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보트에서 웬 회의? 헤엄쳐야지, 헤엄!”

2008.12.16 | 미분류

“구멍난 보트에서 웬 회의? 헤엄쳐야지, 헤엄!”
[14차 폴란드 기후변화당사국총회] 한국사회기후변화포럼을 준비하자


석탄 연기 자욱한 포즈난의 거리는 온통 회색빛이다. 총회 개최국인 폴란드는 전력의 94%를 석탄으로 생산한다. 10일째 진전이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펭귄 옷 입고 이러는 것도 정말 지겨워! 그런데 이러질 않으면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질 않으니 말이야.” 펭귄, 북극곰, 분장 제발 그만하고 싶다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청년들의 퍼포먼스에 웃음이 난다. 위기의 지구에서 어른들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 되는지 전 세계에서 참여한 200명의 청년들은 잠도 안자고 활동한다.

이렇게 다들 모여 난리를 치는 이유는 하나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2013년부터 어떻게 할 건데?”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회의장에서는 지금 당장 기후 변화 대응을 안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5년 뒤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일단 계획을 세우는 마감시한은 내년 덴마크 코펜하겐회의로 잡았다. 12개월 남았다. 학생들이 시험 하루전날 벼락치기하고, 기자들이 마감시간 꼴딱꼴딱 넘겨가며 기사 송고 하듯이 올해 포즈난 회의에서는 다들 ‘변죽’만 울렸다. 모든 결정은 코펜하겐회의로 미뤄졌다. 게다가 포즈난의 시선은 지난 11~12일 열린 유럽정상회담과 내년 미국 워싱턴에서 불어올 ‘오바마 효과’에 쏠려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포즈난 회의 각국 대표들은 기후 변화를 둘러싼 과학적 진실을 ‘협상’ 무대에서 존중하지 않았고, NGO들이 외치는 ‘기후정의’의 목소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외면당하는 과학적 진실

회의 기간 국제자연보호연맹(IUCN)은 전 세계 산호의 5분의 1이 이미 사라졌으며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향후 20~40년 안에 산호 대부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세계적인 기후변화연구기관인 틴달연구소의 앤더슨 박사는 한술 더 떠, “대기 중 탄소 농도는 IPCC나 스턴보고서의 우울한 시나리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미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서 인류는 패배했으며, 아주 나쁜 상황이 벌어질 것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650ppm 이하로 안정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현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80ppm이며, 산업화이전은 280ppm이다. 매년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2ppm씩 증가하고 있으며, UN에서 논의되는 세계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안정화 목표는 450ppm이다. 12일 회의 마지막 날, ‘열정적인 기후 변화 전도사’ 엘 고어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인류의 목표는 350ppm에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보다 30ppm을 더 줄이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치가 아니냐는 의아함에 엘 고어는 “과학적 진실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협상의 진실 : “진짜 협상은 내년으로”

그러나 회의장에서는 말 그대로의 ‘협상’이 벌어진다. 192개 나라가 저마다 패를 들고, 서로의 의중을 탐색했다. 선진국은 배출량이 급증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온실가스 감축 참여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1990년에서 2004년까지 세계 온실가스 배출 순위는 EU, 미국, 러시아, 일본, 캐나다 순이다. 선진국의 역할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옥스팜은 만약에 모든 나라가 중국의 1인당 온실가스 배출 수준으로 맞추면(1인당 4톤), 세계는 1990년 대비 30%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기후 변화 협상을 주도하던 EU는 한풀 꺾였다. 12일 브뤼셀에서 끝난 EU 27개국 정상회의에서 EU는 2020년까지 유럽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20% 감축하고, 재생 에너지 비중을 20%로 늘리며, 에너지 사용량을 20% 줄이는 ‘EU 기후변화ㆍ에너지 패키지(20-20-20)’에 합의했다. 1990년 대비 20% 감축이라는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세부 내용이 문제이다. 27개국은 각국의 감축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산업이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상한선을 정하고 초과배출하면 유럽탄소거래시스템(EU ETS)에서 배출권을 구매해 온실가스를 줄인다. 2013년부터 산업계와 발전소는 의무적으로 탄소배출권을 구매해야만 한다.

