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폐기물 부지’ 국민합의 거쳐야

2005.02.21 | 미분류

▲ 많은 사회갈등 비용을 불러온 부안 핵폐기장 추진정책에 항의하는 주민들의 촛불집회 모습.

정부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2월 임시국회 중에 통과시켜 7월까지 부지 선정을 완료한다는 방침이어서 또다시 첨예한 사회적 갈등이 예상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원자력위원회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인 사용 후 핵연료에 대해서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공론을 거쳐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 반면,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에 대해서는 처분장을 우선적으로 확보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중저준위 폐기물 발생량은 원전 1기당 연간 150드럼(드럼당 200L) 정도다. 현재 6기의 원전이 가동 중인 영광의 경우 연간 900드럼 정도 발생하므로 가로 20m, 세로 10m, 높이 10m 건물이면 대략 10년치 발생량을 저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존 원전 지역주민의 반대로 중저준위 폐기물 저장용 건물의 신축이 어렵고, 저장 용량 한계가 다가오므로 곧 처분장을 마련하지 못하면 국가 전력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원자력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국수력원자력의 2003년 자료에 의하면 원전 부지별 중저준위 폐기물 포화 연도는 울진 2008년, 월성 2009년, 영광 2011년, 고리 2014년이다. 울진 또는 월성 부지의 저장용량이 가득 찰 경우 이후 발생하는 중저준위 폐기물은 영광 또는 고리로 옮기면 시간을 벌 수 있다. 또 신규 원전부지인 신고리, 신월성, 신울진 등의 중저준위 폐기물 저장용 건물로 이송한다면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다. 한수원이 그동안 주장해온 대로 2007년 초 상용화 운영을 목표로 추진 중인 중저준위 폐기물 유리화 기술을 도입하면 1기당 연간 150드럼 발생량이 35드럼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물론 중저준위 폐기물을 이쪽저쪽 원전부지로 옮기는 건 장기 대책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안을 제기하는 것은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대책을 조급하게 서두를 경우 또 다른 ‘부안 사태’ 같은 우를 범할 수 있는 만큼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국민적 합의를 거치자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원자력 선진국은 국민과의 충분한 협의 아래 장기간에 걸쳐 방사성폐기물 문제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어떤가. 정부가 지난 20년간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확보에 실패한 이유가 추진 방법에 있어서 정보의 미공개, 보안 중시, 하달 형식의 일방성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회적 합의를 무시한 비밀주의와 일방적 추진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고 반대를 불렀다는 얘기다.

방사성폐기물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국가 장기 정책의 부재가 처분장 확보 실패의 또 다른 원인이다. 지난해 12월 이후 정부는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에는 그보다 방사능이 수백만 배, 수천만 배 강한 사용 후 핵연료 저장시설은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방사성 폐기물 전반에 대한 국가 장기대책이 없어 그런 입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제라도 정부는 국민적 합의 아래 사용 후 핵연료 및 중저준위 폐기물을 포함한 방사성 폐기물 전반에 걸친 포괄적이고 투명한 장기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또 안정적이고 일관된 정책 추진과 실행을 위해서는 관련 정책의 법제화가 시급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글 : 강정민 핵정책전문가·공학박사

* 위 칼럼은 2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 하에 기재하며, 논지의 방향과 내용은 녹색연합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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