동안 벌써 두 번이나 물 때문에 골탕을 먹었습니다.
물탱크 물이 떨어져서 주문을 했는데 하루를 지나고 오는 바람에 설거지는커녕 쌀을 씻지 못해 밥도 못해먹고 빵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씻는건 한 바가지 정도의 양으로 때우고.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느긋한지 코리안 타임은 저리 가라입니다.
아침에 온다고 해 놓고선 기다리다 오지 않아 재촉 전화를 하면 운전사가 없어서 못 간다고 오후에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기다리다 오지 않아 또 전화를 하면 느긋하게 아직도 못 간다고 합니다. 결국 날을 넘겨 가져다 주고도 그렇게 미안한 표정이 아닙니다.
그러니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만 팔짝팔짝 뛰는거죠.
덕분에 우리들의 목표인 ‘느릿느릿 사는’ 훈련을 톡톡하게 할 것 같습니다.

얘기가 다른데로 샜네요. 암튼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씻는 부지런함’을 버리게 됩니다. 너무 자주 씻어도 피부에 좋지 않으니 대충 살자는 핑계를 대가며 가급적 청결함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날씨가 그리 덥지 않아서 이틀에 한번꼴로 샤워를 해도 크게 힘들진 않지만 본격적인 여름철엔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곳 가정의 목욕탕엔 필수품이 두가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볼 수 있었던 큰 통(바께스 모양의 플라스틱 큰 통)과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입니다. 이건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다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상수도 시설이 잘 되어있는 곳도 툭하면 단수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와선 한번도 흐르는 물에 양치, 세수, 샤워를 한 적이 없고 컵, 세수대야, 바가지를 이용해서 씻습니다. 그리고 언제 물이 떨어질지 모르니 그 통엔 늘 물을 가득 받아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수한 물이나 빨래한 물을 절대로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변기에 맑은 물을 버리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제가 쓰고 있는 방 목욕탕은 변기가 고장이 나서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굳이 고치지 않고 씁니다. 이유는 너무도 뻔합니다. 물을 아껴쓰기 위해서지요. 처음엔 그게 그렇게 불편하더니 이젠 그 습관이 너무 좋습니다. 사실 한국에선 시도하려 해도 잘 안되는 실천이었거든요.
그리고 화장실의 적당한 냄새(항상 사용한 물이 있는건 아니기 때문에 냄새가 날수밖에)에도 이젠 제법 익숙해 졌습니다. 한국에서라면 질색을 하겠지만 이게 생활이다 싶으니까 그것도 적응이 되더라구요.

변기가 고장났거나 물이 잘 안 나오는건 가정집뿐만이 아닙니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대형 백화점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변기 앉는 부분이 망가진 곳도 많을뿐 아니라 물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화장실밖 세면대옆에는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가 늘 있습니다.
엉거주춤한(?) 폼으로 볼일을 봐야 하는 경우도 태반이구요..

처음 도착해서 이 사실을 알았을때는 앞이 암담한게 어떻게 지내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 이참에 생활습관을 완전히 바꿔보자 생각하니 환경운동가로선 아주 좋은 기회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다행스러운건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다 시민운동가들이라 절약하고 불편하게 지내는데에 그리 큰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덕분에 진짜 환경운동가가 되겠다고 다들 즐거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환경강의를 할때면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지저분한 삶의 방식이 환경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얘기하면서도 내 자신의 삶은 그리 일치시키는게 쉽지 않아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 돌아가면 잘난척할 일이 생겼다 생각하며 웃어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깨닫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부족함’과 ‘불편함’은 얼마든지 행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