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인간 때문에 고통 한다.

2004.06.23 | 미분류

I. 자연에 들어

이 달 (6월) 5일에는 ‘세계 환경의 날’이 끼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저는 녹색연합 사람입니다. 생태주의를 외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최근 녹색연합에서 연 토론 모임이 있었습니다. 인천 앞 바다에서 모래를 마구 퍼내게 되어 생태계를 파손하고 있는 실태를 두고 벌인 토론회였습니다. 개발에 필요한 잔모래를 더 이상 뭍에서 퍼낼 수 없게 되자 바다 모래를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천 앞 바다의 모래를 파냈습니다. 섬의 생태계에 이상이 생기고 해안선이 바뀌고 바닷가에 서 있던 나무들이 바닷물에 침식당하고, 심지어 바닷고기들도 줄어들었습니다. 바다 모래를 파내다 섬 언저리 물길에 깊은 골이 생겨 다른 곳에서 바다 모래를 파 옮겨다 메우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 바다 모래를 파 낸 다음 벌어들이는 돈보다 그 곳을 메우기 위해 다른 곳에서 모래를 파 다시 메우는 비용이 더 든다고 합니다. 눈앞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그 너머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자연 생태계는 금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하여 자연을 마음대로 다룬 다음 인간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실로 엄청납니다.

오늘 아침 이 곳 석모도 바다 바로 옆 저 앞산을 깨부수고 있는 기계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습니까? 시끄럽기도 했지만 마구 산을 깨 허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깨는 것처럼 아팠으리라 믿습니다. 저렇게 산을 허물고 저 큰 바위들을 캐낸 다음 아마도 크고 높은 건물을 지어 올릴 것입니다. 산과 들과 바다를 가만히 두고서는 단 얼마도 배기지 못하는, 이를 데 없이 가벼운 인간의 탐욕스러움을 드러내는 짓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마구 깨고 허물면서 맹렬히 인간의 잇속을 차리는 동안 자연은 황폐화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겪는 고통입니다.

어저께 어느 신문 첫 쪽에 실린 기사 제목입니다. “‘못 먹는 물’ 먹고사는 도시 빈민”이라고 했습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모두 즐겨 마시던 땅속물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신문 기사는 이 물을 마시며 살아야 하는 도시 빈민들의 슬픈 모습을 그렸을 것입니다. 이제 돈으로 생수를 사 마셔야 할 세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물을 파 거기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낸 물을 마실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 물 뿐이겠습니까! ‘호흡할 수 없는 공기’를 우리가 먹고삽니다. ‘살 수 없는 공간’에서 우리가 삽니다. 대기의 오염을 돈으로 사고 팔아서 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생태계를 훼손해 온 나머지 자연은 더 이상 지난날의 자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자연에 들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그 참모습을 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잠시 새김질하고자 합니다.  

II. 우리의 그르침

오늘 읽은 구약의 내용 가운데서 ‘정복하라’는 말과 ‘다스리라’는 말의 뜻이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27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한 다음,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온갖 혼란과 오류와 화근이 생겨났습니다.

‘정복하라’ 하고 ‘다스리라’ 하는 것을 인간 마음대로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 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뤄져야 했습니다.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정복하심’과 ‘다스리심’은 어떤 것인지 거기에 연결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풀이했습니다. 자기 생각에 따라 편리하게 성경 구절을 끌어들였습니다.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환경 문제를 거론하려면 피할 수 없이 누구나 읽게 되는 아주 널리 알려진 글입니다. 신학을 전공했던 사람이 역사학자가 되어 오래 동안 미국 대학에서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4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우리의 생태 위기’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그 역사의 뿌리를 살펴 본 논문입니다(“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1967.3.10). 화이트(Lynn White Jr)가 바로 이 유명한 글을 발표한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 전통이 근대 서양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자극제가 되고, 그렇게 해서 나온 과학과 기술이 자연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휘두르게 되었기 때문에, 지구의 재앙을 불러오게 된 오늘의 환경 위기에 대하여 기독교가 책임이 있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기독교가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뜻 있는 일이지만, 그 전례 없이 막강한 과학 기술의 힘을 동원하여 이 자연계를 닥치는 대로 ‘정복하고’ ‘다스리겠다’ 한 것은 지울 수 없는 잘 못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대로, 인간의 생각이 미치고 손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죄다 정복하여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과학 기술을 이용하였으며, 그 효험은 놀라웠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욕심에 따라 땅을 정복하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뜻과는 무관합니다. 그 뜻으로부터 동떨어지고 차라리 거기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정복하라’ 하시고 ‘다스리라’ 하신 것은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 밑에 있어야 할 ‘제한된’ 주권이며 ‘제한된’ 다스림입니다. 인간이 행사하게 명하신 그 주권은 하나님의 주권 밑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거나 그 주권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스리라’ 하시며 우리 인간에게 명하신 그 ‘다스림의 권한’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밑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무시하거나 그 다스리심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III. 그 결과