하지만 독일 메르켈 총리의 주장으로 철강, 시멘트 산업과 동유럽 석탄화력발전소는 의무에서 제외되거나 할인받게 되었다. 절대적인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에너지 다소비 기업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준 셈이다. 산업계가 사활을 걸고 로비한 결과이다. 재생 에너지 산업과 녹색 일자리 창출을 주도해온 독일의 변화는 한국의 산업계에도 ‘잘못된 신호’를 줄 위험이 크다. 독일의 태도 변화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공은 미국에 넘겨졌다. 이번 회의에서는 확실히 기후 변화 협상의 독불장군 ‘미국’에 대한 성토가 줄어들었다. 버락 오바마가 이끌 미국의 기후변화 정책을 일단은 기다려보자는 심산이다. 오바마는 코펜하겐에서의 “열정적인 활동”을 약속했다. 미국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개도국을 압박하면, 코펜하겐에서 논의는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당분간은 다들 ‘오바마’ 행정부의 움직임만 쳐다보고 있게 생겼다.

기후정의는 어디에?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최선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설정하는 것만큼이나 어떻게 그 목표치를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수단도 중요하다. 인간으로써 국가로써 생존하고 싶다는 투발루 환경부 장관의 외침처럼,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최빈국에 대한 지원은 확대되어야 한다. 이번회의에서 빈곤국들을 위한 지원 자금을 현재 8000만 달러에서 2012년까지 3억 달러로 늘린다는데 합의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날로 커가는 탄소시장에 대한 보완책도 시급하다. EU가 감축해야 할 온실가스를 EU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줄인 배출권을 사서 충당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면, 선진국이 결국은 ‘낮은 가지의 열린 열매’를 손쉽게 따간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체적으로도 온실가스는 줄어들지 않는다. 중국, 인도, 한국에 집중되어 있는 CDM시장도 손봐야 한다. 열대림을 보전하는 산림전용 방지에 대한 인센티브를 시장메커니즘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도 막아야 한다. 기후변화를 틈타 부활을 노리는 원자력대안론이나 탄소포집저장기술을 CDM에 포함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여성, 어린이, 원주민, 농민, 어민, 노동자 등 기후변화에 취약한 계층이 받게 될 영향을 최소화하고 준비하는 것도 시급하다. 그래서 NGO들의 구호는 “기후정의”이다. 다만 이들이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든든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원주민들이 숲을 지켜온 것은 대규모 벌목회사들이 한 짓보다는 훨씬 기후친화적이며, 농민들이 논을 지켜온 것도 이산화탄소 흡수원으로 작동하는 것들이다.

기후변화 대응으로 영향을 받게 될 산업계 노동자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국제노총은 “국제노총은 기본적으로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노동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기후변화도 막을 수 없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기후변화 대응 정책이 고용 문제와 맞물러 있는 만큼 노동자의 동의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

과학자들이 경고하는 ‘기후 변화’의 파국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는 ‘협상’을 통해 대안을 도출해야 한다. 그 대안에는 NGO들이 주장하는 ‘정의로움’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의 균형이 매우 중요하다.

당사국들은 내년 3월, 6월, 8월 또는 9월, 이렇게 세 차례 독일 본에서 준비회의를 연다. 빠르면 6월, 늦어도 9월이면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 협약 초안이 나오게 된다. 지금까지 합의된 최소한의 감축 목표치는 발리회의에 따라 선진국들이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25~40%를 줄이는 것이다. 개도국 참여 여부는 아직 안개속이다. EU와 미국의 의지에 따라서, 또 이번회의에서 ‘협상의 적들’로 손꼽힌 캐나다, 일본, 호주, 러시아의 입장에 따라 초안은 달라진다. 중국과 인도도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다.

