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 이야기 1 (첫째주)

2001.06.28 | 미분류

백두대간 종주 이야기 1 (첫째주)

지난 5월 26일 녹색연합 백두대간 등산로 실태 조사를 위한 종주팀이 출발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백두대간 종주팀의 생생한 종주일기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시 : 2001. 5. 26 / 5.28 ∼ 6. 3
•대원 : 송정복, 정용미, 김선희, 김정희, 이윤수, 문용포
•구간 : 백무동 / 천왕봉 ∼ 벽소령 ∼ 노고단 ∼ 정령치 ∼ 매요마을 ∼ 중재 ∼ 육십령

△ 5/26 서울에서 백무동까지

드디어 백두대간의 끝이자 시작인 지리산으로 출발이다. 녹색연합 사무실에서 활동가들의 환송을 받으며 스타랙스 차량으로 지리산으로 이동했다. 실제 종주는 28일부터이지만 26일 출발한 것은 26일 오후 지리산 달궁에 있는 ‘지리산 위령제’에 참석하고, 27일 백무동∼장터목 구간 등산로 조사를 하기 위해서다.
지리산 달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말이라 교통체증, 코스를 제대로 파악 못한 채 둘러감으로써 달궁에 도착한 것은 오후 다섯 시, 이미 행사는 끝나 있었다. 제물인 쌀, 과일, 떡 등을 많이 얻었다. 공짜로 이를 얻을 수 있나! 이날 행사에 참석한 5천여 명의 사람들이 구분없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나눠서 정리했다.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쓰레기 분리작업은 끝을 맺었다. 지리산을 살리자고 하는 행사가 마구 버려진 쓰레기로 지리산을 죽이는 것은 아닌지…

* 달궁은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 도성을 쌓았다는 곳이다. 현재 달궁 인근은 뱀사골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으로 변했다.

근처 음식점(파크텔)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수경스님으로부터 막걸리 값까지 얻었다. 그 돈의 쓰임새 때문에 잠시 실랑이… 저녁 늦게 백무동 민박촌에 도착. 여기저기 숙소를 찾다, 개업 개시 전인 민박집을 싼 값에 빌렸다. 행사장에서 얻어온 음식을 민박집, 매표소에 나눠주자, 민박집에서도 해물전을 준다. 밤 11시 넘어서 서재철 국장, 윤기돈 간사, 정승진 간사. 녹색연합 세 명의 활동가가 민박집에 도착했다. 새벽에 회의를 하고, 서 국장으로부터 종주코스에 대해 얘기를 듣고, 지원받는 방안, 규율 등에 대해 논의했다.

03:00 취침 – 자료 정리를 하다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다.

△ 5/27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

기상 07:20

일어나자마자 서울과 노고단으로 옮길 짐을 나누고, 차에 실었다. 아침을 먹고, 지금껏 전혀 보지 못했던 즐거운(?) 출정제를 지냈다. 가내소 폭포∼장터목 구간이 휴식년제인 줄 모른채 올라가다 다시 돌아왔다. 누가 처음부터 이런다고 가벼운 짜증을 낸다. 200미터마다 조사를 하니 괜히 거리도 멀어 보이고, 힘든 것 같다. 숲이 주는 편안함과 안온함을 느낀다. 숲 위로 제법 세찬 바람이 부는 데 숲은 평온하다. 참샘에서 도시락을 먹는 데, 취사금지 팻말이 있음에도 몇몇 사람이 버젓이 취사 행위를 한다. 무엇을 고쳐야 하나? 제법 버거운 오르막이 계속되다 능선길에 올라서자 저멀리 반야봉, 노고단 등 지리산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기가 이제 우리가 찾아갈 백두대간이란 말인가!
장터목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란 말인가! 좌변기에, 지리산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쇼윈도우까지… 등산로 복원 등에 쓰여야 할 수(수십) 억원의 돈이 도시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이렇듯 호텔 짓는 데 사용하다니 말이나 되나!! 편리함과 불편함,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용미, 정복, 선희 세 사람은 천왕봉으로, 정희, 윤수, 나 셋은 장터목 옆 봉우리에 올라 해넘이를 보다. 네 번째 찾은 지리산, 드디어 지리산이 자신의 모습(겉모습)을 모두 드러내다. 지리산이 닫았던 마음을 연 것인가…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등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주는 장대함… 섬진강이 흘러 사천, 삼천포의 바다로 이어진다. 붉게 물든 노을, 큰 산에서 보는 노을은 처음이다. 노을에 비친 고사목… 너무 아름답다. 내려가기 싫다. 해도 때가되면 넘어가듯, 우리네 삶도… 산에서 우리도 내려가야만 한다. 찰카닥, 찰카닥 윤수와 정희가 아름다운 해넘이를 찍기에 정신이 없다.

