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서 ㅡ 가타리와 애니미즘

2014.02.02 | 행사/교육/공지

설 연휴인 주말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신입활동가 교육 한 달, 저는 정신없이 바쁜 일정들을 소화하느라 쌓였던 피로를 풀며 비에 젖은 솜처럼 노곤한 연휴를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연휴가 길어서 패기! 와 열정! 넘치는 신입활동가는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았지만요, 긴 연휴 끝자락 일요일 저녁 – 출근 전야가 되니 이거 참 기분이 묘하네요.

1월 24일 금요일에도 오늘처럼 안개비가 살포시 내렸었던가요? 일민미술관에서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왔을 때 촉촉이 젖어 농후해 진 콘크리트 바닥이 기억나네요. 아, 네 맞습니다. 저희 전시 보고 왔어요! 윤상훈 활동가의 보호(?)아래 신입활동가 세 명은 혜화동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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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장교, 이다솜, 배선영 신입활동가

전시 제목은 눈치 채셨지요? 바로 <애니미즘>인데요, 애니미즘이라는 개념은 다들 아실 겁니다.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 즉 모든 것은 삶과 죽음을 겪는다, 정도가 되겠죠. 예를 들자면 돌에도 생명이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 애니미즘에 대해 잘 몰랐고,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돌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참 난해했습니다. 하지만 도슨트의 설명을 잘 들어보니 이 전시는 그러한 애니미즘의 1차적 개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니미즘>전은 애니미즘을 단순히 현대적이지 않은 오브제나 비서구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관점을 탈피하고자 한다. 오히려 생명이 없는 물체에 영혼을 부여한다는 제한적 애니미즘 개념을 넘어 이 개념을 둘러싼 이해와 표현, 상상, 담론을 아우르는 미술 작품, 다큐멘터리 영화 등과 지식 활동을 선보인다. 특히 본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는 애니미즘을 서양식 경계 짓기의 도구이자 담론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이성을 가진 근대 주체의 형성 과정에서 애니미즘과 같은 영역은 전근대이자 원시적인 것으로 구별되었던 만큼, 이 개념을 서구식 근대성과 식민지 타자들을 가르는 명확한 경계를 세운 장치로 보고 이에 대한 반성적 접근을 시도한다.” (출처: 일민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ilmin.org)

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당최 어려운 말이라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왜 이 전시를 보러 갔는지 궁금하시죠? 이유는 바로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생태철학(Ecosophy)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전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개념이 이 가타리라는 아저씨가 이야기 한 것들과 관련이 깊거든요. (2층 전시실에 가면 독자적인 공간이 마련되어 빵빵한 사운드와 함께 가타리 아저씨의 철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실 수 있답니다.) 가타리가 누구냐고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태철학자입니다. 녹색연합 안에서도 ‘생태’라는 키워드는 아주 중요하죠. 생태가 무엇일까요? 바로 탈인간중심주의적 가치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자연이 주변화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같은 개체가 되어 공존한다는 것이지요. 가타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생태에 대해 철학적으로 풀어낸 사람입니다. 생태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자연생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사회의 관계망 까지도 확장시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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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가타리 (출처: google image)

위에 보이시는 멋진 흑백사진의 주인공이 펠릭스 가타리입니다. 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봤어요. 굳게 앙다문 입술에서 어떤 의지가 느껴지시나요? 네,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 할 그의 철학적 개념이 사진 속 그의 비장한 표정처럼 다소 무거운 내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저히 전시 관람을 계기로 공부했던 것을 이야기하는 저만의 감상이니 편하게 읽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가타리는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꿈꾸는 세상에서는 모두 –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 – 가 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체성이 어떻게 생길까요? 개체들이 이루는 관계망 속에서 주체성이 형성되고, 또 교환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환경운동가입니다. 그렇다면 산과 바다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겠지요. 그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겠지만, 여기서 ‘왜’ 자연을 보호해야하는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을 객체로, 인간을 주체로 본 것이 됩니다. 자연을 인간이 보호해야하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인간이 주인공이지요. 즉, 인간-자연의 관계를 주체-객체라는 이분법에 의해 나눈 것입니다. 가타리는 다르게 이야기 합니다. 주체성을 누가 부여하는가? 인간이 아닙니다. ‘나’라는 하나의 개체와 ‘나무’라는 하나의 개체가 상호 교류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주체성이 발현되고, 그 개체들은 동등하게 존재하지요. 동등한 관계에서 주객을 가름하는 것이 과연 중요할까요?

