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포위되고 있는 정부

2003.07.31 | 미분류

노무현대통령의 쇼킹한 말 한마디가 한여름의 무더위를 싸늘하게 식혀주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7월30일 오전 제1회 대통령 과학 장학생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시장 중심의 국정운영’을 시사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금 더 대통령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법인세 인하’를 시사하는 자리에서 “따져보면 오늘날 강력한 힘을 가진 파워 게임의 장은 시장이며, 시장에서 우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제도들을 강요, 움직일 수 있다”면서 “기업의 선택권이 정부의 선택권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정부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우리 기업들에 유리하도록, 한국의 시장이 많은 이익을 보장해주는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면서 “권력은 점차 기업으로 옮겨간다. 단기적으론 기업이 제약받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정책에 의해 정부의 정책이 움직여 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권력은 점차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이 발언은 방송국의 남량특집처럼 한여름의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싸늘하다못해 소름끼치는 발언입니다. 기업에 양도되고 있는  통치권으로, 시장이 더 자유로워지고 더 세계적이 되어 감에 따라, 통치권은 점차 국가를 다스리는 정부로부터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전되고, 이들 기업의 이해관계는 과거보다 많이 인간의 이해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쩌면 시대상황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또한 노대통령의 말씀처럼 권력를 시장의 손에 넘기는 것은 올바른 선택인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썩 훌륭해 보입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그럴 따름입니다. 이는 정부의 선택 역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국민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또는 시장이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국민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대신 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둘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업을 너무 믿는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요?. 전 세계 어디에서나 활동할 수 있는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과 저비용의 생산기지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고 있는 지금에서  기업에게 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며, 그 기업들이 세금과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해서 국민과 정부를 위해 봉사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이는 곧 게임의 법칙은 기업에서 결정하며, 정부는 결정된 규칙을 준수하기를 요구하는 한낱 집행관 신세로 전락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정부의 두손은 포박당해 있고, 기업 의존도는 점차 높아지는 꼴입니다.  

최근 재계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발이 무척이나 세졌습니다. 현정부에 대한 경제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도 높아졌습니다. 환경관련 규제정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도 공장을 짓게 해달라, 경유승용차를 판매하게 해달라, 골프장과 스키장을 쉽게 지을 수 있도록 해달라 등등. 심지어 세금을 깍아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법인세인하요구와 특소세를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경제회복을 최대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참여정부는 재계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재계의 요구 중에는 많은 부분은 수용하는 분위기이고, 이미 관철된 것도 있습니다. 경유승용차는 환경단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5년부터 시판할 수 있도록 했고, 골프장과 스키장의 규제완화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별소비세는 인하되었으며, 법인세 인하와 수도권 규제완화도 재계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대단한 힘입니다. 이는 기업의 힘이요, 시장의 힘입니다.

경제성장율과 시장점유율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정치적 태도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마구잡이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실태를 낱낱이 밝혀야 할 정치권은 어떠한가? 정치권 역시 기업에 포위되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은 당내 정치 다툼에 얽매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권위적인 관념에 매달려 있습니다. 또한 기업인의 호주머니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정치비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폭로되고 있습니다. 설령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기업의존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정경유착의 골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을 끌어 모으고 라이벌과 경쟁하기 위해 엄청난 정치자금이 필요한 시대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점점 더 아우성을 치고, 현란한 정치적 수사들로 호소하려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기업과 보이지 않는 거래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유권자의 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해는 분명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부가 현재 경제불황이라는 이유로 기업에게 쏟고 있는 관심을 국민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또한 기업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이 유권자들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여긴다면, 무분별한 경제성장의 엔진을 멈추고 소득의 불균형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계속 받는다면 우리는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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