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복심 드러난 ‘덴마크 문건’

2009.12.17 | 기후위기대응

기후변화회의가 열리는 코펜하겐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일부 선진국끼리 작성한 합의서 초안이 언론에 유출된 탓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간 신경전도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15)가 12월7일부터 덴마크 코펜하겐 벨라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회의장은 192개 협약 당사국 대표단과 국제기구, 시민사회단체(NGO), 기업 참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번 회의 목표는 전 세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선진국과 개도국이 책임져야 할 감축량을 정하는 데 있다. 더불어 선진국이 개도국의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돈을 얼마나 내놓을지도 중요한 결정 사안이다. 간단히 말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각국이 비용을 얼마나 지불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온실가스 감축은 각국의 에너지 정책에 영향을 미쳐 경제적 부담을 수반한다.

중국 대표, 문건의 개도국 지원금 맹비난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대형 사고가 터졌다. 12월8일 덴마크·미국·영국 정부 주도로 선진국끼리 작성한 의장 합의서 초안이 영국 신문 가디언에 유출된 것이다. 일명 ‘덴마크 문건(Danish Text)’으로 불리는 선진국 초안은 모든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이 2050년까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을 1990년 대비 50% 줄이도록 제안하고 있다. 현행 교토의정서는 선진국과 개도국으로 나눠 선진국만 의무 감축하도록 되어 있다. 이 문서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 권고에 따라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2℃ 이상 올라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개도국에도 예외 없이 감축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2050년까지 선진국은 1인당 배출량을 2.67t, 개도국은 1.44t으로 제한하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어서 개도국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문건 유출 다음 날 수웨이 중국 협상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유럽·일본이 지나치게 낮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한 채 개도국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또한 그는 선진국들이 개도국 지원금으로 3년간 연간 100억 달러를 출연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세계 인구 한 사람당 2달러씩밖에 안 돌아가는 ‘커피 한 잔 값’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은 무엇보다 ‘덴마크 문건’이 기존 교토의정서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협약의 탄생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은 선진국과 개도국으로 책임을 양분한 교토 체제 유지를 지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투발루가 군소도서국가연합(AOSIS)과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국가군(V11) 48개 국가의 지지를 받아 지구 온도 상승 목표를 1.5℃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350ppm으로 안정화해야 한다는 공식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를 위해 선진국과 동일하게 교토의정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협약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투발루의 새로운 제안은 회의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의 거의 없지만, 이때문에 일각에서는 개도국 간 분열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개도국들은 중국을 중심으로 G77 그룹을 형성해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지만, 개도국 안에서도 투발루·몰디브 같은 나라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당장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에 중국·인도와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는 이번 회의를 통해 선진국과 개도국을 연결하는 중간다리 구실을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개도국 그룹이 분열될 경우 협상은 선진국 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우리와 같은 선진 개도국의 입지는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덴마크 문건’은 개도국과 선진국 간 불신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유엔에서 보장하는 ‘민주주의’ 원칙과 ‘1인 1표’ 원칙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미나 라만 지구의벗 의장은 “덴마크가 몇몇 나라를 골라 밀실 협상을 진행한 것은 COP15 주최국으로서 회의에 참가한 많은 나라의 기대를 저버린 무책임한 행동이다”라고 비난했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덴마크 정부는 서둘러 덴마크 문건에 대한 해명에 나섰고, 이보 데 보어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12월10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재 교토의정서 연장과 새로운 협약 논의,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토의정서 비준까지 8년이 걸린 것처럼 새로운 협약에 합의하고 비준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교토의정서의 역할과 기능이 여전히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또한 새로운 협약에는 미국과 개도국을 포함할 것이며, 온실가스 감축 방안으로 탄소시장의 기능을 대폭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협상장 밖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올해 NGO들의 구호는 ‘기후를 변화시키지 말고 시스템을 변화시켜라(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이다. 12월16일에는 공식회의장인 벨라센터를 향해 행진하는 집회가 진행될 가능성도 높다. 덴마크 경찰은 9일 새벽 NGO들의 숙소 밀집 지역을 급습해 200여 명 활동가를 2시간 동안 억류하고 시위물품을 압수했다. 덴마크 정부는 COP15를 대비해 외국인이라도 과격한 집회를 할 경우 24시간에서 최대 72시간까지 구류할 수 있도록 집시법을 개정한 바 있다.

12월16일부터 고위급 회담이 시작된다. 18일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미국 오바마 대통령,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영국 브라운 총리 등 대다수 EU 정상, 중국 원자바오 총리, 일본 하토야마 총리, 이명박 대통령이 참여한 정상회담이 열린다. 오바마 대통령은 10일 노벨 평화상 수락연설에서 “기후변화는 이제 안보 문제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덴마크 문건’으로 혼돈에 빠진 COP15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향방을 가늠하기 힘들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남겨진 회의 기간이 지구의 운명을 건 ‘지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주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코펜하겐 공항에 걸린 그린피스의 광고. 2020년, 나이 든 모습의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죄송하다”라고 사과한다. 그러고는 “2009년 코펜하겐 회의에서 끔찍한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부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시사 IN ] 118호 2009년 12월 14일 (목)
코펜하겐·이유진 (녹색연합 기후에너지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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