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은 왜 웃는 걸까? – 박경화

2003.09.07 | 미분류

그날은 왜 그리 용기가 넘쳤단 말인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허기를 달래고 찾아간 영어학원, 눈은 떠 있건만 정신은 어디다 두고 온 것인지…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이 내가 봐도 낯설다. 오전 영어수업, 오후엔 필리핀NGO 강의, 강사나 손님이랑 저녁을 먹는 날이면 저녁 늦게까지 영어 속에서 허우적댄다. 그 뿐인가? 쌓여있는 영문자료도 읽어야 하고, 텔레비전도, 간판도, 신문도, 계산서도 온통 영어에다… 날마다 영어로 샤워하고, 영어 찜이 되고, 영어 장조림이 되어 밤이면 온몸이 흐물흐물해져 있다. 그래서 아침이면 늘 이렇게 멍한 상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도 이해가 될까 말까한 영어시간인데 워쩌나?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다시 찾아든 태풍 덕분에 이제 조금 살만한데 학원 선생님들은 감기를 달고 산다. 오늘도 옌 선생님은 감기 때문에 결석이다. 지난번처럼 미셸 선생님이 대타로 들어오셨다. 같은 선생님 발음법에 익숙해져서 사람이 바뀌면 다시 영어는 ‘뜨아악’, 진정 내 언어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비장한 확신이 든다. 그런데 낯설음이 가신 탓인지, 반가움 탓인지 오늘은 좀 들리는 것 같다. 어랍쇼? 대화가 되네. 내가 이렇게 기특하다니… 오만과 우쭐함이 넘쳐서 책을 펼 생각은 안 하고 우리나라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고 놀라지 마시길… 전자사전을 이용한 단어의 나열이었을 뿐, 그리고 수년간 한국학생을 다룬 필리피노 선생님들의 뛰어난 이해력 덕분이었을 뿐.
건기와 우기뿐인 필리핀 사람들은 눈을 아주 신비롭게 생각한다. 겨울에 내리는 눈 말이다. 9월부터 캐롤송이 울릴 정도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필리핀에는 아쉽게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없다. 그러니 선생님들 질문 중에는 눈이나 겨울, 온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오늘은 내친 김에 손톱에 든 봉숭아물이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니, 이 아름다운 전설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오늘은 왠지… 근데 대화가 영 엉킨 실타래꼴이다. 손톱과 봉숭아, 물들이다, 첫눈, 사랑… 단어는 존재하건만 문장으로 잘 섞여볼 생각은 않고 따로 떠돈다. 미셸 선생님 표정은 계속 오묘한 표정이다. 으이구, 어쩌려고 내가 이런 용기를 냈단 말인가? 뼈저리게 찾아드는 후회… 이럴 땐 바로 “Anyway”, 꽁지를 내리고 본다. 그래도 선생님 표정이 안 풀릴 땐 얼굴에 억지웃음을 머금고 “English is very interesting”. 여기까지 이르면 선생님이 허탈해서 웃고 말다. ‘어휴, 살았다.’ 이때를 틈타서 바로 책을 편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루손섬에서는 영어랑 따갈로그어를 쓴다. 보통 필리피노들끼리는 ‘따갈따갈’ 따갈로그어를 쓰고,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단다. 그런데 우리도 택시나 트라이시클을 탈 때 ‘Kaliwa(왼쪽), Kanan(오른쪽), Para(멈춤)’ 같은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따갈로그어를 배우기로 했다. 빈민운동을 하는 활동가, 조카스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아주 가볍게 배울 생각이었는데 조카스는 Where, What을 마구 써 내려가면서 따갈로그어와 영어로 문장을 만들어 낸다. 근데 참 신기한 것은 영 낯선 따갈로그어를 영어로 설명하니 아주 이해가 잘 되고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내 인생에 우찌 이런 일이?
한편, 8월 중순에는 필리핀대학 UP에서 ‘세계화와 전쟁’에 관한 포럼이 있었다. 원주민의 발음으로 제대로 함 들어보는 영어시간이랄까? 유명한 윌든 벨로우 교수님이 사회를 보시고, 미국에서 온 젊은 교수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유창한 영어실력을 늘어놓는다. 좋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가끔 들리는 ‘부시’, ‘럼스펠트’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포럼에 참가한 대학생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발제자의 한마디에 아주 통쾌하게 웃는다. 저들은 왜 웃는 걸까? ‘세계화와 전쟁’이라는 이 엄숙한 주제를 가지고 웃다니… 쩝쩝. 그때 내 머릿속에서 ‘Why, they, laugh’가 따로 떠돈다. 왜 나는 웃음이 안 나오는 걸까?