이 물음이 바로 <애니미즘> 전시의 컨셉을 관통하는 지점입니다. 다시 전시 내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층 전시실에는 독일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의 작품들이 여러 점 걸려있습니다. 박물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죠. 인간은 고고학적·인류학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조심스레 발굴해 박물관에 전시하지요. 그런 유물들을 보는 우리는 어떤 감상을 하나요?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귀중한 보물들이 유럽의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점을 상기해 봅시다. 그 보물들을 가져갔을 때 서양인들은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전시품의 가치를 매기고, 어떤 이름을 지어 붙일까요? 그리고 관람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전시를 즐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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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포스터 (출처: google image)

가타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박물관은 개별적 주체성이 철저히 무시된 ‘타자화’의 폭력적 공간입니다. 표현이 조금 거칠었나요? 전시‘되는’ 작품들은 보임을 당하고, 감상을 받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합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애초에 지녔던 본래의 목적은 상실한 채 말이죠. 이를테면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 조선백자는 더 이상 본래 목적에 충실한 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것을 대상화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서양일 수도 있고, 인간일수도 있겠지요. 즉,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의 물건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여 객체화 시켜버린 것이고요. 인간과 사물의 관계라는 꼭지에서 바라본다면 조선시대에 살던 사람과 그가 사용하던 백자, 당시 그들 사이에 있었던 ‘관계’라는 것이 삭제된 채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이고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느낀 바로 전시의 전체적인 컨셉을 요약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이분법적 가름을 거부하는 것.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기준을 타파하고, 그 경계의 모호성을 느끼는 것. 생명의 숨을 불어 넣는 것은 그들이 이루고 있는 관계 속에서 각각의 개체에 고루 스며들며, 그 어느 쪽의 의무나 권리가 아니고, 또한 일방적인 권력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정도 입니다. 어떠세요, 조금 와 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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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facebook)

자본주의의 범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생에 대한 고민과 가치들은 먹고사니즘으로 평가절하 되었죠. 그저 돈이 된다면 삶의 터전인 자연을 마음대로 해치고 맙니다. 그 속에서 이번 전시와 가타리의 생태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요? ‘자연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무에, 꽃에, 바다에 깃든 그들만의 숨을 우리가 함부로 끊어놓아선 안 된다. 그들이 죽으면 결국 우리도 죽는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을까요? 진부하리만큼 빤한 말이지만요. 그들과 함께하는 그 관계 속에서 우리도 주체가 되고, 자연도 주체가 됩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생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에 이야기 했던, 돌에도 생명이 있다는 말이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필력의 한계로 잘 쓰지 못한 점도, 생태철학에 대한 이해의 한계로 꽤나 중언부언한 것도 부끄럽습니다. 이번 기회에 생태철학을 더 공부해야겠어요. 신입이라 아직 어리버리 하지만요, 생태철학 안에서 제가 찾고 싶은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듭니다! 아직 선배들처럼 투철한 사명감도, 선명한 운동관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입교육 때 배운 환경에 대한 관점, 자연 속에서의 감수성을 현장까지 잘 가져가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한 3년 후면 좀 더 잘 쓸 수 있겠죠?)

그럼 이상, 올 겨울을 난생 처음 전기장판 없이 버티고 있는 신입활동가 배선영의 교육 후기였습니다. 사랑해요.

2014 녹색연합 신입활동가 교육 후기_배선영(bsy@greenkorea.org)

o 참고

신승철.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 2011. 그물코

고미석. “영혼과 물질의 경계를 넘어… 미술관으로 불러낸 애니미즘”. 『동아일보』. 2013. 12. 10 <http://news.donga.com/3/all/20131210/594446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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