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칼럼] 도로에 잠긴 마을들

2008.11.19 | 미분류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강원도 출장을 다녀왔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마치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다. 버스가 하늘 위를 달리기 때문이다. 산을 굽이굽이 돌지 않고, 고가다리 위를 똑바로 달리니 빠르고 편하다 싶다. 하지만 고가다리 아래 사는 마을 사람들은 어떨까.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도로에 사방팔방 에둘러 싸인 마을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댐을 짓기 위해 마을 전체가 수몰되기도 했는데, 이젠 마을 전체가 고가도로에 잠긴 ‘도몰민’들이 생겨나고 있다. 도로를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한적한 정취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도로에 잠긴 마을 사람들은 도로로 인한 혜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마을 위로 난 고속도로는 정작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다. 시골마을에 난 도로는 마을과 생태계의 소통과 교류를 끊어놓는다. 도시 사람들이 모는 자동차는 시골 할머니들이 길을 건너는 속도를, 경운기가 털털 거리며 달리는 속도를, 개구리와 야생동물들이 길을 스쳐가는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경부선과 수도권만 벗어나도 자동차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가 많다. 지난 2005년 녹색연합은 국도와 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리는 도로 중복 건설이 심각하다고 밝힌 바 있다. 교통연구원도 고속도로와 국도 가운데 중복 투자된 구간은 8개 노선 320㎞로, 낭비된 예산이 8조6000억원이라고 발표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자연은 자연대로 망가뜨렸다. 전 국민에게 자전거를 한 대씩 사주고도 남을 돈이다. 국토해양부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예산을 낭비하고도 책임지지 않는다. 도로를 닦는다고 산 깎고, 땅 파고, 삽질해 낭비한 예산을 교육과 문화, 복지예산으로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는 도로를 만들면 지역이 발전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편리한 교통여건은 대량 통근족을 양산하고, 수도권과 큰 도시의 강한 흡인력에 지역경제가 쪼그라드는 ‘빨대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국회의원들과 공무원들은 도로건설예산이 아니라 기업과 일자리, 교육, 보건, 문화 예산확보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국토해양부는 여전히 남북으로 7개, 동서로 9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교통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내년 도로예산도 올해보다 4.7% 증가한 7조9540억원이다. 도로 53개가 개통되고, 13개가 새로 닦인다. 지난해 감사원은 상주~영덕구간은 일반국도 확장사업이 진행 중이라 고속도로 건설 없이 국도만으로 충분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업도 내년 예산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도로예산 증가는 ‘저탄소 녹색성장’에 반하는 전형적인 ‘고탄소 회색성장’ 정책이다. 편리한 도로가 자동차를 늘리고, 늘어난 자동차가 도로건설의 명분을 제공하는 악순환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로를 떠받들고 살 것인가.

※ ‘살 데’는 우리가 사는 곳, 곧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2008년 11월 19일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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