이렇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주권과 통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 밑에 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정복하라’고 하셨기에 인간이 행사해야 하는 ‘정복’의 행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주권 밑에 있고 또 그 주권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지배 방식과 그 지배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다스리라’ 하셨기에 그 명령에 따라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밑에 있고 또 그의 다스리심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그 다스리심의 속성과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그 밑에 들지 않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여 그 밑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밑’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자기 뜻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자기 욕심 따라 아무렇게나 행동했습니다. 자기 편리를 위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연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 지배 방식과 품성을 무시하고,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 자신의 지배 방식으로 지배하였습니다. 주먹만한 인간의 두뇌, 더럽기 짝이 없는 인간의 마음, 그것이 절대의 자리로 올라섰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머리와 마음의 잣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풀이했습니다. 터무니 없는 아전인수격의 해석이었습니다. 욕심으로 뒤범벅이 된 인간 중심의 독단과 독점의 지배 방식이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입니다. 창조의 뜻에 따라 피조물의 세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그 창조의 질서에 따라 서로 기대고 있다는 생태 관계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 관계의 망으로부터 벗어 나와 자기 마음대로 살면 ‘더 잘 살 수 있다’고 계산하고 판단한 인간의 오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의 독선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 단독의 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탐욕에 빠져들면서 자연 생태계를 아무렇게나 깨고 뭉개버리게 되었습니다.

눈앞의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편리를 위해서라면, 부를 증식시키기 위해서라면, 아무 짓이나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다 해대었습니다. 산도 깨 허물고 강도 잘라 꺾고 바다도 뭉개 없애버리고, 땅과 하늘과 바다의 생물을 멸종시키는 것조차도 전혀 가슴 아픈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스러움 앞에 자제할 것이란 이제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파괴와 파괴의 연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지배 방식에 맞서는 인간의 욕심이며 독단이었습니다.

지구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파국 상태로 치닫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지구 생태계는 이변에 이변을 낳아 그 이변의 도를 더해가고만 있습니다.

IV. 자연의 청지기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우리의 욕심을 채우라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뜻을 어기게 되면서 자연은 여지없이 파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연은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탐욕을 향해 숨차게 헐떡이며 달려온 인간의 탐욕이 입히고 있는 고통입니다.

이제 그 탐욕을 위해 뜀박질 해 온 삶을 되돌릴 때가 왔습니다. 그 탐욕의 전리품이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이 손아귀에 넣었다고 기꺼워하는 그 획득물의 뭉치는 실상 구석구석 ‘파손된 자연 생태계’일 뿐입니다. 이렇게 더럽혀진 지구, 이렇게 깨진 지구, 이렇게 이지러진 지구, 그 속에서 아직도 자신의 탐욕을 깨달아 추스르지 못한 채 유쾌한 듯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이란 겨우 숨쉬고 있을 뿐입니다. 풍요를 획책하다 맞닥뜨린 가련한 인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땅을 ‘정복하라’ 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라’ 하신 것은 인간 마음대로 탐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조물을 서로 이어놓고 있는 기묘한 자연 생태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주권 밑에서 보살피는 청지기가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의 뜻을 펼치고 그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연 생태계의 청지기가 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 아래 있습니다. 보살피심과 돌보심으로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키며 그 속성에 동참하여 그 뜻을 펼쳐나가는 삶을 삽니다. 거기에 어떤 인간 나름의 지배욕도 인간 나름의 자만심도 끼여들 수 없고 또 들여서도 안 됩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에 터해 그의 속성을 닮아 겸손히 삽니다.  

‘예수 사람’은 하늘과 땅, 이 자연 생태계의 청지기입니다. 자칫 생태주의에 기울어져 인간과 자연을 꼭 같이 보는 나머지, 마땅히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흐려놓게 되는 논리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고 생명 일반의 귀함을 확인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답게 그러한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은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뜻에서 기독교인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을 지나치지 않는 생태주의의 길을 걷습니다. 생태계 안에서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서로 긴밀히 이어져 있지만, 또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독특한 책임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여 자연 생태계에 대하여 청지기의 몫을 다하는 보살핌의 책임입니다. 돌멩이나 나무 조각이라면 지지 않을 것을, 도룡뇽이나 종달새 같으면 감당하지 않을 것을, 인간이기에 진지하게 져야 하는 ‘인간’의 막중한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특유의, 인간만이 질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청지기의 책임입니다. 피조물을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창조의 뜻에 따라, 그 보살피심과 돌보심에 동참하여 그 뜻을 겸허하게 대행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깊은 뜻에서 모두 생태주의자이며 생태 운동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람교회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오늘 바다에 에워싸인 석모도의 한 자락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 놀라운 창조의 뜻을 되새기면서 이 청지기의 삶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생태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생태계에 이렇게 저렇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돌보심’에 동참하여 삶을 절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는 도구로, 대행자로,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기 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다시 돌아가 그의 뜻에 따라 책임있게 행동하는 ‘자연 생태계의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 박영신상임대표는 예람교회라는 작은 교회에서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돌아가며 목회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윗글은 지난 2004년 5월 30일 강화도에서 나눈 설교 내용입니다. 이곳 초록연필 공간을 통해 녹색연합 대표들의 다양한 생각을 회원, 시민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영신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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