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살리는 사람들②]작은 풍요, 한밭레츠를 찾아서

2004.03.05 | 미분류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해서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가 아닌 공동체나 지역에서 발행한 개성있는 화폐를 병원이나 학교, 그리고 시장에서 써 보자는 생각은 좀 뜬금없어 보인다. 모두가 ‘돈, 돈, 돈’에 매달려 있는 시대에 정말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말 같기만 하리라. 그러나 알게 모르게,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오후, 대전시 법동에 자리잡은 ‘한밭레츠’ 사무실 입구는 분주했다. 일 년에 한번씩 열리는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지만 깜짝 장터가 열렸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내놓은 옷가지며, 신발, 유기농 채소들이 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옥천에서 포도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돈수 씨는 유기농 포도주를 옮기느라 분주했다. 이 포도주 한 병은 현금 5천 원과 지역화폐 3천 두루면 살 수 있다. 편집디자인 일을 하고 있는 최장희 씨는 한 봉지에 천 두루와 2천 원하는 유기농 두릅과 5백 두루와 천 원하는 상추를 각각 4봉지씩 샀다. 이웃과 나누기 위해 4봉지나 샀다고 한다. 유성구에서 치과를 열고 있는 김기홍 씨는 아기옷 3벌을 만1천 두루를 주고 샀다. 이영미 씨는 사서 몇 번 신어보지 않은 등산화며 남녀구두를 가져왔다. 몽땅 만 두루에 내놓았다. 즉석에서 흥정이 이뤄졌다.
지난 2000년 2월,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가 아닌 새로운 화폐가 대전에서 생겨났다. 바로 지역화폐 ‘두루’다. ‘널리’ 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수 우리말인 ‘두루’는 회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반시민들이 사용하는 원화와 등가의 원칙을 적용해 1천 두루는 천 원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했다. 한밭레츠 회원이면 누구나 두루로 거래할 수 있다. 모든 가맹점의 거래는 30%이상 두루를 쓰도록 되어 있다. 6개월마다 제작하여 전체회원에게 배포하는 ‘품앗이 도우미’ 안내서가 사무실 입구에 놓여 있었다. 회원들이 제공하는 품앗이와 가맹점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품앗이 품목은 밑반찬 제공부터 집수리와 농사일 품앗이, 외국어, 컴퓨터 교육, 자동차 정비 같은 전문기술 품앗이, 편지쓰기, 친구되기, 아이 돌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기술, 능력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 다 읽은 책이나 훌쩍 커버려 입지 못하는 아이옷, 작은 신발처럼 내게는 이제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 나눔시장에선 중요한 상품이 될 수 있다. 한밭레츠 가맹점에는 한의원 2곳과 의원 4곳, 치과, 동물병원, 약국도 있다. 채식식당과 건강학교, 카페, 포구사, 목공예점, 컴퓨터 수리점, 자전거포, 유아용품점, 학원, 인쇄소들도 함께 하고 있다. 의원과 한의원에서는 의료보험 치료를 모두 두루로 계산하고, 보험이 안 되는 일반치료는 50%만 두루로 받고 있다. 이들 가맹점이 두루 거래를 활발하게 만드는 매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한밭레츠의 거래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우선 연 2만 원이나 매달 2천 원씩 회비를 내는 한밭레츠 회원으로 가입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줄 수 있는 물품과 서비스 목록을 등록소에 알려주거나 홈페이지에 직접 등록하면 된다. 회원의 등록내용은 홈페이지를 통해 받고 싶은 것과 나눌 수 있는 것을 직접 볼 수 있고, 달마다 나오는 소식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등록소는 회원업무와 계정관리, 거래기록을 관리하는 사무실이면서 동시에 거래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맹업소의 경우, 홈페이지(http://tjlets.or.kr)의 ‘회원모둠 정보’를 통해 알 수 있으니 따로 거래의사 표시를 하지 않더라도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 거래를 원하는 회원들은 직접 연락하여 가격과 두루 사용 비율을 결정한 뒤 거래한다. 거래가 종결되면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한 쪽에서 거래내역을 홈페이지 또는 전화를 통해 등록소에 알려준다. 이것은 나눔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고, 널리 알리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일반화폐로 거래되는 품목들은 두루와 현금을 섞어서 거래하지만 회원들끼리 재활용품을 사고 팔 때는 두루로만 거래되기도 한다.