제석봉, 천왕봉을 본다.

* 지리산은 여신의 산이다. 성모산신과 노고여신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한라산 역시 여신(설문대할망)의 산이다. 그렇다면 금강산, 설악산 등은 남신의 산인가?

여신, 어머니가 품은 세상은 깊고, 크고, 넓다.

참치찌게를 반찬으로 저녁을 먹다. 전야제는 소주 한 잔으로 간단히 마무리… 22:00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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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 첫째주 – 천왕봉에서 육십령까지(92.5㎞)

△ 5/28 천왕봉에서 벽소령까지(10㎞)

05:40 기상

일찍 일어나 지리산 제1경인 천왕봉 해돋이를 보려 했으나, 허리가 아파 포기(아니면 어젯밤 해넘이의 감동이 너무 커서인지)했다. 다른 등산객들은 새벽 3시부터 시끌법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왕봉을 다녀온 사람들은 해돋이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아깝지만 다음 기회로…) 새벽에 허리가 심상치 않다. 대간 종주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거창에 3∼4일 머무르며 한의원에서 침 맞는 것도 고민… 아침은 미역국. 숭늉도 좋다.

08:25 장터목 산장에서 천왕봉으로 출발

고사목이 군락(?)을 이룬 제석봉을 오르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앞서가던 선희씨가 갑자기 등산로 한 쪽에 기대앉는다. 지난 번부터 아팠던 무릎이 도진 모양이다. 무릎을 어르만지던 선희씨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아파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종주를 중도에 마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가… 나중에 확인한 결과 종주를 그만 둘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용미씨는 무릎, 정희씨는 발바닥, 윤수도 허리… 송 대장만 빼고 모두가 환자다. 종주기를 보면 대부분 처음에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러길 바란다.

09:10 천왕봉(1915m) 도착

천왕봉에 올라 주변을 바라본다. 서쪽 끝으로 부드러운 모습을 한 무등산이 보인다. 무등산에 대해 그리고 지리산에 대해 생각한다. 저항과 반역의 고장, 역사의 격동기와 함께 한 그 산들… 어머니와 어머니 같은 산… 그 따뜻하고 너른 품에서 반역의 불길이 타오르다.
지리산의 너른 품에 안긴 마을들이 보인다. 저기 사는 이들은 누구일까?  어느 시대에나 지배세력의 수탈과 억압을 받은(소외 받은) 이들은 그 수탈과 억압을 피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피난처로 삶의 터로 삼는다. 아마 그 때 사람들이 지금 저 곳에 사는 이들의 조상이 될 것이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가 바로 저 모습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이 곳 천왕봉에서 강원도 진부령까지 도상거리 670㎞를 걸어가야 한다. 비록 북녘 땅까지 가지 못하나, 우리는 국토의 척추 백두대간을 오르며, 산천의 장엄함을 느낄 것이다. 그 곳에 깃들어 사는 야생 동·식물과 사람들을 만난다. 어찌 가슴 뛰지 않겠는가!
대간 종주가 끝날 즈음 내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내 마음이 더욱 넓고 깊어지길 원한다.
천왕봉에서 모든 대원이 기념 사진을 찍으려 하니, 대장이 저만치 먼저 내려간다. 걱정이 되겠지… 벌써 아픈 대원이 생기고, 대원들이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이 우려가 될 것이다.

