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 속의 작은 나

2007.03.20 | 미분류

박 영신 (녹색연합 상임대표)

<좁은 관심>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자주 화제에 올리는 것 가운데 집(땅)값과 자녀 교육이 으뜸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이해됨직 하다. 그만큼 우리의 관심이 온통 여기에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곰곰 뜯어보면 거기에서 우리 관심 세계의 성격을 잡아볼 수 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수지를 맞추어 치부할 것인가 하는 경제 관심이다. 그것이 집(땅)값의 오르내림에 대한 이야기 속에 녹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남에게 뒤지지 않도록 자기 자식에게 ‘투자’해 두어야 한다는 혈통에 대한 관심이다. 얼핏 두 가지가 서로 엇갈리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이 두 관심은 하나로 이어져 나오고 있다. 다름 아니라 자기 집안 중심의 이익 추구라는 좁은 관심 세계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 매우 좁은, ‘사사로운’ 관심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넓은 관심>

‘사사로운’ 좁은 관심에 얽매여 있는 삶은 ‘공공의 관심’ 세계를 펼치는 데 헤살을 놓기 마련이다. 자기 집(땅)값을 올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쓰로 있는 한 집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자기 아이의 교육 문제로 그렇게 안달하는 한 겨우겨우 살아가는 집안의 아이들이 부딪쳐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마냥 무감각하다. 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아이 때문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이웃한 사람들의 고된 삶을 보듬고자 하는 넓은 관심 세계로 나아갈 수 없게끔 자기중심의 좁다란 관심 세계의 테두리 안에 단단히 갇혀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문제는 언제나 ‘사사로운’ 문제로 ‘사사롭게’ 해결해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이른바 ‘시민’의 관심 세계와 어긋맞다. 시민은 이웃 일반에 대한 넓은 관심 세계를 전제한다. 시민은 ‘사사롭다’고 하는 것을 ‘공공’의 커다란 그림 안에서 이해하고 그 큰 틀의 맥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자기 집안의 이익이나 자기 혈육에 대한 관심의 울타리를 벗어나 공동체의 구성원을 함께 아우르는 관심 세계에 잇대어 살아가고자 한다. 이것이 참다운 ‘시민’의 됨됨이다. ‘시민 사회’라는 깃발을 아무리 흔들어 대도, ‘시민’이라는 말을 아무리 떠들어 대도 비좁은 자기중심의 이익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참된 시민이 되지 못한다.

<시민 관심>

시민은 모름지기 스스로 갇혀 살아가고 있는 비좁은 관심 세계의 벽을 허물고 넓은 공공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이란 그러므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접은 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좁은’ 사람들과는 구별된다. 시민은 우물 바깥의 세상을 관심거리로 삼아 ‘큰 그림’을 그린다. 그 세상에서는 어떤 문제가 일어나며 그것은 또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넓게 생각하고 거기에 널리 참여코자 한다. 이러한 삶에서 깊은 뜻과 값을 찾고 이러한 삶에서 참다운 보람을 누린다. 그렇게 시민은 ‘넓은’ 사람이다. 좁다란 자기중심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까지도 담아내어 더욱 온전한 세계를 표상하고자 하는 ‘큰 그림’을 그려보며, 그 그림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시민의 관심은 어느 한두 가지 영역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삶이 다차원이듯이 삶의 영역 또한 여럿이다. 그 관심에 따라 시민의 참여는 다르게 나타나며 참여의 마당 또한 다르게 엮어진다.

<녹색 관심>

우리가 내세우고자 하는 ‘녹색 관심’은 가장 넓고 큰 그림에 이어진다. 주택이나 교육과 같은 문제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바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민의 관심 또한 오래되었다. 그러나 녹색 관심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 널리 펴지기 시작했다. 이 관심은 이전의 여러 관심 영역과 이어지면서도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제에 맞닿아 있다. 산업화니 경제 성장이니 하는 근대기의 문제이지만 더욱 최근에 와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문제에 겨냥하고 있는 관심이다. 당연하게 여겨 왔던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로부터 빚어 나온 관심이다.

