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에 맞서는 ‘힘없는 자들의 힘’

2006.08.31 | 미분류

솔직히 시인한다. 녹색연합이 영화 ‘괴물’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해서 시간 내어 영화관을 찾았다. 감독이 된 봉준호 군의 안목과 재능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영화관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는 데 우선 놀랐다. 그것도 젊은층뿐만 아니라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도 적잖이 끼어있었기에. 흥미롭게 보았다. 영화로서의 기술과 작품의 완성도도 돋보였다. 불필요한 비속어는 언제쯤 품격 있는 영화에서 사라질 것인지, 이를 데 없이 마음이 불편하고 거북했으나.

이 영화를 두고 여러 풀이가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가족 영화에다 반미 영화라는 말까지. 그 가운데 나는 김혜애 실장과 김제남 처장의 ‘녹색 사람다운’ 생각에 가까이 가있다. 다른 어떤 평보다 그들의 안목에서 많을 것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의 작은 생각 한 토막을 덧붙여보면 어떨까 하여 몇 자 적어본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의 생각이 매우 사회과학도답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이른바 전문 기술을 가지고 거대한 조직 안에 들어가 그 조직을 위해서 일하는 각양 기능인들이란 우쭐거리는 체제 관리자들이다. 은밀한 가운데 거짓을 획책하곤 하는 체제 수호의 시녀들이다. 그들에게는 난데없이 나타난 ‘괴물’과 맞서 싸울 열정과 헌신이란 없다.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난감해 하기만 한다. 그 괴물에 감연히 맞서 집요하게 끝장을 보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체제 한 가운데 들어서 있는 기능인들이 아니다. 거드름 피우며 요란을 떠는 자들도 아니며 거짓을 일삼는 간교한 자들도 아니다. 사회에서 별 볼일 없다며 따돌림 받는 힘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힘이 없다고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하찮은 사람들이라고 낮춰본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생명을 위하여, 그 생명을 앗아가는 괴물에 맞서고자 했을 따름이다. 무모할 정도로. 이들은 권력자의 명령에 순종만 하는 매끄러운 체제의 하수인들과는 달랐다. 눈가림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자기의 지위를 지켜가고자 하는 비열한 짓거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사회에서 평가받지 못하는 힘없는 자들, 비굴하게 살고자 하지 않았다. 힘없다고 그 거대한 괴물 앞에 덜썩 주저앉지 않는다. 차라리 그 괴물과 대결코자 한다. 투사였다. 마침내 괴물을 무찌르고야 만다. 힘없는 자들의 힘, 그 힘을 증언한 셈이다. 딸을 구하고자 한 뜻이 생명 그것을 위한 싸움으로 커져갔던 것이다. 영화 ‘괴물’은 이들 힘없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생명 의식은 색다르다. 그들이 그렇게도 구하려던 딸의 생명은 잃어버린다. 슬픈 결말이라며 모두들 안타까워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출 것은 아니다. 생명은 딸에게만 있지 않다. 떠돌이 남자 아이의 생명도 생명인 것이다. 피붙이의 생명에만 파묻혀 이웃한 생명의 귀함을 잊고 사는 좁다란 삶의 세계에, 영화 ‘괴물’의 작가는 질문하고 또 도전한다. 관심의 폭이 자기 집안 식구의 안위에 갇혀 있는 비좁은 의식의 세계를 벗어나 생명 일반으로 나아가는 넓은 의식 세계, 이것을 새로운 삶의 모형으로 영상화한다.

힘없는 자들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시민들의 힘, 영화 ‘괴물’이 던지는 생명의 힘이다. 이 영화는 그러므로 비좁은 가족 영화의 테두리도 벗어나며 규격화된 반미 의식의 틀도 돌파한다. 힘없는 자들이 일궈가는 끈질기고 아름다운 삶, 영화 ‘괴물’이 녹여내고 있는 주제이다. 거들먹거리며 젠체하는 자들이 감히 맞설 수도 없고 맞설 뜻도 없는 그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 굽히지 않고 싸우는 힘없는 자들의 힘, 영화 ‘괴물’의 힘이다.  (2006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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