11:00 장터목 도착

촛대봉 가기 전에 홀로 산행을 하는 여성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어, 나하고 꼭 같은 모자를 쓰셨네요?”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여성대원들에게 농담삼아 “나 저 아가씨 따라갈래”라고 하니 모두들 “그래 잘 가세요” 한다. 진짜로 따라갈까 보다. 연하봉은 얼레지의 천국이다. 지금은 보랏빛 꽃잎은 떨어지고, 이제 작은 열매를 맺었다.  

14:20 점심 식사(세석산장 1580m)

세석산장 주변 세석평전은 그동안 훼손으로 심하게 몸살을 앓아 현재는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산장 앞에 설치된 안내판을 보니, 복원공사는 지방안정공법, 식생자루설치, 거적덮기와 그물공법 등의 공법을 이용한다고 적혀 있다. 노고단과 세석평전의 복원 공사와 한라산 장구목, 윗세오름 등의 복원 공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세석평전을 넘어서니 영신봉(1,652m), 이 곳에서 낙남정맥이 갈린다. 이 산줄기는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신어산을 거쳐 낙동강 하구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산줄기가 남녘의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을 갈라 기후와 문화 등을 구분한다.

벽소령까지 경사도가 크지는 않으나 오르락 내리락 봉우리의 연속이다.
벽소령 군사도로, 얘기로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사회정화’를 한다며 조직폭력배 등을 잡아다가 이 곳에 군사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는 이른바 좌익빨치산을 막기 위한 것이란다. 제주의 일명 5·16도로(11번 국도)가 그렇다. 빨리 이름을 바꿔야지, 부끄럽다.

19:10 벽소령 대피소(1390m) 도착

장터목 산장도 그렇지만 벽소령 대피소도 거의 호텔 수준이다. 20억원 정도가 들었다니, 반드시 필요한 시설물도 아닐터인데, 이렇듯 엄청난 돈을 쏟아붓다니 미치지 않고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대피소가 아니라 산장 아니 호텔이다. 대피소 앞 안내판을 보니 이른바 이현상 아지트 등 ‘빨치산 루트’가 있다. 빨치산과 관련한 지역을 관광상품화 한다고 했는가, 어찌 보아야 하나??

저녁 평가에서 운행속도가 너무 느리다(시간당 0.9㎞)는 지적이 있었다. 어떻게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 5/29 벽소령에서 노고단까지(12㎞)

04:40 기상

언제나 그렇듯 새벽은 새들의 노랫소리로 시작된다. 새의 활동시간이 그래서일까?

06:20 벽소령 대피소 출발

08:30 연하천 산장 도착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작고 아담한 연하천 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큰 대야에 시원한 맥주가 ‘날 먹어주세요’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법, 30% 할인을 받으며 맥주를 마셨다. 산장지기 말에 따르면 ‘허영호와 함께, 한빛 백두대간 대장정’에 무려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설마 그 200명이 전부 대간 종주에 나서는 것은 아닐테지…(나중에 확인한 결과 주마다 관광버스 4∼6대에 나눠탄 등산객 200여명이 허영호팀과 결합해 구간 종주를 한다고 한다. 이들이 쉬어간 자리는 쑥대밭이 되고, 대간 등산로 곳곳에 이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너부러져 있다.)

명신봉과 토끼봉 사이에서 잠시 쉼을 하다 홀로 등산을 하는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미숫가루 드시고 가라하니 “백두대간 하는 사람들 먹거리는 먹어선 안돼”하며 극구 사양하다, 조금 먹는채하고 가던 길을 가신다.
선희씨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공생, 상생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지금껏 인간중심의 관점에서 자연을 수탈하고 파괴한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야봉 아래 쪽 능선 전망 좋은 바위에서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대간 종주길을 되돌아 보았다. 저멀리 천왕봉부터 제석, 연하, 촛대봉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뒤쪽으로 노고단과 만복대도 보인다.

