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녹색순례] 첫째날 : 지리산, 길에서 길을 묻다

2006.04.29 | 녹색순례-2006

2006년 녹색연합 녹색순례는 백두대간 마지막 산줄기인 지리산 권역이다. 인도의 영원한 순례자, 땅 위를 걷는 사람인 사티쉬 쿠마르의 생명과 평화의 길을 모범삼아 떠난 녹색순례길이 벌써 9년째다. 녹색연합 활동가와 회원들은 녹색순례기간 동안 하던 일을 멈추고,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된 자연을 직접 두 발로 느끼기 위해 길을 떠난다.
“지리산, 길에서 길을 묻다”
‘2006년 지리산 녹색순례’는 지리산과 지역주민들을 만나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갈 조화와 희망의 대안을 물어갈 것이다. 6박 7일 동안, ‘정복’ 중심의 산행을 지양하고 최대한 국립공원을 넘나들지 않는 ‘지나갔지만, 흔적 없는’ 길을 나선다.

이번 녹색순례의 출발지는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이다. 해발 550m의 고랭지 지대인 이 곳 노치마을은 덕유산과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룻금 한가운데 위치해 유명해졌다. 녹색순례 첫 날, 노치마을에서 만난 이장님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백두대간 종주객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면서, 쓰레기를 마을에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물줄기에 의해 한번도 잘리지 않고 연속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는 단순히 ‘종주’와 ‘정복’을 의미하는 하나의 선(線)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포괄하는 국토 전체를 일컫는 산지체계이다. 이제 일반 관광객과 전문 산악인 역시 백두대간을 지역문화의 조화와 자연의 배려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할 시점이다. 즉, 백두대간의 종주와 정복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2003년, 환경부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중심으로 핵심지역과 완충지역을 포괄하는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을 제정하였고, 2005년 1월 시행하였다. 노치마을 역시 백두대간핵심지역에 해당했다. 하지만, 대대손손 이어온 경작지의 사유재산권 보호 명목으로 보호지역에서 제외된다. 환경부의 [백두대간훼손지역조사연구 II]에 따르면, 백두대간핵심지역의 훼손유형 중 경작지로 인한 훼손 면적은 23.5㎢로 전체 훼손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백두대간 마룻금의 최대 사유재산권인 경작지가 사실은 최대 규모의 백두대간 훼손유형인 셈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백두대간 보호와 생태계 연결성을 위해 노치마을의 농업방식을 유기농 경작으로 전환하고 토지를 매수, 복원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마을의 당산제 등 문화적 요소와 마을의 전통을 활용하여 문화마을로 육성해보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인 주민의 강제 이주나 반대로 사유재산권 보장은 백두대간과 노치마을 주민의 공생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리산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만2천 가구였던 구례지역민들은 가구당 10원씩을 걷어 10만원을 만들어 서울에 올라와 숙식하며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구례구민들의 생태지향적인 삶은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둘러싼 역사적 경험에서 축적된 흔적이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면적 440.485㎢로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의 3개 도, 1개 시, 4개 군에 걸쳐 있다. 우직할 정도로 길고 담담하며 묵직한 지리산의 능선은 남한 최고의 산악 매니아와 관광객을 흡수했고, 사람의 발길에 비례해서 등산로 확장, 관광도로, 터널, 농업용수댐, 양수발전댐, 온천과 골프장 등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일례로 노치마을 이장님의 우려처럼 지리산에 접어드는 노치마을 국도는 길을 헤맬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로수와 마을의 조그만 나무에 조차 각종 산악회에서 부착한 등산인식표로 넘쳐났다.

환경훼손 백화점인 지리산의 상처는 발길 닿는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노치마을에서 지리산 서부권의 초입인 덕치삼거리에서 좌측방향인 737번 지방국도를 따라 정령치, 뱀사골로 향하면, 이내 고기리 농업용수댐 건설현장이다. ‘고기지구 농촌용수개발사업’은 1997년 농림부에서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덕치리, 운봉읍 주촌리, 덕산리 등을 가뭄특별대책지구로 승인하면서 시작된 사업으로 관계개선, 소득증대, 자연경관유지, 생활활경개선을 사업목적으로 세웠다. 물론 ‘치수(治水)’는 통치의 근본이고, 민생고의 소중한 해법이다. 하지만, 고기리댐은 전북도지사의 농촌지원사업으로 환경영향평가의 환경성 검토와 협의에서 제외되었고, 안내판에는 “본 사업은… 국립공원구역은 포함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명백한 거짓말이다. 고기지구 농촌용수개발사업은 지리산국립공원 내에 건설되는 지리산 최대의 환경파괴를 야기할 대형 국책사업 중 하나로서, 정령치 일대의 8,9등급 우량 산림지대를 도려내고 있다. 또한 대상 지구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기에는 과대한 규모로 건설 중이며, 향후 공사가 완료된다고 하더라도 하천유지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하류인 엄천강과 진양호의 오염이 가중될 가능성이 높은 사업이다. 계획상으로는 2001년 12월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도 공사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연장 중이다.