아시아센터 2기 교육을 시작하는 첫날, 나효우 소장님이 영어공부하는 법을 이야기해 주셨다. 그 첫 번째, 주어와 동사를 먼저 저질러라. 말할 때 완벽한 문장을 만들려고 오래 생각하지 말고, 주어와 동사를 던진 뒤 나머지를 생각하란다. 두 번째, 한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넘어가고 통밥만 길러라. 세 번째, 영어 사전을 하나하나 넘기지 말고, 책장을 넘기는 재미로 읽으란다. 모르는 것은 그냥 넘어가고 넘기는 재미를 즐기란다. 한편 호주 유학을 다녀온 남상민 부장님의 공부법, 한영사전이나 영한사전에 얽매이지 말고 영영사전을 읽으란다. 영어식으로 읽고 생각하고 그것을 굳이 우리말로 해석해서 다시 이해할 필요가 없단다. 그리고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라는 귀뜸, 신문을 읽으면 단어 공부가 된다는 권유, 필리피노와 연애를 하면 영어가 놀랄 정도로 좋아진다는 이구동성… 공부법 역시 영어 단어만큼이나 많기도 많다.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 꼭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서 표정이나 느낌, 통밥을 가지고도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필리핀의 사회운동, 환경, 여성, 평화와 인권, 대중정치교육 같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통역을 통해서도 이런 감동이 전해지는데 저 영어를 바로 듣고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감동 깊을까? 순간순간 농담과 재치를 동원해서 이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바로 이해할 수 없으니 정말 벙어리냉가슴 꼴이다. 그 말많던 박경화가 과묵한 여인으로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으니 이 또한 국가적 손실이리라. 쩝쩝!!

오후에 수영장으로 가서 다시 수영을 배웠다. 사람들이 하나둘 뛰어들더니 얼치기들은 편안히 한번 떠있지도 못할 정도로 날랜 선수들이 물살을 가르며 오간다. 참, 우리나라에선 못하는 것보다 할 줄 아는 게 더 많았는데 필리핀에서 왜 이리 배워야 할 게 많노? 진짜로 새로 시작하는 삶이다. 묵직한 마음으로 다시 잠수에 도전하는데 어디선가 “안녕하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와, 귀에 쏙 들어오네. 이렇게 쉽고도 좋은 우리 말 두고 웬 고생이람. 우리 말이 있고, 우리 글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애국자가 된다. 다들 외국 나가면 애국자 된다더니 정말 그렇다. 지민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행사에 갔더니 따갈로그어를 영어 알파벳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전통옷은 스페인식이었다.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를 겪으면서 필리핀은 자기들 말보다 영어를 더 쓰게 되었고, 풍습과 관습마저도 스페인식이나 가톨릭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고유의 음식, 기념품, 고유의 행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우리에게도 일제침략기가 있었지만 우리말이랑 글을 지켜냈으니 참 강한 민족인게다. 묵묵히 우리말 살리는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메일이라도 써야겠다는 감동이 밀려든다. 오늘도 이렇게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영어를 돌아본다. 과연 저 낯선 친구와 끈끈한 우정을 맺을 수 있을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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