11:40 점심

뱀사골 위 화개재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삼도봉(1499m)

화개재에서 삼도봉 오름길은 꽤 가파르다. 550계단 그 곳을 헐레벌떡 올라와 쉰다. 대장이 처음으로 이마에 땀이 흐른다고 한다. 이런 오르막 길은 쉬지 않고 그냥 치고 올라가야 한다. 쉬기를 반복하면 호흡도 발맞춤도 어려워진다.
잠시 쉬고 있을 때 정령치에서 올라오는 양정석(60세)님을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눴다. “서울로 이사간 지 3년이 됐는데, 뭐 할 일이 있나 매일 산이나 오르지” 하신다. 반나절에 15㎞를 걸어오신 그 분의 체력에 감탄했다. 맛있는 인절미와 떡까지 건네주시니… 경남 산청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다. 삼도봉은 경남과 전남북의 경계가 만나는 봉우리다. 대장마저 코피가 흐르고, 무릎이 아프다고 한다.
임걸령에서 질등, 문바우등,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형적인 산줄기의 모습이 아닌가싶다.

노고단(1507m)

노고단에 들어서니 분홍빛 앵초가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앵초 군락이다. 참 이쁘고 앙증맞다. 서로 사진을 찍는다. 노고단에 도착해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다. 내일 넘어갈 종석대 등산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노고단 정상은 자연휴식년제 구간이라 입산이 금지돼 있다. 정상까지 목재테크가 만들어졌고, 정상 밑에는 방송중계탑이 크게 서 있었다.

우리는 오늘 12시간(운행 9시간) 동안 12㎞를 걸어왔다. 내일부터는 큰 배낭을 벗고 작은 배낭을 메고 움직인다. 대신 운행거리는 길어질 것이다.

△ 5/30 노고단에서 정령치까지(9.8㎞)

05:00 기상

아침에 일어나 산장밖에 나서니 안개가 자욱하고 가랑비가 내린다.

06:45 노고단 산장 출발

노고단을 조금 내려서니 구례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대원들이 나에게 노래 ‘천리길’을 가르쳐 달란다.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뚫고 솟아와/새하얀 접시 꽃잎위에 눈부시게 빛나고/발 아래는 구름바다 천리를 뻗었나/산 아래 마을들아 밤새 잘들 잤느냐/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간다”

모두 힘차게 따라 부른다.

07:50 종석대 도착

종석대에서 바라본 노고단. 안개 자욱한 사이로 가끔씩 노고단이 보인다. 종석대는 성삼재∼노고단 구간에 비포장도로가 생기면서 지리산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 가장 천대받는 봉우리라고 한다. 하지만 날씨가 좋으면 이 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대단할 것이라 생각한다.
종석대∼성삼재 구간에서 두 번씩이나 길을 헤맸다. 아무리 쉬운 길도 안개가 가득차면 찾기 어려운 법이다. 더욱이 그 흔하던 표지기도 보이지 않는다면… 표지기가 하나라도 보이면 반갑다. 길을 잃지않았다는 안도감…

08:50 성삼재 도착

백지연이 나오는 누비라 광고 “차가 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구례에서 도로가 뚫리고, 노고단까지 길이 열리고, 급기야 케이블카까지 설치하려 들고 있다.

산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모습을 떠올린다. 역동과 포용, 격정 따위…

대간 종주자(조수광)와의 만남

성삼재에서 도로를 건너 산등성이를 조금 오르자 헬기장이 있다. 그 곳에 텐트 한 동이 보인다. 누굴까하며 지나서는 순간 안에서 누가 나온다. 포항에 산다는 조수광님, 장터목, 벽소령에서 이미 우리 일행을 만난 바 있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가득해 오늘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릴 만나면 주려했다는 치킨을 내놓는다. 맛있게 집어먹는다. 특히 닭킬러 용미가 가장 적극적으로 덤벼든다. 어디까지 가냐 묻자 “돈 다 떨어지면 내려가야죠”라고 웃으며 답한다. 작별 인사 나누고 우리는 갈 길을 간다.

고리봉(1248m)∼묘봉치∼만복대 가는 길은 키큰나무 하나없는 능선 길이다. 부드러운 흙길로 걷기도 편하다. 가을엔 억새가 장관이라고 한다.

만복대(1433m)에서 비가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운행 지속 여부를 논의한 결과, 정령치에서 운행을 마치기로 했다.

