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 그 세번째 이야기

2001.07.19 | 미분류

백두대간 종주 그 세번째 이야기

백두대간 종주 이야기도 이제 세번째 마당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가지 죄송스러운 것은 그동안 사진에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전달받다보니 사진과 본문이 제대로 맞지 않았던 실수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이야기에 실려야 할 사진이 벌써 첫번째 이야기에 올라가기도 하고요. 이번 이야기부터는 가능한 사진에 설명을 붙여 제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용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일시 : 2001. 6. 20 ∼ 6. 22 / 구간 : 늘재 ∼ 블란티재 ∼ 은치재 ∼ 이화령
•일시 : 2001. 6. 23 ∼ 6. 24 / 구간 : 이화령 ∼ 조령 / 조령산 자연휴양림
•일시 : 2001. 6. 25 ∼ 6. 27 / 구간 : 조령 ∼ 하늘재 ∼ 차갓재 ∼ 벌재
•일시 : 2001. 6. 28 ∼ 7. 1 / 구간 : 벌재 ∼ 죽령 ∼ 주목관리초소 ∼ 고치재 / 고칫재 민박

△ 6월 20일 늘재에서 블란티재까지

05:30 기상
비도 그쳤다. 며칠 동안의 휴식을 뒤로 하고, 운행 준비에 바쁘다. 이명학 님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청화산 오르는 길
청화산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대원들 모두 땀을 흠뻑 흘리며 힘들게 오른다. 그나마 구름 걷힌 사이로 가끔씩 보이는 산들의 파노라마와 빗물을 가득 머금은 진초록의 숲이 위안이다.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도 메마른 숲에서 불어오던 바람과 다르다. 가물 때 불던 바람은 잠시 시원함을 느낄 뿐 마른 느낌이다. 하지만 물을 머금은 숲의 바람은 시원함을 서늘하기까지 하다.

선희 씨의 웃음
오르는 길과는 달리 청화산 내려오는 길은 바위마다 주위 조망이 그만이다. 저 건너 조항산 정상 주변 암릉이 늠름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모습이 더 아름답다. 바위들이 조항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 불끈불끈 치솟아 있다. 쉬면서 주위 조망도 하려는데 정희 씨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앞서 갔다는 대원도 있고, 뒤에서 쫓아오고 있을 것이라도 대원도 있다. 다음 조망 좋은 곳에서 눈요기도 하고, 정희 씨도 기다리자며 조항산으로 넘어가는 데 뒤에 따라오던 선희 씨가 비명을 지른다. 급히 뒤로 달려가 보니 선희 씨가 바위 아래 쪽 나무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하마터면 아래로 구를 뻔한 위험한 상태였는데 선희 씨 웃음을 짓는다. 선희 씨를 일으킨 뒤 대원들이 왜 웃었는지 묻자 대답이 가관이다. “오늘 아침에 옷이 뽀송뽀송해서 오늘은 넘어지지 말자 다짐했는데 넘어져서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닭고기 먹는 생각을 하다 넘어졌다는데,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정희 씨 길을 잃다
조항산 바로 밑 암릉에서 정희 씨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핸드폰으로 여러 차례 두드린 끝에 연락이 됐다. 전화로 확인한 결과 정희 씨가 청화산 정상에서 시루봉으로 가는 능선으로 잘못 들어선 것으로 판단됐다. 우리와 거리가 꽤 떨어진 곳이라 우리와 합류하기보다는 가까운 마을로 움직이라 한 뒤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채석장
조항산 정상에서 대야산 쪽으로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고모치를 중심으로 세군데 채석장이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잡았다. 추풍령 금산처럼 가운데 채석장은 곧 대간 마루금을 넘어뜨릴 태세다. 속리산에서 대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백두대간 중에서 경관이 빼어나기로 손꼽는 구간이며 커다랗고 아름다운 암릉들이 즐비하다. 바로 이 곳에 열 개가 넘는 채석장이 들어서 백두대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대야산 오르는 길은 가파르나 곳곳에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찾다보니 등산로 훼손은 속리산보다 오히려 심하다.

