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주의로 보는 지방 분권의 길

2005.03.17 | 미분류

‘지방 분권’이라 하는 말은 어떤 뜻을 주고 있는가? 그것은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모든 권력(과 자원)을 나누어 지방으로 갈라주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적어도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사회의 중앙 집중 현상이 점점 그 도를 더하여 이제 더 견뎌낼 수도 없고 배겨날 수도 없게 된 현상태에 대한 대안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뜻있는 시민이라면 지방분권운동의 뜻과 지향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I. 둘의 만남:

생태주의에 서 있는 시민운동 세력도 예외가 아니다. 지방분권운동과 뜻을 같이 하면서 자체의 목소리를 덧붙이려 한다.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연합도 예외일 수 없다. 실제로 녹색연합은 벌써부터 분권을 주창해 온 터다. 이 뜻을 문서화한 강령에서 “우리는 참여민주주의와 자치, 분권을 위해 노력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녹색 자치의 실현’이라는 항목 그 첫 마디가 되는 글귀이다.

이처럼 지방 분권 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은 함께 만난다. 그러나 자체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어 하는 생태주의의 운동 철학이 있다. 아래에서는 이 점을 밝혀 본다.

II. 녹색의 빛:

환경이라는 말이나 뜻을 단 운동 단체가 여럿이지만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넓은 뜻에서 같다. 모두가 자연 환경의 훼손과 피폐함을 걱정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생명을 회복코자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로 강조점과 접근 방식을 달리하는 몇 가지 갈래가 있다. 특히 ‘환경주의’를 내세우는 운동 지향성과 ‘생태주의’를 내거는 운동 지향성이 두드러진다.

환경주의는 오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가기 위하여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는 설득 구조 위에 서 있다. 자연 이용을 더욱 효율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존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를 잘 ’개선‘만 할 수 있다면 오늘의 환경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태주의는 이에 맞선다. 이들은 환경주의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는 현대 문명의 밑뿌리에 닿아 있다고 보아 그 뿌리의 문제와 씨름하고자 한다. 문제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리와 이익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인간 중심’의 생각 곧, 인간 바로 그 안에 문제가 있고 인간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그린’이니 ‘초록’이니 ‘녹색‘이니 하는 낱말을 쓰고자 하는 것은 환경주의와 구별되는 생태주의 노선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내세우는 가치는 어느 한두 항목으로 줄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가치는 자연 환경을 인간의 이익과 편리를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서로 기대는 공생의 생태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점이다.

강자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보살피고 돌보는 세상을 꿈꾼다는 뜻이다. 당연히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도 한다. 나아가,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 보는 통례의 생각을 넘어 서로 다른 빛깔과 값을 가진 생명체의 어우러진 다양성과 그 아름다운 조화를 그린다. 그렇게 볼 수 있는 미덕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참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한다. 삶의 터전에 함께 하는 모든 구성원이 공평하게 의사 결정에 참여하며, 그 결정은 먼 곳이 아니라 삶의 마당 바로 거기에서 내려져야 한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예속된 주변의 삶을 거부한다.  

III. 분권의 앞날:

생태주의는 분권의 뜻에 다만 동참한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분권의 앞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분권’이란 백 번 타당하지만 그 분권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깊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분권 운동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만큼 어떤 분권이며 어디를 향해 가는 분권인지에 대하여 함께 걱정하고자 한다. 바람직한 ‘분권의 모형’을 함께 짜고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는 소명감에서다.  

자칫 분권은 집중된 중앙의 권력과 자원을 나누어 갖자고 하는 데서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권력과 자원의 획득과 탈환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면 근본에서는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아무리 권력을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권력의 속성과 권력 행사의 방식을 그대로 두고 있다면 형식만 바뀔 뿐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이 아닌 지방 대도시로, 군이나 면 단위로 권력만 나눠 갖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일방으로 호령하는 권력 형태나 관이 주도하는 행정 관행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분권은 권력의 지방 이동이라는 ‘형식 분산’ 그 너머 삶의 수준에서 나누는 ‘실질 분산’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 구성원이 공평하고 편안하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의 보장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참여의 의무도 함께 질 수 있어야 한다.