13:30 정령치 도착

정령치는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 장군을 파견해 지키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휴게소에서 도시락을 잔뜩 먹고, 과자도 사는데로 먹어치운다. 훈련때보다 훨씬 먹성들이 좋아진 것같다. 산림청 서부지방청 무주국유림관리사무소에서 소방수님이 우릴 태우러 왔다. 차를 타고 고기리로 이동, 선유산장에 짐을 풀고, 하루를 묵기로 했다.

고기리에서

숙박료도 싸고, 아주머니 김치 인심도 후하다. 부식과 막걸리를 사려고 주촌마을 가게에 다녀오다. 길가의 찔레꽃을 보며 ‘찔레꽃'(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질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노래를 부른다. 찔레꽃잎도 먹어보고, 인동초… 빨아 먹는다. 아주 이쁘고 아담하게 생긴 운천초등학교에서 그네 등 놀이기구도 타고 그랬다. 가게 아주머니가 오이와 무를 거저 주신다. 역시 시골 인심은 후하다. 도로에서 덕치리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다. 넘어가는 해에 비치는 마을 풍경(집과 논)이 너무 아름답다.

△ 5/31 정령치에서 매요마을까지(19.8㎞)

05:00 기상

안개가 가득, 오늘 갈 길이 먼데 정상적으로 갈 수 있으려나…

06:35 정령치 출발

소방수님 차량으로 정령치에 도착.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짙은 안개와 거센 바람… 출발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숲에 드니 바람도 잦아든다. 오르막을 조금 오르니 금새 고리봉이다.

고리봉∼고기리 삼거리

고리봉 정상(1305m)에서 내려서는 길은 경사가 심하며, 한참동안 내리막이 이어진다(“낙석” 소리에 급히 옆으로 피하니, 제법 큰 돌맹이가 내 옆으로 굴러온다. 하마터면 다칠 뻔했다). 하지만 심한 내리막 길이 끝나면 부드러운 흙 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쏜살같이 내달린다. 백두대간이 고속도로라…

오전 8시가 넘으면서 날씨가 풀리기 시작한다.

가재마을(530m)

고기리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가재마을(노치)에 들어선다. 모심기에 동네사람들이 바쁘다. 생활한복에 하얀 턱수염의 할아버지가 염소 두 마리를 이끌고 어디를 가신다. 사진 찍어도 되겠느냐는 대원의 말에 “찍지 말라” 하신다. 그래도 그 모습이 이채로운 지 대원들은 뒤쪽에서 사진을 찍는다.
마을 위 야산에 있는 네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 수백년 풍상에도 저렇듯 의연히 서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그 곳에 산당(山堂)이 있으니, 이 소나무들은 이 마을을 지키는 신목(神木)일 것이다.

조영수님(경남 통영)과의 만남
가재마을 뒤쪽 수정봉 오르는 길에 대간 종주를 하는 조영수님을 만나다. 커다란 배낭에 잔뜩 짐을 담고(대간 길은 무게와의 전쟁이라 한다) 그 먼 길을 가는 나그네… 그는 왜 힘들고 머나먼 길을 나선 것일까? 뒷꿈치 뼈가 깨져 수술을 하고, 3개월 동안 치료도 했다는데… 어디까지 가시냐? “기약도 없이 발길 닿는대로”… 우문현답

12:30 여원재(450m) 도착

여윈재까지 거침없이 내려왔다.

여윈재(여원재, 여윈치, 연재)는 영남과 호남, 남원과 운봉을 연결하는 고개로 예로부터 동서문화가 교류하던 곳이다.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가 영토싸움을 벌이던 곳이며, 갑오농민전쟁 때는 김개남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 1만여명과 박문달이 지휘하는 관군 5천여명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관군의 기습으로 농민군 패퇴). 한편 여윈재를 경계로 운봉읍, 아영면, 동면, 산내면 등 운봉 4개 지역은 남원시에 속하면서도 주민들의 말에 경상도 억양이 강하게 나타나며, 문화도 다른 점이 많다. 물은 사람을 모으고 산을 가른다고 했는데, 이 운봉 4개면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남원과 수계가 갈린다. 남원은 요천으로 해서 섬진강으로, 운봉 4개면은 임천강에서 진주 남강으로 마지막에는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동편제, 벅수, 목기의 고장이 바로 운봉이며, 이성계가 조선 개국의 뒷심이 되는 민심을 얻은 곳도 운봉이라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이성계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다. 운봉 사람들은 여원치를 ‘연재’라고 부르는 데, 이는 흥부에게 박씨를 준 제비가 넘은 고개라는 뜻이다.