우리도 길을 잃다
대야산 정상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다 넋을 잃어서일까, 내려서는 등산로를 잘못 찾았다. 한빛은행 표지기와 그 옆에 걸려 있는 표지기만 믿고 한 참을 내려가니, 계곡이 가로막고 있다. 대간이 물을 넘어서면 안되는 법인데… 길을 잘못 들었다고 판단, 다시 원점(대야산 정상)으로 돌아섰다. 내려오는 것은 30분, 올라가는 것은 한 시간… 시간도 갑절 들고, 힘겹기는 이만저만 아니다. 올라와서 표지기를 확인하니 백두대간 종주 표지기는 오직 한빛은행 것만 있고, 나머지는 일반 표지기였다. 정상 건너편 바위에 있는 관목에 대간 종주 표지기들이 많이 걸려 있는 것도 모르고 우리가 길을 헤맨 것이다. 오직 대야산 정상에서 가장 늦게 출발한 윤수 씨만이 제대로 등산로를 찾은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늘 자랑하는 윤수 씨의 기고만장함(?)을 어떻게 지켜봐야 하나.

20:05 블란티재 도착
애초에 버리미기재까지 가기로 했으나 날이 어두워져 조사가 어렵다고 판단, 블란티재에서 조사를 멈추고 벌바위 마을로 옮기기로 했다. 휴대폰으로 확인하니 윤수 씨는 이미 버리미기재에 도착, 마을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찍느라 늘 뒤에 쳐져서 오던 윤수 씨가 한 시간 반 넘게 걸리는 힘든 길을 사십 분만에 주파한 셈이다.

숙소인 벌바위 마을에 도착하니 정희 씨와 윤수 씨가 고등어조림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며 오늘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때론 심각하게 때론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힘들었지만 기억에 많이 남을 날이다.

△ 6월 21일 블란티재에서 은치재까지

05:20 기상
오늘은 마을로 이동하기가 어려운 곳이라 야영을 하기로 하고 작은 배낭을 큰 배낭으로 바꾼 뒤 벌바위 마을을 나왔다.

버리미기재에서 장성봉(915m) 오르는 길은 벅차다. 큰 배낭을 오랜만에 메고가니 더욱 힘들다. 장성봉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막 출발할 무렵, 수원에서 오셨다는 65세의 두 어른을 만났다. “십 년만 젊었어도 우리도 백두대간을 하는건데, 우리는 지금 6학년 5반야 너무 늙었어” 하신다. 젊었을 때 자일 하나만 들고도 인수봉 정상을 올랐다는 분들이다. 방울토마토와 캔음료를 주시며 무사히 종주를 마치라고 격려해 주신다.

18:50 은치재 도착
은치재 전 큰 바위에서 잠시 쉬어간다. 주위 경관이 너무 좋아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 곳에 머무른 것이다. 바로 앞에 우리가 내일 오를 구왕봉과 희양산이 보인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깎아지른 채로 우리에게 내일은 너희들 매우 힘들 것이다 경고하는 듯하다.

△ 6월 22일 은치재에서 이화령까지

05:00 기상
구왕봉(898m) 오르는 길은 에둘러 가더라도 매우 힘든 곳이다. 오르면서 식물교육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집안 족보 가르치듯 식물을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한 방법이 아닐까.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기에 급급하기보다는 그 식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했다.

희양산 입구에 있는 봉삼사 명의의 입산통제 표지판

스님들로부터 제지 받다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서는 무척 가파르다. 중간에 희양산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는  바위에 올라 빼어난 자태를 감상한 뒤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딛는다. 지름티재에 도착하니 나무에 물색이 걸려 있는 성황당이 있고, 은치재에서 본 적이 있는 희양산 봉암사 명의의 입산통제 표지판이 서 있었다. 통제선을 갓 넘어서는 순간 30여명의 스님들이 올라오며 우리를 막는다. 사찰림이라 이 곳을 절의 허가없이 올라가서는 안된다고 하며, 돌아서 가라고 한다. 일반 등산객과 달리 대간 등산로 조사를 하는 것이라며 여러 차례 사정을 설명해도 어림없다.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계곡 쪽으로 내려서기로 했다. 주말마다 스님들이 올라와 이 곳을 통제하면서 자주 실랑이가 벌어진다고 한다. “희양산에 잘못 올랐다가는 중들에게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라는 소문이 우리에게 미치리라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희양산은 조옛날에는 나라를 지키던 승려들이 이제는 절을 지킨다며 주말마다 이 곳을 올라온다니… 무척 씁쓸하다.

나중에 몇몇 단독 종주자들에게 확인한 결과, 희양산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는 것이다. 안전 줄은 스님들이 이미 다 끊어 놓았고, 표지기도 다 떼어놓은 상태라 여간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스님들이 우리를 살릴 것인지도 모른다.

