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와 생태주의의 이음새

2004.07.20 | 미분류

<<여성주의와 생태주의의 이음새>>

박 영신(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녹색연합 상임대표)

(이 글은 지난 2004년 2월 10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주체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저도 이 ‘초록 연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어 ‘녹색 사람’ 여러분들과 함께 ‘제 작은 생각 한 토막’을 나누고자 여기 올려 봅니다).  

I. 관심 배경

이른바 ‘반문화 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후반, 나의 미국 유학 생활이 시작되던 때였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더하여 새로운 여성 운동과 환경 운동이 이 때 일어난 것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윤리 관심과 함께 학문의 관심을 일깨우던 각성의 시기였다. 이후 나는 이러한 관심으로부터 떠난 적이 없다.

70년대 중반 모교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여성의 사회학’이란 과목을 열어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함께 토론식 강의를 열었던 것이 보기이다. 그리고 현대 문명의 밑뿌리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면서 우리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나의 관심 지평 안에 환경에 대한 관심도 들어서 있었다. 1984년 여름 미국의 한 신학교 계절 학기에서 <창조>에 대한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여성’과 ‘환경’, 이 두 관심 영역은 그러므로 나에게는 낯선 것도 아니려니와 새삼스런 것도 아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친화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생각을 아래에 몇 마디로 줄여 쓴다.

II. 여성주의의 그늘

여성 운동은 여성의 해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성이 제멋대로 고착해 놓은 삶의 구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해방의 주장이다. 이 운동은 좁게는 여성의 삶에, 넓게는 오늘의 삶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지금껏 삶의 언저리에 머물러 그 한 가운데로 들어올 수 없었던 여성들의 대거 ‘중심 이동’ 현상을 낳았다. 남성이 누려온 삶의 기회를 고르게 나눠가져야 한다는 평등 투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을 위한 공식 또는 비공식 교육 기관이 문을 열고, 남성과 함께 교육받을 수 있는 마당도 넓어졌다. 이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변화였다. 남성만을 받아들이고 여성은 들어오지 못하게 높이 담벼락을 쌓아 올렸던 그 독점의 아성을 허물어뜨린 것은 실로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교육의 기회 확대가 활동의 기회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여성이 넘어야 할 독점의 성벽은 교육 영역만이 아니었다. 교육을 받고 나온 여성은 곳곳에서 벽에 부딪혀야 했다.

이러한 제약 밑에서 여성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어차피 남성 중심의 체제 ‘안’에 들어가려면 그 체제에 장단맞출 수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타협 노선이다. 오늘날 속칭 명망가의 자리에 들어서 대중 매체에 오르내리게 된 ‘사회 활동가’들은 주로 이러한 타협의 길에 들어서, 현존 체제 그 상층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을 걷게 된 여성들이다. 다른 하나는 남성 중심의 체제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 ‘밖’에서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대안 노선이다. 비타협 노선을 택한 여성이기에 당연히 기존 체제의 상층부에 들어서지 않아 좀체 매체의 눈에 잡히지 않는 이들이다.

여태 막혀 있던 사회 상층부에 여성이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 그 자체는 성별 비율로 보아 마땅하고 바람직하다. 인구의 반이 여성인 한 모든 영역에서 여성은 반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내놓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삶의 밑바탕 문제를 바꿔놓지 못한다. 지난날 남성이 다스려 온 체제를 이제 여성과 함께 그 체제를 운용하게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여성의 참여 수치를 높인다고 해서 남성 중심의 체제에서 굳어진 온갖 문제들이 결코 자동으로 다 풀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여성의 실체’에 대하여 다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성 중심의 체제에서 삶을 더욱 온전하게 가꾸지 못한 것을 여성들은 ‘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와 바람을 접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 비율이라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 너머의 다른 문제이다. 남성들이 다져놓은 오늘의 삶을 근본에서 되새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새로운 덕성의 문제이며 덕목의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래 동안 억눌려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특유의 삶의 지향성, 이 억압된 ‘여성다움’에 주목한다. 삶을 무엇으로 보고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가치와 지향성과 이어진 여성의 덕스러움에 대한 관심이다.