15:25 고남산 정상

여원재를 떠나 고남산을 향한다. 고남산으로 가는 길은 논두렁 밭두렁으로 이어진 길이다. 장교리 뒤 왼쪽에 산불로 크게 원형을 잃은 별로 크지 않은 산이 있다. 산불이 난 지 꽤 오래됐으나 아직도 산은 신록의 계절이 무색하게 검고 붉다. 순식간의 불이 숲을 태우면, 100년이 지나서야 숲이 복원된다고 한다. 그런데 죽어 숯이 된 나무들 틈새로 작은 생명들이 다시 싹을 틔우고 있다. 절망의 숲을 희망으로 바꿀 작은 나무들이 생명의 경이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올라서자 고남산 정상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이 그만이다. 천왕봉부터 장중하게 뻗은 지리산 자락이 멀찌감치 보이고, 우리가 거쳐 지나온 너른 들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마을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매요리에서

매요 마을은 운봉읍 마을 가운데에서도 제법 큰 마을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7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열었던 작은 가게는 문 닫은 지 오래, 대간 종주자들이 걸어놓은 표지기만 가득할 뿐이다. 차는 하루에 다섯 번밖에 없다고 한다. 마을엔 어린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학교는 폐교된 지 오래, 학생들은 없고 늙은이들만 있는, 전형적인(?) 우리의 농촌이다. 농촌의 젊은이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무엇 때문에 농촌을 떠나는가! 당신들이 정착한 도시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도시는 젊고 농촌은 늙었는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매요마을에 들어선 뒤 마을회관이나 폐교된 학교를 숙소로 이용하려 했다. 이 때 버스정류장에 계시던 노인회 강신화 총무님께서 노인회관에서 자고가라 하신다. 이런 고마운 일이…

노인회관에서 식사를 준비하며, 강신화 어르신을 비롯한 동네 어른 몇 분과 담은 지 이틀되는 더덕술을 마셨다. 술 맛이 정말 좋다. 주민 한 분이 오이를 갖다 주시며 “마음껏 사용하고가되 뒤처리를 깨끗이 해달라” 당부하신다. 물론이지요, 깨끗하게 사용하고 가야지요, 그게 당연한 도리지요.

△ 6/1 매요마을에서 중재까지(19.2㎞)

04:50 기상

시골의 아침은 늘 일찍 시작된다. 여섯시가 되기도 전에 이장님의 아침방송이 시작된다. 방송의 내용은 운봉시장, 농기계 기름값, 감자 종자값, 현충일 대청소 따위였다. “농기계 기름값 밀리면 안됩니다. 돈이 있으면 다 쓰게되니 있을 때 갖다 내세요” “4반의 건필이 양반, 감자 종자값을 빌려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갚지 않느냐,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꽤 오랫동안 말씀하신다. 어릴 때 자주 듣던 잔소리, 교장 선생 훈화 같다.

강신화 어르신 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오늘의 운행을 시작한다. 동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시던 할머니 우리 일행을 보고 “거그 가지마, 여기가 차타는 곳이여. 뭐하러 고생하려 산에 가∼” 교회 뒤쪽으로 돌아나간 감자밭에서 마을을 돌아본다. 겉은 저리 정겹기만 한데…

큰 길가에서 소달구지를 만났다. 달구지의 할아버지, 알아서 포즈를 취해 주시며 “찍어 많은 사람들이 찍고 갔어, 이것이 바로 시골 다녀왔다는 징표지” “내 나이 일흔 셋인데, 경운기는 힘들어서 이것을 이용해” … 어릴 때 이모집에서 소달구지 타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소달구지 덜컹대는 길/시냇물이 흘러내리는/내 고향의 정든 시골길”(가사 불분명)