△ 6월 23일 이화령에서 조령까지

05:10 기상
어젯밤 갑자기 쏟아진 비에 허둥댔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텐트 주변에 골을 파놓는 것이 당연한데 설마 하며 그 짓을 하지 않았더니 비가 오고 말았다. 무엇이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법’이다.

오늘 아침 숲에는 안개가 가득하다. 안개 사이로 지나가는 대원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아침식사를 스프로 때운지라 대원들 모두 허기진 모양이다. 길가다 산뽕나무 열매 ‘오디’를 보고 갈 길을 멈춘 채 따먹기에 바쁘다.

조령산에서 촬영한 원추리

오디 따먹기를 그만두고 앞장 서 걷던 내가 ‘고라니’를 발견했다. 등산로 오른쪽에서 먹거리를 찾던 고라니가 내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등산로 왼쪽으로 달아난다. 고라니는 노루의 한 종류로 그 중에서도 몸이 가장 작다. 암수가 모두 뿔이 없으며 위턱에는 “오옴”이라는 견치가 송곳 모양으로 자라 그것으로 나무 뿌리, 잡초, 나무의 어린 싹, 잎, 과실 같은 것을 먹는다. 여럿이 함께 다니다보면 야생동물을 보기가 무척 어려운 데 혼자 거닐다가 우연히 고라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반갑다 고라니야.

어제 이미 도착했어야 할 이화령에서 맡겨 둔 짐을 찾았다. 오늘 갈 길이 그렇게 멀지 않아 대원들 모두 여유를 부린다. 아이스크림, 과자, 빵을 있는대로 다 먹고 다시 짜짜로니를 끓여서 실컷 먹는다.

조령 제3관문에서 백두대간 조사팀

19:50 조령관 도착 / 운행종료
조령산 내려오는 길은 암릉구간으로 무척 험하다. 안개 가득한 길을 밧줄에 의지하며 힘들게 내려온다. 가끔씩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조령산 암릉들이 아름답다.

문경새재로 널리 알려진 조령, 우리는 영남제삼관인 조령관으로 내려왔다. 옛사람들은 추풍령을 넘으면 가을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주∼욱 미끄러지지만, 조령을 넘으면 장원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聞慶)’고 했다.

조령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밤늦게 서울에서 녹색연합 지원팀(남호근, 박경화님)이 내려왔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텐데 부침개 등 맛있는 음식을 해준다며 팔을 걷어부친다. 닭도리탕, 부침개 등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쉬는날 물안개 피어오르는 충주호에서

△ 6월 24일 조령산 자연휴양림

아침에 운행 준비를 모두 마치고 아침식사까지 깨끗이 마쳤다. 대원들이 비가 내리길 기다리듯 머뭇머뭇 거린다. 갑자기 휴양림 앞 계곡이 넘칠 듯 억수같은 장대비가 쏟아진다. 오늘 운행 무조건 취소다. 모두들 환호성…

하루 종일 잠을 자는 대원, 충주호 유람에 나선 대원, 피시방에서 종주기를 작성하는 대원…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 6월 25일 조령에서 하늘재까지

08:10 기상
대원들이 어제 낮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어젯밤 늦게 다시 일어나 라면을 끓여먹고 막걸리 한 잔 하다보니 새벽에 잠이 들었다. 결국 늦잠이다. 남호근, 박경화 님의 배웅을 받으며 조령을 떠난다.

조령에서 마패봉 오르는 길은 심한 오르막 길로 표지판에는 50분이 걸린다고 적혀있다. 25분만에 도착한 대원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힌다.

하늘재로 떨어지기 전 만나는 훼손된 등산로

운행을 하면서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나에게 이래저래 도움을 준 이들에게 보답할 거리를 생각했다. 엽서를 한 장씩 보낼까하다 종주가 끝나면 백두대간의 자연, 문화, 사람 등에 대한 글과 사진이 담긴 자그마한 책자(?)를 만들어 나눠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17:15 하늘재 / 운행종료
하늘재(계립령)은 신라가 북진을 위해 서기 156년에 개척한 고개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문헌에 나타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이다. 신라의 북진과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주요 요충지였다.