그 동안 무시되어 온 여성의 품성은 무엇이며 삶의 지향성은 또 어떤 것인가? 그것은 남성 중심의 지배 체제를 돌파하는 대안의 덕목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덕목은 삶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사람을 자기 이익과 편리의 도구로 바라보는 남성 중심의 의식 세계에 맞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것이 여성 속에 있는가?

최근의 논의에서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여성다움’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확실한 논거이기도 하다. 이것은 여성다운 의식 세계가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남성다움이 표상하여 체제의 속성으로 삼은 정복과 지배의 가치와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여성다움은 삶 자체를 귀히 여기는 ‘보살핌’의 ‘관계’로 바라보고, 사람을 있는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는 ‘돌봄’의 지향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성 중심의 굳은 체제로부터 비로소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III. 생태주의와 만나

생태주의(ecologism)는 이 시대의 새로운 가치 이념이자 삶의 방식이다. 우리가 사는 삶이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마침내 그것이 소비주의로 치달아, 모든 것을 인간의 소비 욕구를 채워주는 도구로 이해하고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이 문명에 맞서려는 대안의 주의주장이다. 한 마디로, 생태주의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뒤따르고 있는 삶의 방식과 생각에 도전코자 하는 가치 지향성이다.

오늘날 이렇게 자연이 훼손되게 된 것은 그릇된 인간의 생각과 삶에 대한 뒤틀린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삶에 편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그 어떤 것도 남겨두지 않고 탐욕한다. 탐욕 앞에서는 어떤 것도 더 이상 귀하지 않으며 더 이상 소중하지 않다. 단숨에 정복하고 지배한다. 인간 위에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인간만을 위한 인간 중심의 의식 세계이다.

경제 성장주의가 이를 예증한다. 경제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가만히 남겨두지 않는다. 삶의 편리를 꾀한다는 온갖 개발 계획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모든 것을 부수고 아무렇게나 다룬다. 속도를 내어 주행 시간을 줄이려면 산과 들을 닥치는 대로 깨면서라도 고속 도로를 뚫어야 한다. 개발에 방해가 된다면 기억해야 할 역사 기념물 정도는 순식간에 하찮은 장애물로 격하시킨다. 나라가 지키겠다고 공언해 놓은 국립공원에도 터널을 뚫어 길을 내는 일을 서슴지 않고 밀어붙인다. 자동차 소유가 당연시되어 있는 오늘 자동차 소유자들은 ‘시민’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자기 이익을 외쳐댄다. 자기 편리를 내세워 자연을 훼손하는 개발 계획에도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함 없이 합세한다. 그런가 하면 농업 생산을 늘려야 한다며 독한 농약을 만들어 무한정 살포한다. 새들을 몰아내고 물고기를 죽이고 땅을 못쓰게 하는 것조차 가볍게 여겨 왔을 정도다. 생태계 자체의 훼손과 파괴이다.

생태주의는 망설임 없이 자연을 착취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삶의 풍요를 기획해 온 역사를 거부한다. ‘자연 착취와 지배’의 문명 자체를 걷어내어 자연 생태계와 화해하고 공존코자 한다. 더 이상 인간을 절대의 자리로 올려놓지 않으며 더 이상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의 씨가 뿌린 과학 기술의 절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절대의 힘으로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고 인간의 탐욕과 편리를 위해 마음내키는 대로 모든 것을 동원하고 착취해 온 역사를 깊이 성찰코자 한다.

