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나흘째 – “영 너메 사람들은 우째 살꼬?”

2004.05.16 | 녹색순례-2004

순례 나흘째, 동해시 삼흥동의 서학 골짜기를 나와 다시 험산준령 백봉령을 올랐다. 백두대간이 강원도로 오면 경계의 장벽이 된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어원이 바로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경계로 영동지역은 동해안으로 물이 흘러내리는 유역권 전체를 뜻하고, 영서지방은 한강수계로 물이 흘러내리는 유역권 전체를 뜻한다.



지난 3일동안 순례단은 태백산 자락 낙동강수계에서 피재(삼수령)을 넘어 태백시 창죽동과 삼척시 하장면 일대의 한강수례인 영서지역으로 들어왔다. 이후 다시 댓재를 넘어 왔다가 또다시 백봉령을 올라 영서지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백두대간은 지역과 지역간의 차이를 만드는 문화 다양성의 의미가 컸다. 그래서 동편제와 서편제의 차이가 있고 집짓기, 음식, 말 같은 생활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 경계의 차이와 다양성 중 가장 뚜렷하고 명확한 곳이 바로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다. 심지어 일부 영동 사람들은 결혼도 영동끼리만 하고 지금도 고향사람들이나 동창끼리 모이면 “영서가 어데 강원도래유?”라며 영동의 정체성을 거칠게 표현하곤 한다. 이런 정서의 밑바닥에는 과거 수천 년 동안 생활해 오면서 얻은 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과거 교통이 지금 같지 않고 농업을 주된 생활방편으로 삼을 때는 살아가는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으뜸이 땅의 조건과 환경이었다. 사는 땅의 기후와 지형이 농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집과 의복 같은 생활전반을 규정했다. 영동은 해양성기후대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선선하며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 특징이 있었다.

반면 영서는 춥고 눈이 많으며, 안개 일수도 많고 땅도 무척 깊고 험하며, 생활에 강인한 기질이 필요했다. 식물생태계도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시기가 약 열흘 이상 뚜렷한 차이가 난다

이렇듯 기본 생활을 규정하는 것의 차이가 있기에 그 밖의 다양한 문화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노동과 놀이를 풀어가는 방식도 달랐고, 종교와 제례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며, 심지어 술을 빚어 먹는 것에도 차이가 있었다. 물론 70년대 이후 근대화 바람과 산업화의 영향으로 백두대간의 장벽 곳곳에 도로가 생기고 지역간의 내왕이 빈번해지면서 이런 차이의 많은 부분은 사라지거나 미미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도시화가 비교적 덜된 백두대간의 산자락을 다녀보면 영서와 영동의 차이가 의외로 많아 나그네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백봉령 오름길은 42번 국도가 걸쳐 있어서 아스콘 도로를 지겹게 올라야 한다. 과거 사람들이 다니던 백봉령 옛길은 2차선 포장도로에 수백 년이나 된 자신들의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일부 구간만 남아있다. 자본과 산업화로 상징되는 도로에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내어주고 잊혀진 추억을 숲 속에 간직한 채 그렇게 오롯이 앉아 있다. 그래도 백봉령은 양반이다. 포장도로 중간쯤의 옛길 있는 바로 옆에 지난 97년에 ‘세계문화의 해’를 기념하여 세운 백봉령 기념비라도 남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머지 백두대간의 많은 고개의 옛길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편리함과 속도감의 상징인 도로지만 백봉령을 관통하는 국도 42호선은 그나마 이를 무색하게 하는 자연의 노여움이 곳곳에 드러난다. 당초에 도로를 건설할 때 지형과 지질을 고려하여 노선과 선형을 결정했어야 하는데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뚫고 보자는 개발연대의 사고방식이 백두대간을 잘라내는데 일조를 했다. 그 결과 자연은 수시로 인간들에게 경고를 했다.



“그렇게 너그 맘대로 하면 좋을 줄 알았지.”

백봉령 도로는 수시로 무너졌다. 대규모 산사태가 곳곳에 일어나 기존의 절단한 산자락을 지금보다 더 높이 잘라내고 있다. 백두대간이 생태통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환경부나 산림청의 책상위에서는 생태통로일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건교부의 절단통로다. 도로가 얼마나 산림을 훼손하는지 뚜렷이 보여주는 현장을 지나면서 높은 고개를 오르는 피로감조차 가시고 말았다. 하지만 백봉령 정상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아픔과 상처가 우리 순례단의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자병산이다. 백두대간보호법이 태어하는데 가슴 저린 공을 세웠던 부끄러운 자화상 바로 자병산 광산, 즉 라파즈시멘트 회사의 자병산 석회광산이다. 백두대간 훼손지역 중 가장 손꼽히는 현장이 바로 이 광산이다.

국가자원 공급이라는 목적을 앞세우고, 산업화에 꼭 필요한 토대라는 필요성이 덧붙여지면서 여러 기업들이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백두대간 자락으로 몰려들었다. 그 대표 광산들이 석회석광산, 채석광산, 금속광산, 석탄광산 들이다.

이중 가장 심각한 것이 석회석광산이고,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곳이 ‘라파즈 시멘트사’의 동해시 자병산 석회광산이다. 순례단이 쌍용 광산을 넘어 자병산 맞은편 백두대간의 언덕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재 자병산을 중심으로 동해안으로 길게 뻗어 내려가며 파헤쳐진 라파즈 광산은 둘레의 어떤 봉우리에 올라가더라도 카메라에 한 장면으로 담을 수 없다. 오직 항공촬영을 해야만 전체 지역이 다 잡힐 정도로 너른 지역을 훼손했다. 프랑스의 다국적 기업인 라파즈사가 국내 으뜸의 석회암 식물의 보고인 자병산 정상을 모두 잘라냈기 때문이다. 백리향, 솔나리, 한계령풀, 가는대나물 같은 백두대간의 여느 산지에서도 보기 어려운 희귀식물의 터전 자병산 정상부가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백두대간 자락을 지난 20년간이나 파헤쳐온 이 광산은 최근에도 백두대간의 핵심지역에 추가개발 신청을 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이 개발에 적극 나선 라파즈사는 허가를 얻을 때는 훼손지에 대한 복원을 제대로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허가 이후에는 성의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라파즈사는 전 세계 광산을 80개나 보유하고 있는 큰 시멘트 회사다. 과연 프랑스에서도 이렇게 파헤치기만 하고 복원은 하지도 않아도 되는지, 그 나라도 환경을 파괴하고도 별 탈 없이 기업 운영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순례단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지고, 엄숙해졌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도시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마음속에서 더욱 또렷해졌다.

※ 현장사진은 녹색순례 2004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pilgrim.greenkorea.org/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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