88고속도로와 지리산휴게소

88고속도로를 지나 사치재 능선에 올라서자 지리산휴게소와 88고속도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씨발놈의 전두환, 씨발놈의 위령탑(전승탑)’ 저절로 터져 나온다. 88고속도로는 전두환 장인 회사의 축재를 위해… 전승탑은 마치 지리산을 겨눈 듯 날이 선 모습… “먹은 재산 다 뱉어내라 뱉어내”
사치재 위 헬기장에서의 조망이 좋다. 어제 장교리 뒤쪽 산에 이어 산불 흔적이 남아 있는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 산마다 붙어있는 산불조심, 산림청 직원들의 호들갑을 이해할만 하다. 올 겨울 큰 눈이 내렸을 때 만난 산림청 직원의 이야기 “다른 사람들에겐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정말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눈이 녹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불의 참화를 입은 두 봉우리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시리봉(777m)에서 복성이재 사이에는 성의 흔적(둘레 632.8미터)이 남아 있다. ‘아막산성터’, 백제와 신라의 주도권 싸움의 흔적이다. 전북지방 기념물 제138호이다. 성터 아래 자리를 잡은 산뽕나무(‘오디’)를 발견, 오디를 따먹느라 바쁘다. 달고 맛있다. 산이나 들에는 먹을 것 투성이다. 산뽕, 찔레꽃(순), 드릅, 더덕, 도라지, 산딸기, 취나물, 청미레덩굴 열매 등등…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복성이재와 봉화산 구간은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다 지고 나무만 남았지만 꽃이 가득 피었을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바람에 이는 철쭉의 녹색물결이 꼭 차밭 같다.

점심 먹고 30분 낮잠, 정말 꿀맛 같다.

봉화산(920m)

봉화산 정상에 오르니 하늘선 끝으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봉화산 남쪽은 산불의 흔적이, 북서쪽에는 벌목의 흔적이 보인다. 봉화산 등산로 주변에 벌인 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쓰레기가 많이 보인다.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분명 허영호와 함께하는 한빛은행종주대팀의 소행일 것이다.

월경산 정상(980m)에서 중재로 내려서는 길에 꽤 큰 산사태 지역이 있다. 큰 바위가 많이 떨어지고, 주변지역의 표토는 전부 모래로 변했다.

중기마을

소방수님이 중재까지 차를 끌고 왔다. 30여 호 되는 중기마을로 이동, 이장님과 새마을 지도자님에게 마을회관을 숙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십사 요청했다. 새마을지도자께서는 “올 겨울에 젊은 학생들이 찾아오자 저녁 먹이고, 불펴주고 했는데, 새벽 4시에 아무 인사없이 가버렸다”며 마땅찮게 생각하신 모양이다. 이장님 도움으로 아담한 마을회관을 숙소로 이용하게 됐다. 자기들만 잘자면 된다는 앞사람들 때문에 뒤에오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시골 인심이 야박(?)하게 되는 것은 결국 도시사람들 때문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속견이… 주변에 폐가가 많이 보인다. 마을회관 바로 옆집 마굿간에 소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가 맛있게 먹이를 먹고 있다. 소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비해, 송아지는 그 예쁜 눈으로 우리를 힐끗, 몸도 왔다갔다 호기심을 보인다.

△ 6/2 중재에서 육십령까지(17.9㎞)

04:50 기상

이장님, 새마을지도자님, 논에서 열심히 일하는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며 중재로 넘어간다. 중재에서 구간종주(중재∼빼재)하는 젊은 분을 만났다.
중재에서 중고개재(755m)까지는 잡목(관목/초본식물)이 우거진 숲길… 그곳에서 더덕의 냄새를 맡은 대원들이 그냥 안 넘긴다. 조사는 뒷전, 더덕을 뽑는데 정신이 팔렸다.

