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환경비상시국

2004.11.24 | 미분류

“오늘의 생명과 환경 없이 내일의 미래와 희망도 없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생명경시 풍토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참여정부가 생명과 환경을 경시하는 태도를 퍼뜨리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환경 오적(五賊)을 뽑자!” “환경부 장관뿐 아니라 각종 개발정책을 양산하는 경제부총리의 퇴진도 요구해야 한다!” “대통령이 환경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데 장관이 퇴진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나?”

국정과제에 환경문제만 빠져 있다

지난 11월10일 ‘환경비상시국회의’ 출범식이 있기 전 열린 ‘전국대표자회의’에서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성토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주기관차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인지 대표자들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환경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박영숙 여성환경운동연대 대표, 이정자 녹색미래 대표,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 등도 그동안의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활동 계획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박 대표는 “암담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며 “총체적인 위기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환경운동가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환경운동가들이 스스로 ‘환경비상시국’이라고 규정한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현 정부의 각종 개발정책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수도권 규제완화’ ‘230개 골프장 건설 및 규제완화’ ‘국토계획법상 관리지역의 공장설립 면적제한 폐지’ ‘경유상용차 배출기준 유예’ 등 하루가 멀다하고 발표되는 반환경정책들은 가히 개발의 홍수라고 부를 만하다. 게다가 국정과제인 지역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동북아 경제중심 프로젝트에도 개발정책만 있고 당연한 고려사항인 환경 문제는 빠져 있다.

이날 대표자회의에서는 환경운동 진영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비상시국임을 확실히 느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나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지역별로 풀뿌리 주민단체들과의 간담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오는 11월27일 오후 1시 서울시청 광장에서 ‘환경비상 전국 일만인 선언대회’를 열기로 확정했다. 또 중요 쟁점별 연속 토론회를 조직해 참여정부 개발정책의 심각성을 조목조목 따질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오후 1시에 예정된 ‘환경비상시국회의’ 출범식을 준비하는 실무자들은 쉴 새 없이 대표자 회의실을 엿보며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 입구는 온 나라에서 모인 시민환경단체 활동가들로 붐볐다. 지역 풀뿌리 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상황의 심각성을 웅변하고 있었다. 100명이 넘는 환경운동가를 한꺼번에 만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환경비상시국’에서 만났다는 게 썩 즐겁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얼굴들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터져나오는 봇물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운동가들의 안부를 묻기가 미안했다.

출범식은 ‘생명을 위한 절규, 평화를 위한 소리’라는 영상물 상영으로 시작됐다. 생명과 평화의 염원으로 65일간 장장 305km의 고행을 마다하지 않은 네분 성직자들의 숭고한 실천인 삼보일배의 긴 여정이 화면 가득히 펼쳐졌다. 상영 내내 분위기는 숙연했다. 어떤 이는 눈시울을 붉혔고,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 이도 있었다. 어쩌면 새만금 간척사업이 환경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 삼보일배라는 세계 운동사에 유례없는 고행을 자원했던 네분 성직자의 절박한 마음과 브레이크 없이 일방적으로 달리는 개발의 기관차를 세워야 한다는 환경운동가들의 절박한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개발 때문에 민-민 갈등 일어

이어 전국 환경운동가들의 발언이 쏟아졌다. 이지훈 제주참여환경연대 대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제주 골프장 문제를 언급했다. 이 대표는 “1천만평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됐거나 계획 중에 있는데 이를 위해 1천만t의 생명수를 뽑아올려야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또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명균 안양군포의왕환경연합 사무처장은 “수도권을 대표하는 경기도만 보더라도 12개 민자유치 도로개발 사업, 주택공급 사업, 신규 택지개발 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다”며 “정부의 핵심 정책목표인 국가 균형발전, 지방분권과도 정면 배치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각종 개발정책으로 지역은 민-민 갈등이 촉발되고 있다고 정호 광주전남녹색연합 사무국장은 전했다. 540홀짜리 골프장 건설계획이 발표된 해남 지역은 찬반 주민들간의 갈등으로 최근에 폭행 사건까지 일어났다는 것이다.

출범식에서 환경운동가들은 △미확정된 개발계획 및 제도의 백지화 △지속 가능한 국가 운영을 위한 시스템 정비로 국정과제위원회(정부혁신위원회,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등)와 규제개혁위원회의 쇄신 △대형 국책사업 재검토 △청와대 환경보좌관 신설 등 대정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인적 쇄신도 요구도 있었다. 경제부총리와 환경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했다.

환경비상시국회의는 첫 행동으로 정부와 환경단체간의 ‘정책 징검다리’ 구실을 했던 ‘민간환경정책협의회’ 소속 21개 시민환경단체 대표들의 위원직 집단 사퇴를 선언했다. 참여정부의 반환경적 개발정책에 대한 적극적 항의 표시인 셈이다. 이들은 곧바로 광화문 열린공원 앞에서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환경단체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기울이지 않으면 노무현 정부와의 결별은 불보듯 뻔한 것 같다.

이글은 한겨레21 ‘풀뿌리대안운동을 찾아서’에 연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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