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지매의 생생 필리핀 체류기..

2003.09.04 | 미분류

이곳 필리핀에서 생활하면서 우리(한국인)끼리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모르면 돈으로 메꿔야 한다”
이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데다 화폐 개념도 약하고, 게다가 낯선 상황에 당황을 해서 본의 아니게 돈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아 생긴 말이다.
화폐가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많이 낮다 보니 특히 한국인들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필리핀 화폐가치인 ‘페소’를 ‘달러’로 잘못 듣고 엄청난 돈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고.
참고로, 1달러가 50페소 정도 된다. 1페소는 우리 돈으로 23원 정도.
그래도 한 7개월 넘게 살다 보니 이곳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적어도 그 실수는 거의 없어졌다.

낮에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딸 지민이가 내일 학교에 준비물로 돋보기를 가져가야 한단다.
엥? 오늘 당장 얘기해서 내일 가져오라고? 이곳 학교는 늘 그렇다. 학부모들이 무슨 5분 대기조도 아니고, 준비물을 준비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는다. 투덜대 보지만 그래도 어쩌랴, 성질 급한 우리 딸내미 성화에 이길 재간이 없는 나는 지민이가 가정교사 – 이곳에서는 이를 개인 튜터라고 부르는데, 학교 숙제를 봐주는 가정교사다. 결코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필리핀어를 비롯한 학교 숙제가 많은데다 부모가 돕기 힘드니(특히 외국인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서 개인튜터를 쓴다 – 와 공부하는 틈을 이용해서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쇼핑센터에 가기로 했다.

반지도 빼두고, 옷차림은 되도록 눈에 잘 안 띄는 국방색 상하의를 입었다.
혼자 돌아다니는 일인만큼 치안도 안 좋고, 특히 외국인들에게 바가지가 많은 이곳에서 굳이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더구나 미모까지 겸비한 나로서는..(앗, 여기저기서 항의가..)
암튼, 한국처럼 동네에 문구점 같은게 있으면 좋으련만 여긴 학교앞에도 그런게 없으니 할 수 없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큰 골목으로 나갔다.

근데 문제는 주머니에 잔돈이 없는거다.
이곳 택시 기본요금은 25페소. 우리 돈으로 100원 정도 하는 돈이다.
우리 집에서 그 쇼핑몰(이름이 ‘Ever’다)까지는 35페소에서 38페소 정도가 나온다. 시간으론 한 10분 정도의 거리. 늘 시장을 거기서 보아오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가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지갑을 보니 100페소짜리와 동전을 탈탈 털어 25페소 정도밖에 없는거다. 은행에서 바꿔야지 하며 가보니 문은 이미 닫혔고.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길에 서 있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 지나간다. 그래서 20페소짜리 지폐 한 장을 달라고 하고..
이유는, 여긴 결코 택시 운전사가 잔돈을 자발적으로 내어주는 법이 없다. 택시 요금이 90페소가 나와서 100페소를 주면 그냥 “Thank you~!”하고 끝이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경우에 속한다. 심지어 5-60페소가 나와도 싱긋 웃으며 땡큐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는 보통 20페소짜리 잔돈을 늘 준비해 가지고 다닌다. 안 그러면 본의 아니게 서로 서툰 영어로 실갱이를 해야 하므로.(이곳 택시 기사들이 영어를 잘 못하므로)

암튼 잔돈이 생긴 나는 자신있게 빈 택시를 잡아타고 “에버~!”를 외쳤다. 운전사는 몸집이 왜소하고 희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참을 거리 풍경을 내다보다가 문득 택시 미터기를 보았는데, 오잉? 택시요금이 이미 40페소가 넘어있었다. 목적지는 아직 남았는데.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요금이 무진장 빨리 철커덕~! 올라간다. 아,, 그 말로만 듣던 미터 조작이구나. 드디어 난 오늘 또 하나의 필리핀 사회 경험을 하는구나.. 너 사람 잘못 골랐다 오늘..
별 내색을 안하고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그 짧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려봤다. 한바탕 싸워봐? 아니다, 그건 교양있는 한국 아줌마가 할 도리가 아니지..
그럼 저 돈을 다 줘? 얼마 안되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건 한국 아줌마의 자존심 문제…
고민하는 동안 택시가 쇼핑센터 정문앞에 섰다.  
난 40페소를 손에 쥐고 앞좌석으로 몸을 당겨 택시 운전사 가까이 갔다.
그리곤 아주 점잖게 이렇게 말했다.
“I think, this meter is wrong. How do you think about it?”
잠시(한 5초 정도?) 할말을 찾는 듯 하던 그 운전기사, 예상과 달리 바로 꼬리를 내린다.
“Yes I know, mom,,”
보기 드물게 예의를 갖춘 그 순진한 기사는 공손하게 40페소를 받아들었다.
내 유창한(?) 영어실력과 당당함(!)에 스스로 대견해진 나는 의기양양하게 쇼핑몰로 들어섰다. 크크,,

