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단 생활 – 삶과 사랑의 공동체, 녹색순례단의 하루

2004.05.17 | 녹색순례-2004

“수건 찾아가세요. 우리 조 행동식도 챙겨요!”
“소독약과 핀셋 가져가신 분, 반납하세요!”
“자기 것 아닌 순례 티셔츠 가져가신 분, 되돌려 주세요!”
“신발 깔창 없는 분, 다섯 명만 주문 받습니다. 시중에선 만 원인데 싸게 모시겠습니다.”



새벽바람에 일어나 조별로 후다닥 밥을 해먹은 뒤 오늘 순례길에 오르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렸다. 차로 보낼 큰 배낭과 메고 다닐 작은 가방 속에 짐을 챙기는 사이, 아침마다 이런 안내방송이 곳곳에서 시글시글 댄다. 분실물 센터는 주인 없는 물건과 자신의 물건이 되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덕에 개점 즉시 호황이다.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나오는 긴 안내방송을 참지 못한 한 대원,

“혹시 주인아저씨 빨래 걷어가는 거 아냐?”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가는 열흘 녹색순례 길에는 언제나 작은 동아리 모임들이 만들어진다.

하루종일 걸어서 뻐근해진 몸을 풀기 위한 요가 교습소, 강사 선생님의 얼굴과 몸매만 믿고 찾아든 이 요가 교습소는 저녁마다 피곤한 사람들로 북적댄다. 하지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유능한 강사 선생님은 절대 이문을 남기지 않으며, 모이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 붙잡지도 않는다. 그저 아픈 몸 말랑말랑하게 다스려 줄 뿐.

교습소에 맞서는 또다른 큰 모임은 무허가 의료 시술소. 발가락과 발바닥, 뒤꿈치 같이 자신의 걷는 습관에 따라 생겨나 세력을 키우는 물집을 치료하기 위해 실과 바늘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체한 사람 손 따주기, 물집 터뜨리기, 상처 소독, 잘 나갈 때는 인생상담까지…

통 못 하는 것 빼고 다 잘하는 의료 시술소 덕분에 순례단이 챙겨야 할 필수 준비물은 바로 바늘과 실. 물집 없애는데 이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그 중에서도 물집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인근에서 제일 용한 서 의원이 있었으니,

“서 의원 어딨어요? 물집 터트려 주세요.”

그러나 서재철 의원은 홍보팀을 맡아 글 쓰랴, 사진 찍으랴, 백두대간 환경훼손 현장마다 설명하랴, 누구보다 빠듯한 일정을 가진 사나이다. 이러니 그 용한 의원 얼굴 한번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순례 때마다 서 의원 주최로 열렸던 역사소모임 ‘역사는 흐른다’가 덕분에 올해는 개점휴업 상태. ‘임오군란 왜 일어났나’라는 언제나 같은 주제로 문을 열었던 이 역사소모임은 역사를 핑계로 몰래 술 한 잔하자는 순수한 동기의 모임이었으나 올해는 불경기의 호된 시련을 맞고 있다.

낙오자 모임 역시 날마다 제 세력을 키워간다. 걸음이 느리거나 건강이 좋질 않아 본 대열을 따라 잡으려 애쓰다 안 되면 어느새 저만치 먼 걸음에서 자포자기. ‘설마 나를 버리고 가겠냐’는 심정으로 대열에서 떨어져 일단 쉬고 본다.

그를 동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저녁 무렵이면 낙오자 모임도 제법 규모가 큰 조직으로 변신한다. 자병산을 보고 내려오면서 석회석 광산과 우리 생활에 대해 진지한 논쟁을 벌이는 토론조 역시 순례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모임이다. 우리가 밟고 지나온 땅과 그곳에서 만난 환경훼손 현장에 대해서,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자못 진지하고 심각한 토론들이 걸어가는 도중에도 종종 만들어진다. 뙤약볕을 걷는 순례 쉬는 시간마다 미숫가루만을 전문으로 잘 타는 미숫가루 제조가게도 문을 연다.