고기리댐 공사현장에서 737번 국도를 따라 2시간 정도 오르면, 지리산 국립공원의 한축을 오롯이 조망할 수 있는 해발 1,172m의 정령치(鄭嶺峙)에 이른다. ‘재’라고 부르기엔 그다지 높지 않지만, ‘치’와 같이 조그만 언덕이라 폄하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곳. 정령치 정상의 한쪽으로는 덕치리 노치마을이 한 품에 안기고, 다른 한쪽으로는 끝 닿을 길 모를 노고단, 중봉, 반야봉, 촛대봉, 제석봉, 천왕봉으로 갈라진다. 노치마을과 정령치는 마한시대에는 진한과 변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신라 화랑이 무술을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품었던 유적이 군데군데 발견되기도 한다. 무릇 지리산과 같은 준엄한 크기와 힘에 눌러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신라 화랑의 ‘호연지기’를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더라도 대자연과 호흡하며 진정한 ‘호연지기’를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훌륭한 스승인 셈이다.

정령치 고개를 넘어 다시 노고단, 뱀사골 방향을 향해 약 1시간 가량 오르다보면,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심원(深源)마을이다. 동쪽으로 반야봉, 서쪽으로 만복대, 남쪽으로 노고단이 해발 900여m의 심원마을을 수려하게 감싸고 있다. 그치지 않고 깊게 흐르는 샘의 모양새를 심원마을 초입에서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혹은 심원마을을 마주하면서 동양화의 ‘원(遠)’, 즉 멀고 아득한, 하지만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모양새가 생각날 법도 하다. 두메산골 심원마을에는 성삼재관광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7농가가 약초를 캐며 살던 곳이다. 2006년 4월 11일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남부사무소는 지리산 자연환경을 복원하기 위해 2011년까지 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밝혔고, 심원마을 주민들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행위라며 반발하고 있다. 녹색순례 첫 째날, 심원마을에서 ‘하늘 아래 첫 동네’의 낭만적 이미지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하늘 아래 첫 음식점이 노래방 음향을 끼고 지리산에 울려 퍼지는 꼴이 어색하고, 번잡할 뿐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현대 환경문제의 최대 화두다. 이곳 지리산, ‘조화와 공존’이라는 녹색순례의 화두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 우두성 /지리산자연환경생태보존회

“제가 중학교 시절 어른들을 따라 지리산에 오르려면 몇날며칠씩 짐을 준비했지요. 가는 날 아침 사람들이 모여 장비를 집 앞에 늘어 놓고 짐을 나눠 담고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을 했어요. 마치 탐험대가 떠나는 것처럼. 동네 사람들이 배웅도 하고. 그 시절의 감동과 지금의 감동이 다른데, 하물며 차를 타고 지리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그 감동을 알겠어요?”

우두성 님은 지리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10대가 내리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지리산의 야생동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지만, 한때 그는 지리산의 알아주는 사냥꾼이었다. 90년대 초반 지리산에서 곰의 흔적들이 발견된다는 소식이 사냥꾼들 사이에서 돌자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곰을 잡으러 가자고. 사냥꾼으로 생활해오긴 했지만 지리산의 어쩌면 마지막 한 마리일지도 모르는 곰을 잡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많은 갈등을 했다.
그러다 아버지를 떠올렸다. 항일운동을 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던 그의 아버지에게 한 스님이 금강산보다 좋다는 지리산을 말했다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그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오르곤 했다.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르던 분들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초토화되고 입산금지가 내려진 1955년. 5명의 구례중학교 선생님들이 경찰의 허락을 받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노고단까지도 길이 없어서 오르지 못하고 다음번에 다시 시도하여 노고단을, 그 다음엔 반야봉을 이렇게 하나하나 길을 찾고, 만들어 이정표를 세웠다. 함께 했던 이들은 이름을 ‘연하반’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62년 드디어 지리산의 등반지도를 만들게 되었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등사기로 밀어서 만든 등반지도는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지리산을 오르려는 이들은 누구나 구례의 연하반 사무실을 찾아와 지도를 얻고 또 2시간씩 설명을 듣고서야 산으로 갈 수 있었다. 지금도 구례가 지리산 등산의 관문 역할을 하는 이유다. 연하반의 지리산 사랑을 우두성 님은 어릴 적부터 함께 했었다. 산을 타던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엔 구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연하반의 어른들, 구례의 지리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며 결국 그는 사냥꾼으로서의 생활을 마감했고 산과 동물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능력으로 산과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지리산자연환경생태보존회. 지금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이다.
야생동물이 살아가기엔 척박한 환경만큼이나 기본적인 야생동물에 대한 조사도 되어있지 않던 90년대 중반. 우두성 님은 동료들과 별다른 장비나 후원없이 지리산의 곰서식환경과 실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지리산 권역을 바둑판처럼 나눠 한곳 한곳 샅샅이 찾고, 능선에 텐트를 치고 몇날밤을 세우며 동물을 소리를 듣기 위해 기다렸다.  일본의 곰전문가들이 ‘세상에서 유래없는 조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는 이 보고서는 환경부가 곰복원사업에 나서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발자국과 흔적을 좇으며 야생동물의 삶을 이해하고 찾는 일에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그는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한다. 지리산의 지도를 맨손으로 만들어냈던 연하반은 이제 그들을 이을 후배들이 없어 잊혀진 역사가 되고 있다. 그래서 야생동물 전문가가 귀한 우리나라에서 이 일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겠다는 후배들이 있으면 너무나 반갑다. 그들의 기록이 결국 후대의 재산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국립공원이다. 이 말은 서식지의 넓이가 무엇보다 중요한 동물들에게 지리산은 그만큼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리산의 야생동물의 실태는 아주 밝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아직 야생동물과 함께 사는 법을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지리산의 야생동물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산을 밟고 있을 우두성 님을 떠올리며 지리산에서 야생동물이 맘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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