이 점에서 생태주의는 널리 쓰고 있는 환경주의(environmentalism)와 갈라진다. 환경주의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가짐 그 밑바탕에 놓여 있는 근본의 문제와 씨름하기보다는 여전히 인간을 삶의 한가운데 두고자 한다. 그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하여 이제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는 설득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삶에 대한 생각과 사람에 대한 눈을 근본에서는 바꾸지 않으려 한다. 바꿀 것은 환경 문제를 ‘효율성’ 있게 ‘관리’하는 일이며,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환경의 ‘효율성’을 더해 가는 ‘전략’의 문제일 따름이다. 환경주의는 현존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개선의 여지를 찾으려 할 뿐, 문명 비판에까지 나아가 그 밑뿌리의 문제와 씨름하고자 하지 않는다.

생태주의는 다르다. 오늘의 문명을 규정짓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과 탐욕에 도전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에서 다시 설정하고자 하는 문명 비판의 깃발을 든다.  그리하여 생태주의는 ‘환경’ 대신에 ‘녹색'(green) 곧 ‘생태’의 낱말을 써 자체의 급진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에서 생태주의는 보살핌의 윤리를 담고 있는 여성주의와 만난다. 벌써부터 ‘생태 여성주의'(eco-feminism)라 하여 이 점을 강조해 온 바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해야 한다는 통례의 여성 운동은 누구도 깎아 내릴 수 없게 그 나름으로 크게 기여했으나, 남성이 지배해 온 그 체제를 밑바탕으로부터 혁파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보살핌의 윤리’를 내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던진다. 여성주의의 한 모퉁이에서 여성 특유의 품격과 가능성을 들춰내어 남성과는 다른 ‘차별성’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성 주도의 체제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다움’을 내세운다. ‘남성다움’과 다른 이 ‘여성다움’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규정하는 데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되새겨 삶 자체를 새롭게 엮어 가는데 이 ‘차별성’을 대안 문명의 가치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목소리이다.

IV. 우리의 관심

자칫 요란한 거리의 함성에 휘둘려 마땅히 귀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어지러운 광장의 군중에 정신을 빼앗겨 모름지기 눈여겨봐야 할 모습을 지나칠 때가 있다. 여성 운동의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남녀 평등을 외치며 남성과 힘을 겨루다 뜻하지 않게 ‘남성화’된 여성상이 사회 중심부에 떠오르면서 마치 이러한 여성이 되는 것이 여성 운동의 최종 목표인 듯이 이해하게도 된다. 그들의 소리, 그들의 모습이 모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않고 들어야 할 소리는 그 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봐야 할 모습은 그 모습이 아니다. 남성 체제에서 남성의 취향에 따라 소리내고 남성의 가락에 맞춰 춤추면서 체제의 상층부로 떠오르게 된 여성의 소리와 그 여성의 모습, 그것은 대안일 수 없다. 지배와 정복의 논리에 어울릴 수도 없고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는 ‘여성다운’ 삶의 지향성, 남성 중심의 체제에서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고 언제나 짓눌렸던 ‘여성다운’ 삶의 방식, 우리가 오래 동안 놓쳐 가볍게 여기고 지나쳐 온 바다. 우리가 새삼 귀기울여야 할 소리는 ‘돌봄’의 윤리 지향성이며 우리가 새삼 눈여겨봐야 할 모습은 ‘돌봄’의 삶이다. 이것은 여성이기에 느끼고 생각하며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며, 남성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머니’로서 살아야 하는 여성이기에 담아낼 수 있는 목소리이고 담아내야 할 삶의 모습니다.

