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지구, 뜨뜻미지근한 한국

2008.01.24 | 미분류

한쪽 발은 석유에 다른쪽 발은 원자력에 담그고 자율 감축

2007년 12월15일, 발리 13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장. 2주 동안 계속된 릴레이 회의에 대표단도 지쳤다. 회의장 안팎으로 회의를 지켜보는 눈도 많은데, 미국은 “자발적 감축”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발리 로드맵 초안 채택을 거부하고 있다. 참다못한 파푸아뉴기니 케빈 콘래드 대표가 “미국이 이번 회의에서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을 거면 협상에서 빠져라”고 외쳤다.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환경운동가들이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발리 13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장 바깥에 설치해놓은 대형 조형물.

발리 로드맵, 너무나 미약한 결과

그보다 이틀 앞서 앨 고어 전 미 부통령도 같은 소리를 했다. 두 번째로 ‘미국 빼고 하자’는 발언이 나오자 끝까지 버티던 미국도 결국 ‘포스트 교토체제’에 참가하기로 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파푸아뉴기니는 투발루·몰디브·키리바시공화국과 더불어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물에 잠기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나라 대표의 분노에 미국도 더는 버티지 못했던 게다.

교토의정서에 따라 36개 선진국은 2012년까지 1990년 대비 평균 5.2%의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 발리 회의는 교토의정서에 따른 의무감축 기간이 끝나는 2012년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자리였다. 온실가스 의무감축을 명시한 교토의정서 체제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와 선진국이 얼마만큼의 의무 감축량을 설정할 것인지, 또 개발도상국이 온실가스 의무감축에 참여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산고 끝에 ‘발리 로드맵’이 탄생했다. 선진국과 개도국이 모두 협상에 참가해 2009년까지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 협약을 마련하기로 했다. 성과라고 한다면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한 미국이 ‘포스트 교토체제’에 참여한다는 것과 중국·인도·브라질·한국 등 개도국을 참여시키기 위한 협상틀을 마련한 것이 꼽힐 수 있다.

그러나 지구의 벗, 그린피스, 세계야생생물기금(WWF) 같은 세계적인 환경단체들은 “뜨거워지는 지구의 미래를 돌려세우기엔 너무나 미약한 협상 결과”라고 비판했다. 발리 회의에서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 “선진국은 1990년 기준으로 2020년까지 온실가스를 25∼40% 감축하는 것을 고려한다”라는 문구를 합의문에 넣자고 주장했지만, 미국이 “자율 감축”을 주장하면서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IPCC는 보고서에서 “오는 2050년까지 2000년 대비 50∼85%의 온실가스를 감축하지 않으면 지구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협상 초반 언론은 이번 회의에서 미국이 ‘외톨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일본과 캐나다라는 ‘친구’들이 나타났다. 일본은 자국 산업보호를 이유로 유럽연합의 온실가스 감축 제안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오일샌드’ 산업이 번창하면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뿜어대는 캐나다도 의무감축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브라질과 중국은 기술 이전을 전제로 ‘포스트 교토체제’ 참여에 뜻밖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발리 회의가 끝나고 일부 언론은 “한국이 2013년부터 의무감축 국가가 된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옳지 않다. 우리나라가 의무감축 국가군인 ‘부속서I 국가’에 들어가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적이 없고, 발리 로드맵을 통해 개도국 모두가 “측정 가능한 감축 목표”를 “자발적으로 감축하는 방향으로” 협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확정된 것은 향후 2년간 선진국과 개도국이 협상을 나눠서 진행하면서 구체적인 감축량 산정 방식과 감축 목표, 감축 방법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경부운하가 온실가스 감축 대책?

그렇다면 앞으로 협상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유엔 프로세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기후변화 체제 간의 대결구도가 예상된다. 유엔 프로세스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가별 감축 목표 설정과 의무부담 등을 통한 적극적인 감축 활동을 추구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주요국 회의’(한국 등 17개국)는 구속력 없는 감축 목표 설정과 자발적인 감축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 정부의 방침은 “미국·중국·인도 등 온실가스 대량 배출 국가들의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적극적인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 쪽에 줄을 서겠다는 말이다.



△ 2007년 12월3~1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13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에서
각국 참가단이 온실가스 감축 문제를 두고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다.
미국 등의 완강한 반대로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온실가스 배출량 6위, 배출량 증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에너지 부문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은 4억4800만t으로 세계 10위이며, 누적 배출량으로도 세계 23위다. 포스트 교토체제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면서 국제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지표가 선진국인데, 언제까지 개도국 행세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관련 전문가와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발리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 정부는 12월11일 서둘러 기후변화 제4차 종합대책 공청회를 개최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17일 이를 확정·발표했다. 4차 대책은 향후 5년 동안의 우리나라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담고 있다. 우리 정부가 제시한 4차 대책의 뼈대는 ‘원자력 비중 확대’에 있다. 원자력을 ‘온실가스 배출이 거의 없는 에너지원’으로 규정하고 국가전략 차원에서 ‘확대’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발리 회의에서 일본이 원자력에너지를 청정개발체계(CDM) 사업으로 인정해줄 것을 주장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나서 “원전 건설 및 운영을 추가적인 온실가스 감축분으로 인정해줄 것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원자력발전은 치명적 사고위험, 방사성 폐기물이 갖는 불확실성 등을 고려할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이다. 우리는 아직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다. 현재 공청회를 통해 최종 여론수렴 단계에 있는 국가에너지기본계획(2008~2030)은 2030년까지 현재 3.2%인 ‘자주개발률’을 40%까지 끌어올려, 국내 석유 수입량의 40%를 해외 자원개발을 통해 충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12월17일 국민연금관리공단은 2008년부터 향후 10년간 총 20조원을 석유공사 등 자원개발 공기업과 공동으로 석유·가스·광물 개발사업에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20조원이면 전체 국민연금 224조의 10%에 이르는 금액이다. 국민연금이 해외자원 개발사업 투자를 검토한 것은 2007년 8월 산업자원부가 ‘제3차 해외자원개발 기본계획’을 발표한 이후부터다. 산업자원부가 정부 개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재원으로 국민연금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끝나가는 석유시대의 끝자락을 붙잡고, 국민의 미래를 담보 삼아 화석연료 개발에 투자하려는 것이다.

