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대물림, 체르노빌

2006.04.24 | 미분류

▲ 심재봉화백  

아버지가 한국전력공사 직원인 친구 H로부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봄날,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 H에게 비옷과 마스크를 입게 한 뒤 또다시 우산을 쓰도록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H는 놀림거리가 될 것이 두려워, 우산과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지금은 위험한 때라 꼭 써야한다’ 며 어린 아들을 채근했다. 그 때가 바로 체르노빌 사고 직후였다고 H는 기억하고 있었다. 월성 원전에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방사성 물질이 한국까지 날아올 것을 예측, 그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내 어린시절 기억을 되돌아볼 때, 그 누구로부터 어떠한 예방이나 주의를 받은 사실은 떠오르지 않았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체르노빌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찾아보았다. 당시 신문들은 뒤늦게 체르노빌 사고를 보도했으며, 방사능 낙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도 ‘내리는 비를 맞지 말고 빗물을 마시지 말라’는 형식적인 권고만 했을 뿐,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피해나 주의점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방사능 위험을 인식, 집회를 하기 위해 모였던 시민들이 방사능 낙진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일화만이 당시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약 8천Km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후 6~10일동안 한반도 상공은 체르노빌 사고에서 발생한 방사능 낙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실제로 체르노빌 사고 직후인 5월 5일경 국내 강수와 낙진에서도 방사능이 측정되었으며, 갑상선암을 유발시키는 요오드 131(I-131)이 서울, 충주 지역에서 검출되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빗물에서 방사능 낙진은 검출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는 별 피해가 없다’고 발표했고,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채소류와 우유에 대한 별도의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핵실험이나 원전 사고와 같은 방사능 재난 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방사성 요오드의 유입경로가 우유 섭취임을 인식할 때, 당시 정부가 얼마나 안일하게 대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외부로 방출된 방사능 낙진의 양은 일본 원폭 투하 당시 방출된 낙진보다 무려 200여배 정도 더 많다. 단 한 번의 원전 사고가 얼마나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지 체르노빌은 잘 말해주고 있다.

찬핵 입장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세계보건기구(WHO)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체르노빌 원전 주변국가인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러시아의 주민 중 갑상선암에 걸린 사람이 약 5천명에 달하며 수십 년간 새로운 암 환자가 발생할 것이라 예측했다. 또한 그동안 암 발병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9천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그린피스는 ‘IAEA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핵사고 파장을 속이려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며, 벨로루시 지역의 암 발생건수는 현재까지 약 27만 건, 그 가운데 9만여 명은 목숨이 위험한 상태라고 발표했다.

올해 4월 26일은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눈물 마를 새 없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자녀들이 또다시 고통의 대물림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방사능 이외의 특정 발병요인을 찾기 힘든 갑상선암 발병률이 매우 높으며, 특히 체르노빌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20~30대 여성들의 암 발병률 1위는 갑상선암이다. 체르노빌 사고 후유증이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닐지 모른다.  

위 글은 시민의신문 에서  ‘에너지’ 를 주제로 기획연재 되고있는  ‘이버들의 에너지, 에코리듬 타다’ 칼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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