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희망 / 미래세대 신탁소송

2001.10.22 | 미분류

게시일 : 2000/07/07 (금) PM 06:13:02 조회 : 304

미래세대 신탁소송

전재경 /한국법제연구원 법사회학·환경법 팀장. 생명회의 유사

영월 동강의 비경과 생태계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강 유역에 나무를 심어놓고 보상을 바라는 주민들의 것일까? 보상과 무관한 댐 예정지 아래 지역 주민들의 것일까? 전원향유권(countryside rights)을 내세운다면 동강의 자연환경은 강유역 주민들의 것이지만 자연자원에 대한 추상적인 권리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강조한다면 동강유역은 전국민들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수도권 주민들이 그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영월댐을 건설하자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생명권은 다른 자유와 권리에 우선하기 때문에 긴급피난의 원리에 따라 ‘생명의 안전’을 이유로 댐 건설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하여서는 댐 건설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야 한다.
새만금 간척사업도 현세대의 이익을 중심으로 보상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세주의·이기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현재세대로서의 인간은 지구의 유일한 생물종도 아니고 최후의 주민도 아니다. 현재세대의 인간은 다른 종과 경쟁하면서 자기 종을 번식시키고 인류 역사의 맥을 잇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현재세대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자연자원을 다 이용할 수 없다. 고대 인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이 대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가 인간을 살린다. 대지와 같은 자연생태계는 앞으로 태어날 미래세대의 것이다. 현재세대는 미래세대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연자원을 최소한으로 이용하다가 원상회복시켜 놓고 이 땅을 떠날 의무가 있다.
오늘날 국제환경법상의 원리로 확립된 ‘지속가능한 개발’은 바로 “미래세대의 수요를 해치지 아니하는 범위내에서 현재세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것”을 요체로 한다. 바꾸어 말해 대규모 공사를 단행하려는 어른들은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 청소년들은 다시 장래에 태어날 자기자녀들의 입장에 서서 답하여야 한다. 땅이 좋다고 하여 모든 갯벌을 다 매립하고 물이 중요하다고 하여 모든 강 유역을 댐으로 디자인한다면, 그것도 한시적인 방법으로 위험성을 안고서 건설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미래세대의 몫을 가로채고 있다.
미국의 공공신탁 이론(public trust doctrine)은 현재 세대 상호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현세대가 사용하는 자원은 현재 세대만의 재산이 아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여 이를 전부 소비할 수 없다. 아무런 노력 없이 물려받은 재산을 다 탕진할 자격이 없다. 현세대가 향유하고 있는 환경자원은 미래의 세대들도 이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현세대가 지구의 ‘마지막 주인’이 아니라면 현세대는 자원의 일정 부분을 보전하여 미래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자원은 현세대와 미래 세대가 공유하는 것이다. 자원의 계승보전은 현세대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이다. 공유재산에는 일정한 지분이 존재하듯이 환경자원에도 현세대가 사용가능한 한도가 있다. 이 한도를 초과하여 사용하거나 처분하면 불법이다.
고대 인도인들의 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공유’ 관념을 벗어나 ‘신탁’으로 나아간다. 인도인들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대지를 소유하지 않고 대지가 인간을 소유한다···대지는 만물의 혼이다···대지의 파괴는 만물의 혼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자연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손으로부터 보관받은 것이다”는 등의 불문률이 전승된다. 상속받은 재산은 자신의 소유이므로 파괴할 수도 있지만 자손들의 재산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자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최근 점차 강조되고 있는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의 이념과 조화를 이룬다. 즉 환경은 일단 파괴되면 재생불능이기 때문에 환경의 재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과 같은 개발은 삼가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중단시비가 그치지 않는 새만금지구나 영월댐등을 둘러싼 찬반양론이 비등하고 건설교통부와 환경부의 논리가 승패를 가늠하지 못하며 지역주민들도 입장이 갈리고 생명권과 환경권이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대책이 없다고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다. 조상들에게 물을 일이 아니라 미래세대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영월댐을 건설하여도 좋은가를. 이 때의 미래세대는 동강유역의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전국의 어린이들을 포함하며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미지의 생명들까지 포함한다. 경우에 따라 미래세대로부터의 신탁이론을 비현실적이라고 매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먼저 지속가능한 개발론을 침묵시켜야 한다.
영국의 경우 토지의 소유자 또는 점유자와 자연보호위원회(NCC) 사이에는 관리협정(Management Arrangement)이 체결될 수 있다. 관리협정의 통상적인 기초는 아직 발생하지는 아니하였지만 잠재적으로 손해가 야기될 수 있는 활동으로 인하여 빚어질 ‘이익상실'(lost profits)이다. 협정의 위반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지청구(injunction)를 구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며 어떠한 행위에 대하여서도 계약위반을 이유로 민사소송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 1993년 필리핀의 청소년들이 미래세대신탁이론에 힘입어 소송을 제기하여 생태계 보전지역들에 대한 개발계획들을 철회시킨 사례들은 자연환경보전을 둘러싼 분쟁해결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남의 물건을 맡아 있던 사람이 그대로 달아나면 횡령이다. 마찬가지로 환경자원의 남용은 횡령이다. 현세대는 지구상의 마지막 세대가 아니라 과객이다. 현세대는 미래 세대와 환경자원을 공유하거나 아니면 미래 세대의 재산을 보관할 뿐이다. 따라서 현세대가 이를 임의로 사용·처분하면 공유관계의 침해 내지 신탁관계의 파괴로서 횡령이나 배임에 해당한다. 공동소유자나 신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자기의 이익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법률문화는 개인재산의 횡령과 이데올로기 범죄에 대하여서는 무겁게 처벌하면서 공공재산의 횡령·배임 세대간 협력의무에 대하여서는 무심하다. 환경자원은 공공재산이다. 환경자원의 남용 역시 장래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이를 남용하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여야 한다.
개발사업과 관련된 재산상 피해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서도 시간적 한계가 설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갯벌을 매립할 경우 역내 주민들이 받는 보상금은 자손만대 계속될 수 있는 무기한 보상이 될 수 없다. 현재의 역내 주민에게는 당해 자연자원을 영구적으로 처분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개발이익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자연자원의 손상이 계속되는 한 다음 세대들도 이를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따라서 개발피해 대한 보상은 당연히 세대단위 보상이 되어야 한다. 즉 보상의 유효기간은 짧게는 30년 길어도 50년을 초과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99년 5월호 녹색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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