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또 다른 기후위기의 증인들, 청소년

2020.01.13 | 기후위기대응

나는 그래도 행동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말 세상이 변할 때까지.

우리가 미래를 외치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른의 모습을 꿈꾸기 이전에 생존의 여부를 걱정해야 한다. 세계화를 배우며 우리가 배우는 세계가 사라져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생계를 잃고 삶을 잃고 생명을 위협받는 세상을 보며 우리는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가만히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청소년은 이미 생존의 공포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피해자이다. 온실가스를 뿜으며 성장하는 것밖에 모르는 시스템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어간 우리는,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 의해 죽을지도 모르는 우리는, 이 기후위기를 막아야 할 당사자이다.

나는 길가에 치이는 돌보다 많은(요즘 길가에는 돌이 많이 없다) 그냥 그런 청소년 한 명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는 보편적인 시선에 맞춰 얘기하자면, 나도 뭔가 특이한 것들이 몇 개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기후행동은 최저학력기준도 면접도 나이 제한도 없는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정의감도 용기도 그리 넘치는 사람이아니다. 오히려 기후가 변하고 그것이 분명한 위협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용기 있는 사람일 것이다.

때문에 내가 하는 이야기는 과학적 사실이 아닌 청소년이 왜 기후행동을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의 청소년기후행동이 되기까지의 내가 만난 세상과 어째서 내가 여기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그냥 그런 것들 말이다.

환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친환경적인 삶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남의 삶을 동정하기에는 나 하나 챙기기도 벅찼다. 정의를 말하기에는 아직은 어렸다. 어른 흉내 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보통의 또래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고민을 하는 게 좋았던 것도 같다. 농사의 가치를 알기에 좋아했고 산속에서 살아봤기에 도시의 삶을 사랑했고 아직도 청소년이기에 사회의 불평등에 관심을 가졌다. 세대 간 불평등, 청소년 참정권, 탈핵, GMO, 농사, 지역 불평등……. 당장 눈 앞에 펼쳐진 문제들은 나를 시도 때도 없이 두렵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었다.

2018년 8월. 난생처음 생전 모르는 기후변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자고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른들은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며 언제나 미래세대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미래세대가 앞으로 좀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갈 세대의 주체가 아닌 미래에만 살아갈 세대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 또한 우리를 그런 미래세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이 미래세대라는 말이 미치도록 싫었는데 나 혼자만의 피해 의식일 수도 있지만 청소년이 기후 대응을 외쳐야 하는 명분이 고작 ‘미래세대’라서 그렇다는 어른들을 착각이 너무나 아니꼬웠다. 나는 분명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나 현재와 미래에 감당해야 할 불평등에 있어 무엇 하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결국 이 무력감이 나를 움직였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청소년들을 만났을 때 사실 확신은 없었다. 태어나서 살아온 그 짧은 모든 순간에서 나는, 청소년은 무력했기에 어른의 도움 없이는 무엇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였기에. 아무리 우리를 주체적 청소년이라고 칭해도 모든 사람이 알았다. 결국 그 또한 어른들의 통제 아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 스스로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있었지만, 세상이 바라는 우리의 모습은 그저 기특한 미래세대일 뿐이었다.

주체적이고자 하는 모든 발언은 그저 까칠한 성격, 기가 쎈 청소년 정도로 취급되었다. 기특한 청소년으로서 누군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청소년 당사자로서의 목소리를 내면 지금 활동 중인 청소년들은 정말 기후변화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치 자신이 선의를 베푸는 것 마냥 어른들이 한가해서 이 자리에 오는 줄 아느냐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대한민국 청소년은 바쁘다. 우리 중 한가해서 이 일을 하는 청소년은 없다. 우리는 각자의 고민이 있고 스스로의 삶에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활동한다. 서로가 생각하는 ‘주체적 청소년’의 개념이 너무도 달랐다.

기후가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 불을 지피고 방관하는 정부와 어른들을 보며 우리는 절망했다. 세상은 너무 더뎠다. 그럴수록 절박함은 그리고 무관심은 정말 아프게 와 닿았다. 전환을 외치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나에게 절실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여전히 내 주변에는 함께 고민할 사람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변했다. 스스로의 고민 지점이 늘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사치품. 내가 살아가는 소비방식.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소비시스템. 그리고 기후변화. 모든 것은 기후변화를 야기했고 나는 그제야 이 기후변화라는 문제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사회문제와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제한이 명백히 존재하는 문제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였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후변화를 막지 못하면 그냥 그 다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 깨달은 사람 중 절박해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내가 특별한 기회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소년기에 거쳐 갈 과정을 조금 다르게 선택했을 뿐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랬고 지금의 기후행동이라는 길이 그렇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거리로 나갈 수 있고 누구나 기후위기를 외칠 수 있다. 누구나 생각해볼 법하고 누군가 이미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지 않은 걸 한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는 내 무력함에 울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거리로 나갔다.

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이 활동을 좋아한다. 하지만 청소년기후행동 활동을 하면서 즐거웠던 순간보다는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이 더 많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행동은 계속해야 한다. 학교, 학원, 회의, 행동. 모든 것을 소화해 낼 수 없지만 어느것도 그만둘 수 없었다.
기후위기에 대한 절박함의 깊이도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동료들만 해도 모두가 이 의제 하나 만에 몰두하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무게를 강요할 수가 없어 결국 우리는 또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기후행동을 만들어간다.

나는 여전히 우울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우울함을 느꼈으면 하는 동시에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중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답답하다.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해 답답해하기도 미워하기도 한다. 나는 그래도 행동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말 세상이 변할 때까지.

 

글. 김서경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고2. 자연친화적인 삶을 동경하며 도시의 삶을 사랑하는 본인도
잘 이해 못하는 이상한 사람. 겁이 많음. 매우 많음. 원래 남들 다 울 때 혼자 무표정인 감수성
바닥인데 최근 눈물샘 고장 남. 요즘 고민은 적금을 들고 싶은데 집 근처에 석탄투자 안 하는 은행이
없다는 것. 코 묻은 내 돈은 이렇게 또 이자율에 홀려 석탄이 될 것인가…!

 

 

 

 

 

 

 

이 글은 녹색희망 특별호 269호 <기후변화의 증인들>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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