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길을 걸으며 기록하기 – 걷기를 통한 풍경 속으로의 여행

서울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두껍게 쌓여진 시간의 켜와 무늬들을 곳곳에 간직한 도시이다. 급속한 발전과 개발로 인해 대한민국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은 지금도 오늘의 시간의 켜를 쌓아올리고 있다. 시민들의 힘으로 우리 주변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5월부터 매달 <서울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기행>은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서울의 옛 풍경 속을 직접 거닐며 그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시작되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쉽게 지나친 풍경을 다시 마주하는 <서울기행>은 창신동을 시작으로 서촌과 익선동까지 걸어왔다. 이처럼 매월 이루어지는 답사를 통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장소들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가진 의미와 보존의 중요성을 알아가고 있다.

사람과 장소를 이어주는 활동, 걷기

다양한 이동수단이 존재하는 오늘날 ‘걷는다’는 것은 어느새 굉장한 의지와 노력을 요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더 쉽고 더 빠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게 된 오늘날 내 다리를 온전히 사용하여 걷는 것은 시간에 쫓겨 생활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보고 느낀다’고 말할 때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장소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를 직접 마주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한 자연, 문화유산 답사에서 걷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필수적인 활동이다. 영국 최대 자선단체 중 하나인 자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영국 내셔널트러스트는 여름에 걷기 좋은 길,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 어린이가 걷기 좋은 길과 같이 다양한 걷기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걸으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장려할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이 보존에 있어 중요한 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됨과 동시에 그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기도 했다. 이렇듯 자연환경과 문화유산 보존에 있어 걷기는 사람과 보존 대상 장소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서울기행>을 통해서 얻은 것 중 하나는 걷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풍경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60, 70년대 근현대 역사를 담고 있는 창신동 봉제거리는 아직도 재봉틀 소리와 함께 옷감을 싣고 골목을 누비는 오토바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책과 TV로만 접했던 봉제거리의 활기찬 분위기와 생동감을 골목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길가에 쌓인 오래된 재봉틀들은 재단사의 고민과 손때가 남아있어 어느 박물관 못지않게 과거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봉제거리 한편에 있는 형형색색의 실로 수놓인 좁다란 골목길은 봉제거리가 가지는 의미를 나타내면서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 정체성을 강렬하게 말해준다.

골목에 숨겨진 보물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있다.서울도심한복판에위치한서촌은 아직도 예전 길과 한옥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만약 걷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특이한 건물 하나를 보게 되었다. 나지막한 한옥 일색인 서촌 일대를 거닐다 보면 주변 건물과 다소 조화되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12주 건물’이다. 한국의 가우디라 불렸지만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故) 차운기 건축가의 유작이 된 ‘12주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든 개성 넘치는 건축물이다. 옛 정취를 간직한 서촌에서 만난 이 파격적인 건물은 과거 어느 시대에 정지된 것 같았던 서촌의 이미지를 바꾸어 버렸다. 영화의 반전처럼 만난 이 창의적인 건물이 서촌의 매력을 한껏 더 높여주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우연한 만남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걷기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변화하는 풍경 마주하기

허물어져가는 근대 한옥들이 즐비했던 종로 익선동은 최근까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동네였지만 식당, 카페 등이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익선동 골목 초입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쳐지나는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는 1920년대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균이 서민들을 위해 근대한옥을 지어 일제의 개발을 막았다는 익선동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익선동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옛 서민들의 생활을 고스란히 담은 한옥의 모습과 현재 우리네 일상이 이루어지는 현대식으로 바뀐 내부가 겹쳐 보인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담고 있는 익선동 골목길은 정겨움과 세련됨을 함께 가지면서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된 시간의 나이테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의 옛 거리와 풍경을 거닐다 보면 십 년 후, 백 년 후에는 어떤 시간의 켜와 무늬들이 덧붙여질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때에도 변화하는 풍경을 음미하는 최고의 방법은 걷기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글 · 김화정

김화정 님은 시민들 스스로 자연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후 직접 영국까지 건너가게 되었다. 자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높은 관심이 부러웠던 그녀는 영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현재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운동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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