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의 유럽여행기④] 돼지, 돼지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헤르만스 도르프를 찾아서

2003.06.07 | 미분류

지난해 초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자연식 밥상’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식생활에 대한 중요한 문제들, 그중에서도 특히 식품의 안전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반향은 우리 식탁이 위험하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가까운 중국으로부터 농약투성이 농산물이 수입되고 있으며, 수입식품들이 유전자조작식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반대편에 있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혁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유기농법으로 유명한 ‘헤르만스 도르프(이하 헤르만스)’를 찾았다. 독일의 뭔헨 지방에서 새로운 생산방식을 고집하며 대안을 만들어가는 농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뭔헨을 출발해 독일 지방철도인 S선을 타고 그라핑 역에 도착한 때는 저녁무렵이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역이다. 바퀴달린 여행용 가방소리가 고요를 방해할 뿐이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은 태양의 집을 뜻하는 ‘소넨 하우센’이다. 이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 한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한국의 자동차회사에서 생산한 자동차가 택시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것도 이 마을에서 두 개 뿐인 택시 중에서 한 대가 한국차였다. 단풍이 짙게 우거진 길을 따라 30분쯤 달리니 이윽고 헤르만스 농장의 방문객을 위한 숙박지가 나타났다. 독일의 전통양식이 건물 곳곳에서 묻어난다. 사람과 가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조각상도 보이고, 밤이슬 먹은 채 뒹굴고 있는 못 생긴 유기농 사과들도 눈에 띈다. 아주 기분 좋은 곳이다. 방에는 침구와 작은 탁자, 그리고 수납장뿐이었다. 전화기는 물론 텔레비전마저 없었다. 전기제품은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이 전부다. 태양의 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저녁식사였다. 우유, 치즈, 요구르트, 빵, 사과, 야채 등 모두가 유기농으로 재배한 식품들이다. 시장기 때문인지, 유기농 먹거리라는 점 때문인지 맛이 신선하고 부드러웠다. 영국인 주방장은 샐러드용으로 나온 야채들이 헤르만스에서 직접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이며 유가공식품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생산된 제품이라고 자랑했다. 식탁의 건너편에는 회사원들이 앉아 있었다. 지배인은 “BMW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직원들”이라며 “최첨단 회사일수록 세미나나 워크샵을 유기농장에서 여는 게 유행”이라고 귀띔했다. 가장 세련된 것이 가장 자연적인 것이라는 역설이 통하다니…

진정한 자연의 보물
다음날 아침, 헤르만스 농장을 찾았다. 이곳에는 사무실과 레스토랑, 공장 등 4 층짜리 저택이 들어서 있었고, 수만 평의 초지대가 농장 뒤편으로 펼쳐져 있었다. 한마디로 ‘저 푸른 초원 위에’ 서 있는 작은 집이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유리로 된 보석함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런데 있어야 할 보석은 없고 볼품없는 사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사과, 지난밤 태양의 집 앞마당에서 뒹굴고 있던 사과였다. 그 아래에 적힌 ‘진정한 자연의 보물’이란 문구가 농장의 철학을 한마디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 농장의 설립자인 슈바이스 푸르트는 본디 유기농에는 별 관심 없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독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소시지 회사를 운영하던 기업가였다. 허나 그는 회사를 스위스 기업인 네슬레에 팔고 1986년 뭔헨 근교에 유기농장인 헤르만스 도르프를 세웠다. 화학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식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농장 운영은 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유기농’이란 말은 소비자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난 10년동안 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은 소수지만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음식문화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자신을 고집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농장이 처음 흑자를 기록한 것은 1997년이다. 광우병 파동, 유전자조작식품, 환경호르몬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소비자들이 유기농 농산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농장 직원은 40여 명에 불과하지만 현재 연간 매출액은 1천3백만 유로(1백60억여 원)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주요 생산물품은 빵과 고기이나 이를 비롯하여 치즈, 소세지 등의 가공품도 생산하고 있다. 헤르만스는 철저하게 생태순환형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 값은 일반제품보다 35%정도 비싼 편이다. 생산기간이 일반기업의 경우 1~2개월 정도지만 헤르만스의 경우 길게는 24개월까지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뭔헨 시내에 11개 직영 판매점이 있어 소비자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윤으로는 이 농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노바, 베르린, 켈론에 공장을 새로 열 예정이라고 한다.

돼지답게 자라는 돼지
헤르만스 안에는 환경을 고려한 흔적이 곳곳에서 베어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돼지사육장 지붕이다. 이 지붕에는 태양광 집열판이 설치돼 있다. 축사지붕에 집열판이라니!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축사에서 나오는 가축의 배설물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60kWh급의 ‘바이오 가스’시설을 도입했고 농장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대부분은 재생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체 생산하고 있었다.