대원들이 저녁식사를 마친 뒤 텐트 옆에 놓여 있던 탁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른다. 주로 96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달리한 가수 김광석의 노래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라이브 공연을 가졌던 김광석,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대원들의 노래로 다시 살아난다. “나는 가수다. 가수는 노래꾼이다. 노래로 밥먹고 잠자고 꿈꾸며 살아간다. 이게 직업이다.”는 생전에 그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다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먹고 자고 꿈꾸며 생활하는가…’  아스팔트를 따라 마을까지 밤길을 거닌다. 별자리가 참 곱다.

△ 6월 26일 하늘재에서 차갓재까지

06:00 기상
어젯밤 마신 술에 여전히 비몽사몽이다.

송장벌레 (포암산 정상에서)

하늘재에서 포암재는 술기운(?)으로 올랐다. 정상에서 영주국유림관리소에 짐을 옮길 차량지원을 요청하니 오늘은 힘들다고 한다. 큰 일이다. 여차하면 다시 하늘재로 내려가야 한다. 충북 충주, 제천이나 경북 문경 등에 내가 알 만한 사람을 없을까 찾다 대전충남녹색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천규에게 연락을 한다. 대전에서 꽤 먼 곳(3시간)인데도 흔쾌히 내 요청을 들어준다. 임천규는 지난 해 4월 충남 금산의 장애우평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3년동안 다니던 천리포수목원을 그만두고 우리 땅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그는 나와 함께 남원 실상사에서 열린 ‘생태기행 지도자 워크샵’을 다녀왔고, 며칠 뒤 제주에 내려와 우리 집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올해 초 내가 백두대간 종주를 한다고 하자 그는 “자기도 꼭 하고 싶은 일인데 형이 먼저 하는 것이 무척 배아프다”고 했다.

노루발풀

포암산에서 대미산 가는 길에 붉은노루오줌, 노루발풀, 엉겅퀴, 원추리, 하늘말나리 등 수많은 들꽃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에서도 하늘말나리가 가장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하늘말나리는 백합과로 산지 풀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황적색 바탕에 자주색 반점이 빽빽하게 나있으며 뒤로 조금 젖혀져 있다. 꽃이 하늘을 향해 피어있기 때문에 하늘말나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우산말나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18:55 차갓재 도착 / 운행종료
커다란 송전탑이 있는 차갓재에서 골짜기를 타고 한참 내려오니 안생달 마을이다. 마을회관을 숙소로 이용할 예정이었으나 인근 공사장 인부들이 이미 마을회관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차량이나 숙소 모두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야영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동네 주민 장병운 님이 우리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을 야박하게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당신 집에 묵고 가라 하신다. 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여성대원들은 방에서 자고, 남성대원과 임천규 4명은 너른 마당에서 야영을 했다. 임천규에게 큰 고생을 시켜놓고 대접이 엉망이다. 술 한잔, 차 한잔도 함께 나누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 6월 27일 차갓재에서 벌재까지

05:10 기상
새벽에 소나기도 내리고, 바람도 제법 거세게 불었다. 텐트 주변에 이리저리 널부러진 물건들을 주인집 할머니가 새벽녘에 다 챙겨주셨다. “마당에 자서 너무 춥지 않았느냐” 걱정도 해주신다. 아침 일찍 이 집을 찾은 공사장 인부들이 한마디한다. “이 마을에서 이 집 인심이 최고여.”

황장산으로 오르는 위험한 등산로(동로애)

장병운 님 집에서 나와 마을 길을 오르다 양조장 앞 마당에서 잠시 쉬다 이야기꽃을 피운다. 성, 낙태 등 주제를 놓고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다 보니 세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늘 목적지까지 가기는 힘들 것 같다.

황장산을 오르내리는 길은 오르막과 암릉의 연속이다. 안개도 가득 낀 궂은 날씨, 갈짓자 행보에 자꾸 넘어지는 대원도 있어 걱정이 됐다.

18:55 벌재 도착 / 운행종료
궂은 날씨에 힘든 운행을 마치고 벌재에 도착했다. 적성3리 마을회관으로 가는 길이 꽤 멀어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가기고 했다. 트럭을 잡아 타고 가는 데 기사 아저씨가 “술 두 병 밖에 마시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운전할 수 있다”고 말씀 하신다. 아연 긴장해질 수 밖에… 곡선 내리막길에서도 다른 차를 제치고 나간다. 차에 탄 네 명의 목숨이 완전히 바람 앞에 등불이 되어 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차 뒤에 올라탄 여성대원 세 명의 얼굴이 무척 상기된 상태이다. 아저씨에게 “조금 천천히 가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몇 번 드리자 그때서야 속도를 조금 늦추고 우리를 적성3리 마을입구까지 데려다 주셨다. 고맙다고 인사는 들였지만 뒷골이 서늘하다.