보기를 들어, 우리가 마시는 물이나 공기에 대해서는 오래 동안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런 것에 눈을 돌려 값까지 매기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자본주의 쪽에 서있는 자유 경제학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쪽에 서있던 소비에트 경제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쪽 모두 과학과 기술을 통한 경제 발전을 신주처럼 모시었고, 이를 두고 두 쪽이 서로 앞서가겠다며 체제 경쟁만을 벌여왔던 터다. 자연 생태계의 파괴와 훼손은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렇게 잊혀져 온 관심, 그것이 녹색 관심이다.

녹색 관심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체제도 넘어서고 이데올로기도 벗어난다. 이제껏 무시하고 도외시해 왔던 자연 생태계의 영역으로까지 관심의 손길을 뻗쳐가는 관심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긴밀하게 이어지지만, 그것을 넘어 생태계 일반으로 뻗어가는 넓은 관심을 가리킨다. 이 관심은 인간 중심의 좁은 세계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생명 모두에 대한 넓은 세계를 담아내는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녹색 관심’의 관심 세계이다.

우리 녹색연합은 생명을 담아내고 있는 이러한 큰 그림 속에 들어서 있다. 경제 성장 위주의 소비주의에 맞서 절제를 이야기하고, 폭력의 반복만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평화를 꿈꾸고, 시장 논리로 보듬을 수 없는 사회 약자의 삶을 뒷받침해주는 공동체를 생각한다. 녹색 누리로 가는 녹색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이다.  

<녹색 시민의 관심>

이것은 새로운 삶을 향한 새로운 실천 행위를 뜻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파묻혀 있는 ‘사사로운’ 좁은 관심 세계의 견고한 담벼락을 허물고 그 바깥 넓은 삶의 터전으로 나아가 ‘공공’의 관심 세계에 들어서는 일, 녹색 시민에게 요청되는 삶의 전환이며 돌파 행위이다. 우리가 든 ‘녹색주의’의 깃발에는 바로 장쾌한 삶의 변환이 그려져 있다. 녹색주의는 다름 아니다. 모든 관심을 드넓은 녹색의 관심에 이어놓고 있는 큰 그림 그리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 큰 그림 안에서 나의 삶이란 지극히 초라하다. 우리가 얽매여 있는 좁다란 자기중심의 일상을 물리치고자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그 삶이란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통례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넓은 녹색의 삶으로 들어서고자 하는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과잉 소비를 과잉 소비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기중심의 삶을 새김질하면서 절제의 삶을 열어가는 삶이, 결코 하찮은 것일 수는 없다. ‘어제’를 생각하고 ‘이제’를 되새기며 ‘올제’를 그려보며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자 하는 삶이 작디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결단코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는 없다. 작은 자의 삶이 녹색 누리라는 큰 그림 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헌신을 표상한다. 한 사람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를 위해 몇 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며 자기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가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를 위해서는 또 몇 백 그루의 나무가 필요한지, 생각하며 살아간다. 책임과 헌신은 절제의 삶이기도 하다. 삶의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삶의 절제를 비켜가지 못한다. 녹색 시민의 삶이다.

<삶의 관심>

녹색 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수준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한다. 좁다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는 우리 바깥 강대국의 횡포와 우리 안의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정책 방향과 행태를 비판하고 때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녹색 누리를 만들어갈 수는 없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만이 중요하거나 큰일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만이 유일한 투쟁의 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상에서 그리고 삶의 마당에서 절제의 녹색 삶을 살아가는 무언의 참여와 겸비한 헌신과 절제 또한 중요한 쟁투의 방식이다. 그들 또한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있는 굳은 습속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안팎의 생태계 파괴 세력과 힘써 싸우고 있는 그 삶이 모든 투쟁의 하부 구조인 것이다. 그러한 삶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작은’ 자들의 참여가 투쟁을 뒷받침하며 투쟁 그것의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시민이고자 한다. 자기 집(땅)값 이야기와 자기 자식의 교육 문제조차도 ‘사사로운’ 문제가 아니라 이웃한 모든 사람의 집 이야기가 되고 이웃한 모든 사람의 자녀 이야기로 확장되는, 그러한 ‘공공’의 넓은 문제로 설정하고자 한다. 그렇게 저 만큼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이웃들도 함께 아울러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아가, 멀리 ‘올제’의 사람들이 살아갈 생태계의 아름다움을 그려보고자 하는 녹색주의의 관심 세계에도 적극 참여한다. 큰 그림 속의 작은 ‘나’는 바로 그러한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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