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왜 저리 높은 것인가

2004.09.01 | 미분류

*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해오름달 호'(신년 1월 호) ‘마중물’을 위해 지난 해 12월 15일에 써 보낸 것인데, 책이 엮어져 나올 때 ‘빠지고 잘렸던 부분’을 여기 새로 다 담습니다. 작은 제목과 ‘천민 부유층’ 부분이 그것입니다.    

<버릇 하나>

저 하늘은 왜 있는 것인가. 저리도 푸르며 높은 것은 어떤 까닭에서인가. 구름이 마구 덮어 씌어도,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그 너머 늠름하고 웅장한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이며, 그 더러운 짓거리들이 넘쳐나도 저렇듯 말없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음은 또 어떤 비밀 때문인가.

저는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곧잘 우두커니 서서 하늘 쳐다보길 좋아합니다. 호수 길 맞은 쪽에 늘어선 답답한 건물들 그 너머에서 하늘은 언제나 저토록 넓고 높습니다.  

<새로운 우상>

오래 동안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난 이 이성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우겨댔습니다. 지난날의 것은 그 무엇이나 이성에 어긋난다며 모조리 거꾸러뜨렸습니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정복하겠다 하고 모든 고통과 악도 몰아내겠다 큰 소리쳤습니다. 진리의 독점자로 군림하였습니다. 독선의 칼을 마구 휘둘러대었습니다. 그 발아래 짓밟히지 않을 장사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당함이 서려있는 듯 했습니다. 인간의 오만이었습니다.  

일은 그렇게 간단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 이성은 부분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긴 했다지만 새로운 고통도 불러왔습니다. 핵이 드리우고 있는 무서운 그림자를 보십시오. 인간이 신주처럼 모시던 이성이 오늘의 과학을 잉태하면서, 마침내 스스로 절대의 자리에 올라선 다음 아무렇게나 뱉어낸 오만의 결과물입니다. 옛 우상을 허물어뜨린 그 자리에 과학이라는 새로운 우상이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의 유물주의 >

과학뿐이 아닙니다. 지난 얼마 동안 우리는 물질의 풍요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경제 성장과 개발이 우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것 너머 다른 것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물질의 풍요를 삶의 마지막 목표이자 가장 높은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물질 획득의 순박한 시녀가 되었습니다. 모든 에너지가 이 한 점에 모아졌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물질의 획득에 모든 열정을 다 쏟아바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뿌듯함이요 떠벌리는 자랑입니다.

우리의 역사입니다. 물질을 더할 수 없이 가장 높은 가치로, 가장 높은 목표로 올려놓고 그것을 신앙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물질주의자가 되고 유물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물질 획득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행복의 조건이요 행복의 정점이라는 굳은 믿음의 신봉자로 살고 있습니다. 철저한 ‘유물주의자’며 ‘유물교의 광신도’입니다.

유물주의란 철책 너머 어느 무서운 땅에 진치고 있는 낯선 체제가 아닙니다. 저 만큼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한 가운데, 우리의 삶과 의식 그 속에 진치고 있습니다.

삶과 세계를 경제의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물질의 잣대로 재려는 유물주의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이 땅을 점거한 것입니다. 유물주의 체제가 세워진 셈입니다.

<천민 ‘부유층’>

흔히 서울 강남 사람들을 ‘상류층’이라 부릅니다. 이 낱말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밖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오직 경제의 부를 가리킵니다. 강남 사람들에게 더욱 높은 문화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욱 품위 있는 삶의 맵시나 격조 높은 삶의 가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소비를 앞장서 부추기고 소비 욕심을 부풀리는 층일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상류층’이라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경제력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고 다른 모든 가치를 낮게 매기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식 세계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천민 의식의 반영입니다.  

상류층은 물질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물질의 가치 그 너머 더욱 높은 삶의 가치를 찾아 불처럼 사는 문화 상류층이 있다는 사실을 덮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다운 상류층은 마땅히 이러한 층을 포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류층’이라 하는 것은 졸부를 포함하는 천한 물질 중심의 개념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집 값이 올라서, 재산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해서 이들을 묶어 ‘상류층’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회는 깊이 병든 사회입니다. 땀 흘려 일해 만든 것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불공평한 세제 탓으로 ‘부유층’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습기조차 합니다. 스스로 떳떳할 수도 또 자랑스러울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그러므로 ‘상류층’이 아니라 기껏해야 ‘과소비층’이요 ‘부유층’으로 가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늘 믿음>

이제 우리의 굳어진 의식 세계를 넘어설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빠져든 믿음의 세계를 넘어서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태 당연하다고 믿어온 바로 그것들을 넘어서야 하는 믿음, 오늘날 절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식 세계 바로 그러한 것들을 넘어서야 할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에 대한 부정을 뜻하며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기 성찰과 그 확인을 뜻합니다.

믿음의 세계란 우리가 ‘믿는 바’를 넘어서고 또 넘어서게 하는 그 무엇을 뜻합니다. ‘믿음’은 그 어디에 머물러 고착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넘어서고 넘어서는 초월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것을 넘어 ‘끝없이 열려 있는’ 그 무엇에 맞닿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파괴해야 할 우상입니다.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늘 쳐다보기를 좋아하고, 하늘은 왜 높이 있는 것인가 하며 하늘과 대화하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난 듯 날뛰어도 하늘만큼 높이 뛰지 못하며, 아무리 높이 집을 지어 올린다 한들 하늘을 뚫어내지 못합니다. 하늘은 인간의 범위 그 너머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열린 세계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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