앞서 1992년 리우회의 이후 범세계 수준에서 합의한 바를 지금 널리 이행코자 하는 이른바 ‘파트너십’이라 하는 ‘참여와 협력의 틀’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요 당사자 집단이 의사 결정에 정당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행정부서라고 해서 주요 사항을 독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방의 경정이나 호령으로는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모든 나라가 들어서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범세계 수준의 흐름이다. 앞으로 파트너십은 중앙이나 주요 도시의 수준에서 뿐 아니라 모든 행정 단위의 의사결정 수준으로 널리 확산되어 정착되어야 한다. 이 파트너심의 틀에 행정부서를 포함하여 모든 당사자 집단이 익숙해져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파트너십의 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알맹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역 주민과 행정 기관과 기업과 같은 주요 세력이 한통속이 되어 지금껏 우리나라가 맹렬히 추구해 온 이른바 ‘개발 경제주의’에 얽매여 있다면 설령 지방 분권을 이루었다 해도 거기에서 밝은 미래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치와 참여라는 미명 아래 생태계의 파괴를 더욱 간편하고 간소하게 정당화하여 집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희망 없는 분권이며 절망의 분권일 터이다.  

생태주의 운동 세력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분권과 분권 운동에 깊은 관심을 쏟고자 한다.

IV. 대안을:

분권 운동은 잘못된 삶의 방식을 뒤따라 복사하고 재생하는 데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지방 저 지방에서 서로 다투듯 골프장을 만들자며 열을 올리고 있는 마당에 최근 중앙 정부에서 ‘골프장 경기부양론’을 내놓자 더욱 야단법석을 떨고 있으니 말이다.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연 생태계도 깰 수 있다는 ‘파괴 욕구’를 풀어내어 어떤 절제함도 없이 중앙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개발권을 지방 정부가 마음대로 휘둘러댄다면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더욱 가속화될 수도 있다. 자연 생명에 반하고 생태계에 반하는 권력의 행사와 자원의 동원 방식이 분권 운동의 목표와 결과여서는 안 된다.

거추장스런 규제로부터 벗어난 ‘자유’는 지방 정부가 나서서 잘못된 중앙 정부의 정책을 바로 세우기 위한 보배로운 기회이며 동력이어야 한다. 생태계를 더 잘 지키고 더 잘 보살필 수 있다는 결연한 마음가짐에 터하고 있어야 할 그러한 자유여야 한다. 자유라는 이름 밑에 중앙에서 저질러 온 생태계 파괴 행위를 좇아 자연의 훼손을 일삼는 것은 분권의 이념과 가치를 더럽히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기에 분권은 생태주의와 만나고 만날 수밖에 없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오늘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 잘못된 가치 지향성을 면밀히 검토하여 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함께 그려보며 그 지평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여기 우리 모두 창의성을 끌어내야 할 요청을 받고 있다.
분권 운동은 자연 생태계를 훼손하고 파괴하더라도 지역 경제의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여전한 근시안의 시야에서 벗어나, ‘당대 이기주의’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깊은 지혜와 용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방분권 운동의 전제 조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방 분권 이후에 펼쳐질 ‘지방의 아름다움’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저 중앙 정권이 굳혀놓은 ‘칙칙한 도시’의 대안으로 ‘맑고 밝은 지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방 분권은 이러한 녹색의 희망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껏 모든 것을 한 잣대로 재어 이런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하여 거기에 따라 등급화해 놓은 저 답답한 획일화의 세상을 벗어나, 마을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이를 값지게 여기는 다양성의 세계도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 대규모의 개발 산업 없이는 결코 잘 살 수 ‘없다’는 비좁은 획일화의 믿음을 거부하고 ‘자기 절제’의 새로운 삶의 세계를 값지게 여기는 미덕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V. 권리에서 책임으로:

지방 분권은 중앙이 행사해 온 ‘잘못된 삶의 모형’을 본뜨려는 것이 아니다. 거대 성장주의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보람되고 당찬 길을 여는 일이다. 이 길에 들어서는 자들이 꾸미는 세상, 그것이 중앙 집중이 낳은 오류와 파괴의 획일화를 극복하고 멋과 아름다움의 다양성을 담아내는 덕스러운 삶의 공동체를 낳고야 말 것이다. 분권 이야기가 ‘권력 이야기’를 넘어 ‘책임 이야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박 영신(녹색연합 상임대표/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이 글은 지난 2004년 9월 21일 한국지방분권아카데미에서 “지방 분권과 환경 운동–생태주의로 보는 지방 분권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요지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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