세계 금융 위기의 진행 상황과 미국 상원의 움직임도 살펴야 한다. 협상 도중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기상재해와 자연현상이 우리를 또 충격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2009년 기후변화를 위한 인류의 대응은 그 어느 해보다 드라마틱할 것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발언에 따르면 내년 회의는 환경부장관급이 아니라 정상급회의로 격상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 사회에 남겨진 과제 : “한국기후변화포럼을 준비하자”

한국 정부도 바빠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리무버’를 선언했고, 2009년 한국은 2020년 대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겠노라고 전 세계에 공언했다. 정부는 온실가스 배출 10위, 누적배출량 28위라는 역사적 책임에 알맞게, 국제사회가 인정할 만한 감축 목표를 제시하면서도, 국내적으로도 실행력을 담보할 수 있는 목표치를 도출해내야 한다. 현재의 자연증가분 대비(BAU) 감축 목표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한국 대표단은 한국이 “기후변화협상에서 개도국과 선진국을 잇는 ‘다리’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OECD국가이면서 의무감축대상이 아닌 한국의 경우, 협상 분위기에 따라 “능력에 맞는 자발적 감축” 주장이 씨알도 안 먹힐 수도 있다.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선진국과 개도국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될지 잘 생각해야 한다. 물론 한국의 NGO들도 한국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핵 발전’ 정책에 ‘올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낼 필요가 있다.

이제 움직여야 할 곳은 정부만이 아니다. 노동자도, 농민도, 여성도, 청년도, 시민사회도 그만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감축할 온실가스 목표치에 대해 논의해야 하고,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환경운동의 잘못 때문인지 현재 한국사회에서 ‘풀뿌리 차원’의 기후변화대응 논의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다. 개인만이 아니라 기후변화가 우리 사회와 내가 속한 집단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논의하고 준비해야 한다. 에너지 다소비 산업 구조와 핵 발전 의존도, 석유 고갈과 같은 기후 변화와 연관된 의제에 대해서도 논쟁하고 토론해야 한다.

2009년 5~6월쯤, ‘한국기후변화포럼’을 열어서 수많은 기후변화 의제를 풀어내는 장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위기에서 우리는 모두 ‘당사자’이며,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개입만이 우리를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다. 내년에 열릴 기후변화당사국 총회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동에 나서야 한다.



“헤엄치는 수밖에 없어, 그럼 헤엄쳐야지, 어쩌겠어?”

국제적인 환경단체 ‘지구의 벗’을 이끌어온 리카르도 나바로는 국제사회 환경정책에 대해 그동안 많은 영향력을 미쳐왔으며, 한국사회의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회의장에서 그를 만났다.

– 분위기 어때요?
“기후변화 때문에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이 정도로 되겠어?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지금 450ppm, 550ppm 뭐 이산화탄소 농도 가지고 숫자놀음 하고 있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지. 지금 각국 대표들은 의사란 말이야. 지구라는 환자가 실려 왔는데, 처방을 내려야지. 처방은 이미 나왔어. 사람들도 다 안단 말이지. 약을 5밀리그램을 급히 투여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라곤 1밀리그램을 주사를 놓을지, 아니면 1.5밀리그램 주사를 놓을지 토론하고 있단 말이야. 처방이 5밀리그램이면, 5밀리그램 주사를 놓아야지. 안 그러면 사람이 죽잖아. 지금도 기후변화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 분위기로 봐서는 아무리해도 5밀리그램 주사를 놓을 것 같진 않은데, 어때요?
“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가 구명보트를 타고 있는데, 보트에 구멍이 났어. 보트가 가라앉기 시작했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해? 살려면? 헤엄쳐야지 헤엄. 지금 당장 헤엄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순간인데, 해야 한다면 해야지. 죽을 정도의 위기인데 보트타고 거기서 회의하고 있겠어? 벌써 기후변화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 앞으로 어떻게 해야죠? 지금 분위기는 그래도 우울한데
남아공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아파라트헤이트’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종식되었잖아. 기후변화도 같아. 우리가 계속 외쳐야지. 언젠가는 무슨 수가 나게 돼있어. 지금 뭐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도 긍정적인 변화야. 적어도 부시처럼 기후변화총회에서 ‘깽판’은 안 놓잖아. 내년이 정말 중요해.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해.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