백운산(1279m)

중고개재를 지나서 백운산까지는 계속 오르막으로 고도를 오백미터 정도 올려야 한다. ‘저 곳을 어떻게 오르나’ 지난 3, 4월 훈련 때는 오르막이 얼마나 힘들던지… 다리도 아프고, 숨고르기도 힘들었다. 요령이 부족했나, 체력이 부족했나… 그런데 5월부터는 나름대로 오르막에 자신이 생겼다. 호흡을 일정하게 코로 들이마시고 내뱉고, 내딛는 발걸음도 일정하게 멈춤없이… 간간이 보이는 앵초, 둥글레 등 앙증맞은 꽃들을 만나면 절로 힘이 난다.
빨치산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특히 이곳 백운산은 지리와 덕유를 잇는 주요 지역이었다. 백두대간의 백운산과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 사이에 깃든 지지리는 한국전쟁 전에 국군이 마을을 소개했을 정도로 빨치산들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제주4·3항쟁 진압을 거부한 여수14연대가 일으킨 여순항쟁 당시, 군토벌대에 의해 쫓긴 반란군이 이 곳에 들어와 활동하기도 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지리산, 북쪽으로 덕유산 산줄기를 바라본다.

영취산(1076m)

영취산은 금남호남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금남호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서해와 남해의 용왕에 전달하는 전령이다. 팔공산과 마이산을 세운 정맥은 계속 서쪽으로 나가다 주화산에 이르러 금남정맥, 호남정맥 두 갈래로 갈린다. 금남정맥은 금강의 물길을 잡으며 충남과 충북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산줄기이다. 금남정맥은 주화산에서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으로 이어지고 끝내 서해에 다다른다. 호남정맥은 섬진강 물줄기를 잡는 호남의 지붕이다. 내장산 금성산 무등산 천은산 사자산이 호남정맥의 자식들이다.
백운산, 영취산 오르막을 오르느라 제법 힘이 들었는데, 무룡고개에 물을 뜨러 내려갔다 왔더니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점심이 위안이다.
점심을 먹고 움직이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보다. 바람은 거의 없고 뜨거운 햇빛만이 강하게 내리쬔다. 숲이 없는 능선에 서면 몸이 데워지는 것 같다. 앞으로 더욱 더워질텐데 어떻게 하나…

16:50 깃대봉 도착(1015m)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깃대봉 정상에 서다. 건너편에 할미봉과 큰 몸체의 덕유산 서봉(장수 덕유), 남덕유산이 버티고 서 있는데, 저 곳을 넘어가야 한다 생각하니 크게 위축된다. 산사람들은 내리막이 계속되는 게 가장 괴롭다고 한다. 내려온 만큼 다시 오르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깃대봉에서부터 언뜻언뜻 보이던 할미봉 좌우의 석화광산과 채석장이 눈에 거슬린다. 할미봉 곁에 산은 석화광산과 채석장 사이로 완전히 파헤쳐지고 있다. 백두대간 줄기가 위태롭게 보인다. 저렇듯 파괴되는 산줄기가 백두대간 곳곳에 나타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8:20 육십령 도착

육십령으로 내려오는 길은 급경사이지만 마음은 즐겁다. 오늘 운행도 마치지만 내일 하루 운행을 쉬는 날이기 때문이다(6일 운행, 1일 휴식). 룰 깃대봉과 육십령에는 깃대봉을 사이에 두고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는 조선여인의 절개와 충절의 표상인 논개의 생가가,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는 논개의 묘가 있다. 진주 남강에서 건진 시신을 매고 고향으로 향했지만 ‘기생으로 출가한 사람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육십령을 넘지 못하고 금당리에 묻히게 되었다.

도적떼가 버글버글해 장수 육십명이 모여야 겨우 고개를 넘을 수 있다 하여 육십령이란 이름을 얻은 고개. 여섯의 대원들이 일당백을 주장하며 육십령에 내린다.

육십령에 도착하니 송정복 대장의 선배인 김태섭님, 친구인 임영태님, 더불어숲의 정효진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창으로 출발, 저녁을 맛있게 먹고, 거창의 문화기행단체인 ‘예벗’의 회원들과 임영태님 집이 있는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숯불구이 돼지고기와 더덕술로 즐거운 뒷풀이를 했다.

계속…【사이버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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