어디 동아리뿐이랴. 50여 명이나 되는 순례단을 열흘 동안 이끌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분주하게 뛰고 있다. 길잡이 신영철, 선글라스에 반바지 차림으로 늘 순례단을 앞서서 걷는 이 사나이는 순례 길잡이를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나이다. 그의 손짓에 질주하던 차들도 속력을 줄이고 순례단의 발걸음을 바라보게 만들곤 한다.



순례단이 가는 곳곳마다 큰 배낭들을 싣고 다니며 숙소에다 짐을 부려놓고 맨 뒤에서 챙기고 떠나는 지원팀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장도 보고, 필요한 물건도 챙기고, 홍보팀이 만들어낸 사진과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까지 맡고 있다. 뒷정리 하면서 아침마다 늘어나는 유실물 덕에 이것만 처분해도 집안이 벌떡 일어날 것 같단다.

“그냥 가는 거죠 뭐. 답사 때 와보니 올 순례가 어떻게 될까 갑갑하더니 막상 시작되고 걸으니 좋네요, 그죠?”

언제나 붉은 얼굴로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짓는 대전 사나이 정기영 부대장과 어떤 옷이든 ‘쫄티패션’로 소화시켜 버리는 자칭 ‘반달’ 남호근 대장은 몇 달동안 이 순례를 위해 뛰어다녔다. 반달가슴곰을 너무 사랑하여 얼굴과 몸매마저 곰을 닮아버린 이 사나이가 있어 이번 순례가 시작되었고, 열흘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녹색순례 주제가 백두대간으로 정해지자 순례 길을 정하고, 날마다 가는 곳마다 우리가 알아야할 주제를 잡아준 백두대간 보전팀은 순례기간 동안에도 주민들 만나랴, 순례단 교육시키랴 분주하다.

순례단 앞뒤에서 순간포착, 명장면을 위해 언제나 재바르게 걸어가는 찍새, 홍보팀. 생생한 순례단의 표정을 잡기 위해 분주하게 셔터를 눌러댄다. 낮에는 잰 걸음으로 사진을 찍고, 저녁이면 우리가 걸어온 길과 백두대간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쓰는 강행군을 하고 있다. 이런 까닭 때문에 홍보팀을 뽑을 때 능력이나 기술보다 체력을 먼저 본다는 설도 떠돌고 있다.

고소한 밥 냄새를 풍기는 저녁시간이면 조 모임도 함께 열린다. 밥을 함께 지어 먹는 조 모임은 오늘 일정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걸어온 땅 이야기, 환자들을 챙기는 일까지 모든 순례단의 생활을 챙겨주는 작은 모임이다.

사람들의 성격마다 다섯 개 조 색깔도 여러 가지다. 밑반찬을 알뜰하게 챙겨와서 풍성한 조가 있는가 하면, 김치 하나에 숟가락만 빨고 있는 조도 있고, 밥을 먹을 때마다 노래를 부르며 친목을 다지는 조도 있다. 밤이면 순례기획단과 조장들이 모여 하루동안 생겼던 일과 내일을 챙기는 모임이 열린다. 이 밖에도 긴급상황 때마다 사건해결을 위해 나타나는 섭외팀, 동네 주민들이 서울에서 온 나그네들을 반겨 찾아주시면 사무처장님을 중심으로 홀연히 나타나는 접대전문 의전팀까지 많은 팀들이 순례단을 움직이고 있다.



태백산에서 점봉산 아래까지 열흘 동안 한길을 가야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삶과 생활의 공동체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열흘 동안은 같이 웃고 같이 울며 사슴처럼 기대 살아야 하나니… 이보다 더 완벽한 공동체가 또 어디 있으랴. 자고 먹고 오로지 걷기만 하는 녹색순례 길에는 오직 식욕과 수면욕만 왕성하게 살아 있는데, 배설욕 역시 인간의 아주 중요한 기본 욕구 중 하나다.

순례단의 하루를 되돌아보고 있는 사이, 뒤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

“화장실 누구야? 똥 끊고 빨리 나와. 나 죽는다~”

※ 현장사진은 녹색순례 2004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pilgrim.greenkorea.org/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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