마흔 세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쇳골(적성3리). 그곳에는 노인들만 살고 있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젊은이, 어린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잠시 고향을 찾은 젊은이 한 명만 있을 뿐). 젊은 사람들을 오랜만에 보셨는지 일터에 다녀오는 주민들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우리를 보고 눈길도 주고, 말씀도 건네신다. “잘 쉬고 가라, 건강해라” 6,70대 노인들이 건네시는 말들이 따뜻하다. 잠시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마을회관 앞집 김씨(73세) 할머니가 살구도 주시고 고추반찬도 주신다. 우리들이 마을회관에서 쉬고 갈 수 있도록 넉넉하게 마음도 써주신다. 참 슬프고도 따뜻한 마을이다.

△ 6월 28일 벌재에서 죽령까지

탈피를 하는 메뚜기과 밑드리

기상 04:50 기상
아침부터 안개가 가득하고, 능선 위에 부는 바람은 거세다. 날씨가 그런가, 대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오르락 내리락도 거의 없고, 평탄한 흙길이다. 예상보다 일찍 저수령에 도착, 오늘 목적지를 묘적령에서 죽령까지 더 늘리기로 합의하고 더욱 열심히 걸었다.

저수령은 경사가 급해 이 고개를 지나 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이곳에는 단양축협에 직영하고 있는 휴게소, 주유소 등이 있다.

묘적봉에서 도솔봉 오르는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그 전에 너무 편했던 것은 이 고생을 준비하라는 당부가 아니었을까. 헐떡이며 도솔봉에 올랐다. 정상 주변에 구름이 가득하다. 순식간에 산 주위를 숨겼다 보였다 구름의 움직임이 변화무쌍하다. 잠시 구름이 걷힐 때 소백산 주능이 한 눈에 들어온다. 몇일만에 보는 아름다운 경관인가. 욕심도 커진다. 더 날씨가 개어 단양팔경을 볼 수 있었으면…

도솔봉 전경

도솔봉에서 더불어 숲의 이상원 님과 통화를 했다. 이상원 님은 우리와 함께 백두대간 소백산 구간을 운행하기 위해 일부러 이틀 휴가를 내고 지금 죽령에 내려와 있다. 그냥 죽령에 머물러 있기가 그렇다며 산 위로 마중을 나오겠다 한다. 삼형제봉을 내려오는 도중에 죽령에서 올라오는 이상원 님과 반갑게 만났다.

21:20 죽령 도착 / 운행종료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상원 님을 만나고 부지런히 죽령으로 이동했으나 시간은 밤 9시20분. 지금까지 가장 오랜 산행이다. 대원들 모두가 피곤한 상태. 죽령 정자에 쉬던 대간 구간종주자 세 분이 우리에게 수박과 순대를 권하신다. 맛있게 먹고, 큰 짐들이 있는 아랫마을로 이동, 짐을 찾았으나 마을회관도 없고, 야영할 곳도 마땅치않다. 죽령 특산물 판매장으로 이동, 텐트를 치고 이상원 님이 사온 빵과 과일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몸이 피곤하니 밥을 지어먹기도 힘든 일, 간단히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기로 했다.

△ 6월 29일 죽령에서 소백산 주목관리초소까지

05:10 기상
죽령은 대형 화물차들의 중간 쉼터인 듯. 밤새 차량의 움직임과 소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을 떠보니 밖은 훤하다. ‘아이고 큰 일이다. 주인이 나와있으면 어떻해’하며 부리나케 일어났는데 아직 새벽이다. 하지만 주인은 오지 않았으나, 판매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이미 나와있는 상태다. 겸연쩍은 모습으로 사과를 하고 부지런히 짐들을 싸고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등산로 훼손 복구에 대한 안내문

죽령에서 소백산 오르는 길은 천문대까지 콘크리트 포장도로이다. 도로는 일반 등산로보다 걷기에 편할 것 같으나 너무 딱딱해 발바닥, 무릎, 허리 등에 더 부담을 준다. 방송중계소 갈림길과 천문대 앞길에서 비가 제법 크게 내리고 있는 가운데 오늘 운행과 관련한 논란이 벌어졌다. 운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죽령으로 내려가느냐, 주목관리초소까지 운행을 계속할 것이냐는 논란이 계속되다가 결국 비로봉 바로 밑 주목관리초소가 서둘러 가기로 결정했다.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대원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천문대에서 주목관리초소까지 4.5㎞.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주목관리초소에 도착했다. 소백산은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안개로 감추고 있었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은 보이지 않고 그 곳으로 가는 목재테크만이 가끔씩 모습을 드러낸다.