과연 거래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지난해 말부터 두루지기를 맡고 있는 박현숙 씨가 총회자료집을 펼쳐 보였다. 지난 한해동안 2,674건이나 되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하루에 약 8건 정도 거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지역화폐인 두루로 거래된 액수가 37,516,285 두루였으며, 일반화폐로 거래된 현금은 36,955,940원이었다. 두루 비율이 50.4%로 현금보다 두루가 약간 더 많이 쓰인 셈이다. 거래 특성별로 살펴보면 병·의원이나 한의원을 통한 의료분야가 절반 가까운 47% 차지하고 있으며, 농산물(14%), 업소거래(13%), 재활용(12%), 서비스(2%)들이 있었다.

레츠(Lets:지역통화시스템) 거래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좀더 가깝게 연결해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애용하게 한다는 것도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거래량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상징되는 주류경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은 미미하다. 지역 사람들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재래시장과 구멍가게들이 대형쇼핑센터와 편의점에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물건을 싸던 신문지가 스티로폼과 비닐 물결에 사라지고 있는 현실처럼 아직 지역화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도의 약한 움직임일 뿐이다. 하지만 변화의 희망은 한밭레츠 회원들을 통해서 조금씩 감지되고 있었다.
지역화폐를 이용해서 가정경제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박현숙 씨, 특별히 살 것이 없더라도 일주일에 2, 3번은 대형쇼핑센터에서 들러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곤 했지만 지역화폐에 가입한 뒤에는 카드값이 3/1가량 줄어들었고, 다음달에는 절반까지 줄었다. 소비와 소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어 지역화폐가 또다른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소비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생산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도 필요하도록 세뇌시키잖아요? 이런 상품들의 현란한 유혹에 빠져 그것을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저는 한 달 생활비 중에서 한밭레츠가 10∼15% 정도가 되는 것 같아요. 장을 볼 때도 꼭 필요한 것인가는 한번 더 생각하게 되니 우리 가정경제에도 보탬이 되고 있어요.”
이미 박현숙 씨에게는 지역화폐가 생활이 되어버린 것이다. 품앗이 학교인 ‘다도교실’에서 만난 권성희 씨. 품앗이 학교나 품앗이 만찬 같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회원들끼리 서로 거래도 하고 참신한 생각도 나누면서 잊고 있던 가치인 신뢰를 다시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대전 유성구에서 ‘문학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박광민 씨 역시 문화공연과 세미나장소 대여, 차와 음식 같은 것을 ‘두루’로 나누고 있다. 그의 지갑 속에는 만 원짜리 지폐가 아닌 ‘두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가게의 현금보관함 역시 ‘두루’가 차지하고 있다. 카페라는 것과 대학 가까이에 있어 두루의 거래가 다른 곳보다 많은 편이다. 서울에서 노동야학에 힘쓰다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와 ‘문학카페’를 연 박광민 씨는 한밭레츠 창립회원이 되면서 그의 인생방향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지역통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생활문화운동’과 합쳐져야 한다고 했다. 이미 그의 카페 지하에서는 독립영화를 꾸준히 상영하고 있고, 여러 인디밴드들의 공연도 열고 있다. 대학생들이 어울릴 수 있는 ‘거리문화제’, ‘프리마켓’ 같은 준비를 함께 하면서 지역화폐를 홍보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지역통화인 ‘레츠’를 처음 들은 많은 사람들은 참 훌륭한 생각이라고 하지만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들 이야기한다. 한밭레츠를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 박용남 씨(대전시 교통정책자문관)는 “지역통화운동을 이해하려면 그 속에 들어있는 공동체를 살리는 운동과 환경운동을 잘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는 파스퇴르유업에서 생산한 매실요구르트를 별 생각 없이 사 마시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그 매실요구르트 병에는 ‘원유 79.89%(국산), 매실시럽 6.8%(매실 50%, 대만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완제품 매실요구르트를 하나 생산하기 위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목장에서 횡성까지 원유를 실어 나르고, 매실은 우리나라에서 절반, 그 절반은 대만에서 사들이고, 요구르트 병의 원료는 또다른 지역의 공장이나 외국에서 수입해서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다 요구르트의 생산지인 횡성에서 다시 소비지인 대전까지 수송 에너지를 들여 운반하고, 이것을 마시고 난 뒤 빈병을 재활용업체에 넘겨주면 요구르트의 긴 생애는 끝이 난다. 이 매실요구르트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 이 모든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지구자원이 낭비된 것일까?