이들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아이를 밴 다음 아이를 낳아 젖 먹여 기르는 여성 특유의 생리 조건과 함께, 여성에게 특유한 사회·문화의 조건을 경험한다. 그만큼 특별한 존재이다. 거기에서 빚어 나온 삶의 지향성은 남성이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값진 가치이다. 나의 출세에 이용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사람을 값 매김 하는 저속한 삶의 방식을 뒤따르지 않는다. 남을 이용하여 득세하거나 남을 밀쳐내면서 출세의 사닥다리에 오르는 비정한 삶의 방식에 맞선다. 이러한 따위의 삶의 지향성과는 사뭇 다르게, 이들 짓눌려온 여성들의 ‘여성다움’은 정다운 삶의 방식을 선사한다. 이들은 돌보며 보살피는 삶을 귀히 여기고 그러한 삶에 익숙하다. 모성을 잃지 않은 여성에게는 모든 생명이 다 값있고 모든 사람이 다 보살펴 돌봐야 할 생명이다. 여성이 표출할 수 있는 ‘돌봄’의 윤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성다움’은 제 값을 얻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을 유일한 삶의 지향성으로 믿어온 남성 중심의 체제에서는 전혀 존중받지 못할 공허한 삶의 방식으로 따돌림 받는다. 눈앞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냉혹하게 탈취하고 지배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문명 가치이자 그 미덕인 것처럼 여겨오고 있는 판에, 당연히 보살피며 돌보는 삶의 윤리는 이러한 문명 가치에 거슬릴 뿐 아니라 매끄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통례의 처세술에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기 까닭이다. 하여, 보살핌을 표상하는 여성다움은 무가치하다 하여 버림받았으며 깡그리 밖으로 몰아냄을 당하고 여지없이 짓밟혀 왔다.  

정복과 지배의 체제는 반드시 인간 사이의 문제를 설정하는 원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규정하는 원리로 확장되었다. 자기 탐욕을 위해 생태계 전체의 파괴도 서슴지 않는 삶의 방식으로 올라섰다. 이제 삶은 그 막다른 자기 파멸의 아득한 낭떠러지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태주의가 주는 각성의 계기가 더욱 뚜렷해지고 호소력 또한 힘을 더할 수 있었다.  

생태계는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하여 함께 돌보고 보살펴야 할 생명 공동체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이제껏 짓눌려 온 ‘보살핌’의 윤리 지향성을 되살려야 한다는 집합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오늘의 삶이 이렇게 마냥 굴러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자원의 고갈로 인간이 획책해 온 성장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여전한 인간 중심의 계산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어우러져 함께 살아온 생태계 그 자체의 파멸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V. 함께

보살핌의 윤리는 여성다움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여성의 전유물이 되게 할 일도 아니며, 그리하여 여성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할 일도 아니다. 탐욕의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마지막 바람의 ‘짐’은 모두가 져야 한다. 여성에게 모든 짐을 지게 하는 것은 모질 뿐 아니라 무책임한 일이다. 그것은 오늘의 문명 그 테두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 모두가 나누어져야 할 생명의 짐이다. 그러므로 보살핌의 윤리는 인간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삶의 지향성이어야 한다.

나의 편리와 이익에 도움이 되는 생명체는 높이 값 매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낮게 값 매기는 것은 서로 돌보며 보살펴야 한다는 삶의 윤리에 어긋난다. 모든 생명체가 다 값지며 함께 보살펴야 할 존재이다. 값없다 하는 것의 값을 보고 모든 생명체를 돌볼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돌보고 보살피는 삶의 윤리이며, 생태계에 두루 스며있어야 할 삶의 지향성이다.

생명체는 낱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어져 있는 생태 공동체의 지체이다. 생태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서는 생명체 일반을 아우르는 관계이고, 서로 뗄 수 없게 기대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보살피는 생태 공동체이다. 오늘날 ‘환경 문제’라고 하는 것은 돌봄과 보살핌의 윤리로 이해해야 할 ‘우리의 일’이다.

하늘과 땅, 이 모든 것을 창조한 뜻은 다만 인간의 편리와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함께 어우러져 ‘보기에 좋은’ 조화로운 생명 공동체였다. 창조는 인간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신의 자리로 올라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짓거리를 저질러왔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생태계를 아무렇게나 더럽히며 깨버린 것이다. 고백해야 할 인간의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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