제1연화봉에서 내려가는 목제데크

주목관리초소는 단양군청에서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된 주목군락지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산장같이 너른 곳이다. 주목관리초소에서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되어 수십명의 대학생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초소로 밀려 들어왔다. 시끌씨끌 한참 젊음을 발산하다 아래로 내려간다.

대원들이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을 챙겨 먹으려 할 때 대간 단독종주자 이재현 님(35세)이 초소로 들어왔다. 밥 먹고 난 뒤 분위기는 그가 주도했다. 이재현 님은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지금은 산악정보동호회의 회원인 산악인이다. 광산노동자로부터 인쇄업, 산판, 막노동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했다고 한다.

종주를 한다는 사람치고 장비는 너무 허술하다. 배낭커버는 비닐, 텐트는 없고 비닐과 침낭커버에 의지해 비박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허술한 듯 보이나 사실은 빈틈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간 종주는 무게와 부피와의 싸움이다.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것이 대간 종주를 무사히 마치는 지름길이다. 그는 무게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온갖 머리를 다 썼다. 밥은 거의 해먹지 않고, 미숫가루, 라면, 생쌀로… 코펠과 그릇, 컵으로 모두 쓸 수 있는 중간 규모의 시에라컵… 야영장비 없는 비박, 하루 만원꼴의 경비 등… 우리로선 놀라고 또 놀라울 뿐이었다.

그는 땅꾼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것이 “뱀처럼 단순하게 살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삶이나 산행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단순한 듯 보였으나 한편으론 매우 정확해 보였다. 어쨌든 그로 인해 우리는 매우 즐거운 밤을 보냈다.

△ 6월 30일 주목관리초소에서 고치재까지

기상 05:30
새벽에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내렸다. 오늘 여기서 고립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 비 굵기가 가늘어지고, 안개만 가득차 있었을 뿐 운행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이다.

고치령 내려오기 전 고개에서 잠시 쉼을 하다 이상원 님 신발에 붙어있는 녹색의 나비에벌레에 모든 대원들이 관심을 기울인다. 에벌레를 건드리자 에벌레가 자신을 건드린 방향으로 씨익 씨익 소리를 내며 머리를 움직인다. 에벌레의 울음소리, 저항의 몸부림… 그런 모습은 처음이다. 다른 이들도 무척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이재현씨와 함께 비로봉에서

15:15 고치재 도착 / 운행종료
구름이 바람에 잠시 걷혔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소백산의 너른 품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은 쉽사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바람만 거세다. 걷기는 오히려 편하다. 어제처럼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비로봉, 국망봉, 마당치에 이어 고치재에 오후 세 시가 갓 넘어 도착할 수 있었다.

고치재 아랫마을 좌석리 세거리 고칫재 민박에 여장을 풀었다. 녹색연합 윤기돈 간사가 케이크 등 맛있는 먹거리를 비롯해 일주일 동안의 물품들을 갖고 숙소에 도착했다. 좋은 안주, 좋은 술, 좋은 사람 좋은 얘기… 그런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모자란 술을 사러 이상원 님과 단산면 소재지에 갔다가 노촌 이구영(81세) 선생님으로부터 백두대간을 건강히 잘 마치라는 격려전화를 받았다. “이구영 선생은 1920년 의병장 유인석의 활약이 돋보이던 충북 제천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자연스레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청년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만났다. 이어 8·15 광복을 맞으면서 사회주의 활동에 나섰고 한국전쟁때 월북,58년에 남파됐다가 경찰에 붙잡혀 22년간  감옥에서 지냈다. 80년 가석방된 뒤 서울 홍제동에 이문학회 사무실을 차리고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이런  인생역정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겪은 질곡을 한눈에 보여준다.”(대한매일) 노촌 선생님은 얼마 전에는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년 이야기’(소나무)라는 책을 펴내기도 하셨다. 대간 종주를 시작하기 전에 대원들과 이문학회로 선생님을 찾아 뵙고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드렸었다. 선생님은 몸만 괜찮으시면 한번쯤 우리를 찾아주시겠다 하셨는데 몸이 편찮으셔서 전화로 격려를 해주신 것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들 종주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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