독일의 ‘부퍼탈연구소’에서 슈투트가르트 시의 딸기 요구르트를 대상으로 한 사례 연구를 보면 폐기과정을 제외하고 생산에서 소비까지 이동거리만 대략 8,000㎞나 된다고 한다. 박용남 씨가 마신 요구르트의 원료인 매실은 독일, 폴란드 사이처럼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대만에서 우리나라로 수입해온 것이라는 생각해보면 그 수치는 아마도 더욱 높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지속불가능한 생산과 유통, 소비, 폐기시스템을 갖고 있다. 요구르트 하나조차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서 만들어지는데 우리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더 많은 자원과 시간, 에너지와 돈을 낭비하고 있는지, 좀더 줄여볼 수는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결국 레츠라는 지역중심의 거래 관계망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분리된 관계들을 극복하고 모두가 하나의 순환 고리 속으로 통합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줄 것이다.

지역화폐를 실천하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한밭레츠 회원들의 노력을 살펴보자. 가장 큰 고민은 운영에 들어가는 재정문제다. “등록소 운영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게 될 텐데?”라는 질문에 박현숙 씨는 “등록소는 상근인력의 인건비와 소식지 발행, 홈페이지 유지관리 같은 비용을 수수료 수입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등록소의 운영은 매 거래마다 발생하는 거래금액의 5%를 수수료로 공제하여 사용한다”고 했다. 이날 열린 총회에서 회원들은 “현재 거래실적만으로는 재정이 턱없이 부족해 지역화폐운동의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회비인상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안되기도 했다. 대안경제운동을 펼치고 있는 곳에서 재정확보에 어려움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비단 이곳만의 고민일까? IMF이후 지역화폐 단체들이 30여 군데 생겨났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채 10여 곳이 되지 않은 이유 역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역화폐의 근본이념이 자립이지만 운영과정에서 생겨난 경제적 어려움 역시 만만치 않다. 미약한 자립성을 해소하기 위한 회원상호간의 자립의 틀을 구축하기 위한 인식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지역화폐의 활성화를 위하여 어느 범위정도로 ‘크기’를 맞출 것인가도 한밭레츠 회원들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대전 전체를 대상으로 하다보니 두루 거래를 위해 2시간 거리를 오가는 경우가 있었다. 사람들의 이동 거리나 물품의 이동, 수송 거리와 시간, 비용을 고려할 때 경제, 사회, 생태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용남 씨는 “레츠가 활성화되기 위한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사람냄새 나는 작은 규모를 지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집도 크고, 차도 크고, 무조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거대주의에 중독된 우리는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려도 닿을 수 없는 너무 커진 규모, 우리에겐 너무 멀리 있는 것들에게 이미 좌절감을 느끼고 무력해져 있지 않은가?

한밭레츠는 올해부터 법동지역만을 분리해 법동레츠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대전시 법동. 이 지역을 소규모 공동체센터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영구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을 품앗이라는 우리나라의 전통과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가 법동지역를 발전시키는데 한몫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반찬가게형태인 ‘두루부엌’, 문화소외 지역의 분들이나 육아문제로 따뜻한 영화 한편 보기 어려웠던 분들을 직접 찾아가서 영화를 상영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프로그램인 ‘따뜻한 이동영화관’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또, 한밭레츠는 의료와 육아, 교육, 문화 역시도 지역화폐를 통해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회원들이 공동출자하여 만든 ‘민들레 의료생협’, 대안학교, 대학들과 손잡고 펼칠 생활문화운동 역시도 민들레 홀씨되어 훨훨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박정현 대전충남녹색연합 사무처장은 “한밭레츠가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거래품목으로 넓혀야 한다”고 했다. 또, “거래가 일부 열성 참여자 중심으로만 집중되면서 회원들끼리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생긴 것도 사실”이라며, “한밭레츠가 보다 대안운동으로 뿌리를 튼실하게 내리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생명운동 모임들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도 했다.
한밭레츠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욕구에서 필요를 구별하는 것, 소비의 양에서 삶의 질을 구별하는 것, 지식에서 지혜를 구별하는 것, 대량생산에서 사람에 의한 생산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 물론 그 속에서 시행착오도 있지만 새로운 녹색희망을 찾기 위한 노력 역시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두루’라는 지역화폐를 이용하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천천히, 하나하나 열어가는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실험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홀씨처럼 날아드는 날, 비로소 우리는 네모난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이 아닌 둥근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끝>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