그런데 돋보기를 이 넓은 백화점에서 어디서 산담? 참, 돋보기가 영어로 뭐였지? 아,, ‘long-distance glasses’. 집에서 한영사전을 뒤져 찾은 그 단어를 다시 한번 외운다.
그래, Book Store다. 이곳에선 서점에서 문구를 같이 취급함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자신있게 대형서점을 찾아들어갔다. 그리곤 점원 아가씨에게 영어로(!)물었다.
“Can you find long-distance glasses for me?”
오잉? 그런데 그 아가씨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고 계속 “What?” 한다.
순간 당황한 나, “The size is like this…” 하면서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눈으로 갖다 대는 Body Language를 총동원하며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한참을 재밌다는 듯이 날 바라보던 그 아가씨 왈, “Ah~! 마그니피어 글래스!!” 한다. 엥? 발음도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따갈로그언가? 암튼 그걸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구석에서 잠시 찾아보던 그 아가씨,
“We don’t have that” 한다. 흐이구 미츠,,

그럼 어디서 그걸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Drug Store 로 가란다. 무슨 돋보기를 약국에서 파나 싶었지만 가보는 수밖에. 거기서 또 한 사람의 남자 점원을 붙잡고 아까 들은 그 말을 그대로 말했다. 마그니피어 글래스.. 그랬더니 이 남자 또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또 손짓발짓 동원해가며 설명을 했더니 아, 하면서 구석으로 데리고 갔는데.. 내 팔자야, 자기네도 다 떨어졌단다.. 순간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생각하다 다시 서점으로 갔다. 설마 그 큰 서점에서 그런걸 떨어뜨릴 수가 있나 싶은 생각에..
아까 그 아가씨를 애써 피해 물건을 진열하느라 손이 바쁜 인상 좋게 생긴 아가씨를 하나 잡았다. 그리고 또 애매한 발음으로 ‘마그니피어 글래스’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신있게 걸어간 그 아가씨, 수북하게 쌓인 돋보기들 중에서 하나를 집어 내민다. 흐이구, 정말 성질 많이 죽었다.. 아까 그 아가씨를 잠시 째려본다. 하지만 샀으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계산을 하고 나왔다.
이걸 뭐라 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박스를 보니 ‘magnifier glass’
따갈로그어(필리핀어)가 아니고 영어였다. 그 한영사전을 집어 던져버려? 끙,,

쇼핑몰에서 나와 시간을 보니 개인 튜터가 끝날 시간 5분전이다. 급하게 마침 도착한 택시를 잡아탔다. 물론 잔돈은 서점에서 이미 바꿨고.
자신있게 우리집 방향인 ‘Don Antonio, Mapayapa 2’를 외치곤 힘들게 산 돋보기를 흐믓하게 바라보면서 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터기를 들여다 봤는데..
내참, 이번엔 아예 미터기가 꺼진 상태이다. 흠,, 필리핀 사회가 또 날 시험하는군.
이번엔 어떤 위트로 이 상황을 넘길까 은근히 기대까지 되었다.

집앞에 도착하여 ‘바라~!’(이건 stop의 필리핀어)를 외쳤다. 그리곤 역시 40페소를 손에 들고 이렇게 말했다. “아마 40페소면 충분할끼다, 담부턴 미터기 키고 다니라, 잉?”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말은 이렇게 건조한 영어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This is enough, why don’t you use meter?”
머리를 긁적대며 잠깐 잊었다고 말하는 폼이 왜 귀여워 보였을까?
아마도 그 기사는 내가 집으로 오는 길을 안내할 때 깔리완(좌회전), 가난(우회전) 하고 따갈로그어를 구사하는걸 보며 이미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히히히,,
외국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몇가지 경우의 말들만 따갈로그어를 외워 쓰는 내 샤프함(?) 덕분에 지금까지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 했던 택시기사는 없었는데..

암튼 오늘은 퀘손시 택시기사들의 ‘바가지 씌우는 날’ 이었나보다.
그리고 내겐 12페소짜리 돋보기 하나를 사기 위해 꼬박 ‘1시간’과 택시요금 ‘80페소’를 당당하게! 쓴 역사적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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