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효과 없는 정부

2006.05.16 | 미분류

▲ 심재봉화백  

모처럼 만난 지인과 크게 다퉜다. 술집에서 켜놓은 텔레비전 때문이었다.

평택 문제를 다루던 뉴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일행 A는 시위대가 너무 폭력적이라며 정부를 두둔하고 나섰다. 5·18 광주항쟁을 연상시키는 군 병력 투입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자,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순간 그의 얼굴 위로 한나라당 정치인들 얼굴이, 국방부장관 얼굴이 오버랩됐다.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 다니고, 대학교 1학년 미팅 때 처음 만난 이와 9년째 연애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것을 빼앗겨 본 적이 없다.

치명적 아픔과 실패란 것을 겪어보지 않은 그는 화면 속 누군가에 대해 잘도 쉽게 품평하고 또 충고하고 있었다. 오만한 계몽적 태도로 자신과 다른 타인의 방식을 ‘바로 잡아’ 주려는 것이다. 그의 거만한 태도를 보며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실패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패 뒤에 찾아올 크나큰 절망과 자기모멸, 잠을 이룰 수 없어 뒤척여댈 밤들, 이마 한 가운데 깊게 팰 흉터, 더 다치지 않기 위해 짓게 될 냉소의 표정.

그런 것들에 대해 그는 알지 못한다. 아니, 그런 아픔과 슬픔이 다가와도,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뻔뻔하게 자신의 삶을 즐길지 모른다. 지금의 참여정부와 한나라당, 보수언론들이 그러하듯이.

1년 전 평택 대추리에 갔다. 마을 어귀에 붙어있는 현수막 문구가 마음을 짓눌렀다. ‘제 2의 부안으로 만들지 말라’는 절규였다. ‘부안’이란 단어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이미 잊혀졌겠지만 부안의 아픔과 평택의 눈물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소위 가진 자들이 다수의 행복이라는 명분으로 휘둘러대는 칼날에 주민들은 상처 입고 눈물짓는다.

그들이 써먹는 방법은 언제나 비슷하다. 국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며 이에 대항하는 이들을 ‘님비’라고 규정짓는 일부터 시작한다.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공권력 투입은 불가피하며 평화시위는 보장하지만 불법적인 폭력시위는 금지한다고 명명한다.

이렇게 대의명분을 구축한 뒤, 토끼몰이식 강경진압으로 주민들을 옭아맨다. 주민들의 항의가 극에 달할수록, 폭도의 이미지는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인식된다. 비무장인 주민들의 피해가 훨씬 클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인데도, 공권력의 피해 규모만 확대되어 언론에 보도된다.

공권력의 과잉진압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두 가지 사안을 쟁점화 시킨다. 우선 외부개입설이다. 주민들의 동요나 항의는 크지 않은데 시민단체들이 부추기고 선동한다는 것이다. 또한 보상금을 둘러싼 돈 문제로 반대운동을 평가절하 한다. 보상액수가 적어 주민들이 반대하는 것이라며, 돈 밝히는 주민들이 국책사업 발목을 잡고 있다고 힐난한다.

얼마 전 감사원은 핵폐기장 사업추진 체계는 물론이고 선정방식, 재원관리 등 정부 정책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한다고 발표했다. 핵폐기장 추진을 위해 1986년부터 2004년까지 3천485억원이라는 혈세를 쏟아 부었지만, 남은 것은 정부와 원전사업자에 대한 불신과 심화된 갈등뿐이다.

지금의 형국으로 보아, 평택도 같은 평가를 받게 될 것 같다. 그 기간동안 많은 이들의 마음은 절절한 아픔과 고통으로 메워질 것이다. 학습효과 전혀 없는 정부, 치명적인 아픔과 실패가 더 필요한 것인가.

위 글은  시민의 신문 에서  ‘에너지’ 를 주제로,  연재기획 되고있는 ‘이버들의 에너지, 에코리듬 타다’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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