정부는 기후변화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하면서 한쪽 발은 원자력에, 다른 쪽 발은 석유에 깊숙이 담그고 있다. 협상은 ‘묻어가기’ 전략으로, 국내 대응은 ‘원자력’과 ‘석유’에 더욱 의존하는 최악의 구도인 게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들어설 새로운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 대책의 하나로 생뚱맞게 경부운하 건설을 제시하고 있다. 유류세도 10%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기후변화는 협약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삶이다. 지난여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퍼부은 비로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은 맥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폭염은 땡볕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다. 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2007년 10월24일 유럽의회는 차량의 이산화탄소 배출 한도를 2015년부터 km당 125g, 2020년부터는 95g으로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자동차 업계는 당장 영향을 받는다. 에너지 소비가 많은 산업인 석탄·정유·발전·화학 산업, 시멘트·자동차 관련 산업과 그 업계 노동자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준비가 안 된 중소기업들은 선진국의 준비된 기업들과의 경쟁에 힘겨워할 것이다.

더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하루빨리 우리 사회를 ‘저탄소 사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 정책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화석에너지를 적게 쓰고, 산업 분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일대 전환을 이뤄야 한다. 정부의 4차 대책에서도 온실가스 국가감축 목표량은 확정되지 않았다. 2008년 안에 감축 목표를 제시한다고 밝혔지만, 기후변화 협상의 추이를 보면서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차일피일 감축 목표 설정을 미루다 보면 본격적인 기후변화 대응 준비도 늦어지고, 급기야 우리 발등을 찍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1월 말 미국이 주도하는 배출국 회의가 하와이에서 열리고, 3월부터 공식적인 기후변화 협상 회의가 시작된다. 우리와 지구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향후 2년은 너무나 중요하다. 세계적인 기후변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국내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 더 이상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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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두 개가 돼버렸답니다”

바닷물 차오르는 남태평양 카트레츠 출신 우르술라 라코바의 증언


△ 우르술라 라코바씨

발리 기후변화협약당사국 총회장에서 우르술라 라코바(43)를 만났다. 그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카트레츠 출신이다. 600가구 3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카트레츠에선 기후변화가 몰고 온 파국의 징후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카트레츠라는 섬에 대해 처음 들어봤을 텐데요. 남태평양 부건빌(파퓨아뉴기니령)에 속하는 6개의 작은 섬을 통칭해 카트레츠라고 합니다. 몇 해 전 섬이 하나 더 생겨서 지금은 7개가 됐어요. 두 개의 봉우리로 연결돼 있던 섬 중간에 바닷물이 차올라 하나였던 섬이 2개가 돼버렸답니다.”

라코바는 “이미 20년 전부터 섬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해 농사를 전혀 지을 수 없게 됐다”며 “주민은 짜서 마실 수 없는 물 대신 코코넛을 마신다”고 말했다. “지난 43년 동안 단 한 번도 섬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라코바는 “아침에 코코넛 나무가 해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지난 20년간 제방도 쌓아봤지만, 무심한 파도는 늘 제방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단다.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봤다.

“카트레츠에는 차가 몇 대나 있어요?”

“차, 없어요. 우리 섬에서 차를 몰면 쭉 가다가 바다에서 산호초를 들이받을걸요.”

“그럼 전기는?”

“전기도 없어요.”

“어, 그럼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겠네요.”

“없어요.”

“다른 섬이랑 연락은 어떻게 해요?”

“카누 타고 가지요.”

“이렇게 회의에 참가하려면, 당신한테 연락을 해야 하잖아요.”

“아, 부건빌 옆에 카트레츠보다 좀더 큰 섬이 있어요. 그 섬이랑 태양광 무전기로 교신을 해요.”

불어나는 물, 낮아지기만 하는 해수면, 섬 주민 모두 부건빌로 이주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 주민 3천 명이 모두 부건빌로 이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우리 돈으로 55억원 정도가 필요하단다. 강남 아파트 몇 채면 수장당하기 직전인 이 작은 섬 주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라코바는 이번 회의에서 “기후변화의 피해자들이 직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회의 결과를 보면, 안타깝게도 카트레츠 같은 ‘위기의 땅’이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발리(인도네시아)=글·사진 이유진 녹색연합 에너지·기후변화 팀장 leeyj@green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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