농장은 돼지를 돼지답게 대접했다. 아니 그보다는 ‘돼지 목에 진주를 달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게다. 돼지 사육장에는 따뜻한 태양과 양질의 퇴비, 거닐 수 있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국 당나라시대에 만든 돼지조각상과 함께 사육장입구에는 ‘우리 돼지들도 감정이 있다’, ‘우리는 돼지다운 대접을 받고 있다’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돼지우리의 바깥벽에는 사람과 동물의 초상화가 나란히 어울려져 그려져 있다. 농장사람들이 동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돼지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고 존중하고자 하는 농장 측의 의지가 묻어났다. 돼지들을 위한 배려뿐만 아니라 농장운영에 대한 철학적 표현이다. 동물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농장의 지배인인 젠켄베르그 씨는 “동물다운 생존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접촉을 늘여야 했다. 이 점이 동물의 면역력을 키웠고 전염병을 이겨낼 힘을 길러준 것이다. 결국엔 항생제 사용을 억제시키는 효과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축사 앞에 깔린 푸른 목초지는 돼지들의 운동장이었다. 꼬마 돼지들이 몰려다니며 마음껏 뛰어놀고 있었다. 우리에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는데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친한 척하며 코를 벌름거린다. 이전에 보았던, 좁고 지저분한 돼지농장에서 스트레스 받는 돼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 같았다. 축사 안에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파이프오르겐도 있었다. 넉살좋은 녀석들이 파이프오르겐에 다가가 코를 부비며 방문자를 환영하는 음악을 연주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음식에 대한 가치
공장안으로 들어갔다. 치즈와 소시지는 물론 빵과 육우, 맥주를 만드는 작은 공장이 층마다 들어서 있다. 치즈 창고에 들어갔는데 지배인의 설명이 놀랍다. “이곳에선 치즈를 숙성시키기 때문에 2년이 꼬박 걸립니다.” 이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일반치즈에 비해 10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빠르다고 결코 좋은 것이 아니죠. 우리 농장은 가장 자연스런 방식을 추구합니다.”
육우를 가공하는 작업장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중무장을 해야 했다. 비닐로 된 모자와 가운, 신발 덮게까지 하고난 후에야 안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농장 곳곳에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공정 곳곳에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빵공장은 기계사용을 최소화하고 웬만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생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빵공장의 바닥제로는 100 년 전부터 깔려 있는 나무를 이용하고 있었다. 화학제로 만든 요즘의 새 것이 아니다. 빵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햇살을 즐길 수 있도록 유리창 표면에는 다양한 문양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 자연과 노동, 그리고 예술이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어느 곳에서나 자연과 벗하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이다.
치즈와 소시지, 빵공장 등을 둘러보는 동안 지배인은 “우리는 생산에서 가공,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되는지 궁금해 한다”며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는 유기농 식품의 생명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제품의 앞뒷면에 빽빽이 적혀 있는 제품설명서와 성분표시를 꼼꼼히 훑어보고 구입하지만 무슨 뜻인지, 과연 이게 다 사실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지배인은 “사람들이 차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엔진오일은 비싼 것을 쓰면서 자신이 먹는 음식은 값싼 걸 먹고 있다”며 “음식에 대한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녹색희망, 유기농
이 농장 부속건물에 위치한 식당에 들렀다. 식당의 벽면에는 동물모양과 이를 형상화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계단마다에도 소와 돼지, 닭 등 여러 동물들의 초상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있는 그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은 여전히 붐볐다.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 노인과 젊은이들이 각각의 식탁에서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뭔헨 시내에 살고 있다는 안드레아 씨 부부는 서른 시간 정도 차를 몰아 이곳에 왔다고 했다. “좋은 음식들을 선택하여 아이들에게 잘 먹이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이 아닐까 싶다”며 종종 아이들과 함께 온다는 젊은 부부의 말이 인상적이다.

농장에서 운영하는 유기농 판매점에 들렸다. 치즈와 우유, 유기농 과일, 소시지를 비롯한 육가공품, 인근 유기농 농장에서 재배한 채소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 직영판매점을 찾아와 유기농 치즈를 고르고 있던 하르먼 씨에게 물었다. “왜 유기농 제품을 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속사포처럼 빠르게 대답한 그녀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했다. “유기농 제품은 화학물질이 들어있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농약이나 항생물질을 먹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이곳을 찾은 이들이 음식의 맛과 영양성분, 가격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제품의 생산방식이다. 물론 이들의 몸에 배어 있는 강한 환경의식은 사회적 분위기까지 바꾸고 있다. 유럽의 광우병 파동과 유전자 조작식품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 등을 경험하면서 친환경적인 먹을거리인 ‘유기농’에 대한 관심이 유럽의 시골동네에서부터 확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직매장을 떠나며 “유기농 식품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건강과 환경,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연에 한발씩 더 다가서려는 희망이 담겨있다”는 말을 남겼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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