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여섯째 날] 꽃피는 걸 보며 농사를 짓던 사람들

2009.05.17 | 녹색순례-2009

팥을 닮아 팥꽃나무 꽃이라- 야생화의 이름을 지은 사람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이제 깊은 산골짜기에만 숨어 사는 다양한 야생화와 야생동물의 흔적이다. 첩첩이 이어지는 산줄기 속 깊은 계곡 안의 풍경이다. 순례단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지나치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흔치 않았다. 그만큼 골이 깊고 인적이 드문 곳이다. 지금은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깊은 두메산골이지만 그 옛날에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이 오래된 숲에 누군가 가지런히 쌓아 놓은 돌담이 있고, 그 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솥단지와 숟가락 같은 물건도 볼 수 있었다. 이 깊은 골짜기 돌담을 두르고 아궁이를 만들어 솥단지를 올려두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화전민이었다. 국내 최대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왕피천 본류로 이어지는 지류의 골짜기 곳곳에서는 화전민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왕피천 최상류 지역인 중림골에는 화전민들이 울진으로 내려가던 길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길은 화전민들이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를 울진장으로 가지고가 산에서 구할 수 없는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 이용하던 것이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십이령 옛길과 응봉산 문지골, 영양 수비면 일대까지 순례단이 걸었던 곳곳에서 화전민의 옛터를 만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수탈과 억압, 난리를 피해 깊은 골짜기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던 화전민은 조선후기 민란이 증가하면서 함께 증가하였다. 특히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에서 패배했던 농민군과 그 가족들은 대거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산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땅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지만 경작한 만큼 소출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왔다. 화전민들은 봄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조성할 때 위에서 아래로 산불을 질러 불필요한 산불을 막고 꼭 필요한 농경지만을 확보하여 농사를 지었다.

화전민은 산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야생화에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울진 북면 두천리에서 소광리로 이어지는 십이령 옛길에서는 활짝 피어있는 병꽃나무 꽃을 볼 수 있었다. 울진문화원의 주보원(73) 씨는 “병꽃나무 꽃은 화전민들에서 팥꽃나무 꽃이라고 불렀는데 이 꽃의 색이 팥의 색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또, 꽃이 필 때 팥을 심으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꽃이 이리 피어있으니 아마도 이쯤, 화전민들은 팥을 파종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화전민들은 파종의 시기를 달력 대신 야생화의 개화시기로 판단했다.  

산 위의 사람이 산 아래로. 그들은 왜 산을 내려와야 했을까?
일제강점기 때에는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나 되는 화전민이 있었다. 이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 때부터이다. 정부에서 화전민들이 경작하던 대마를 단속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전민들이 대마를 피우기 위해 경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작물을 경작하기에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대마에서 삼베를 얻고, 중한 상처가 생겼을 때 진통제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화전민들을 본격적으로 정리한 것은 68년이었다. 이때가 화전의 역사가 끝나게 된 분수령이었다.

전 세계도 들끓었던 그 68년의 격동기에 한반도도 예외없이 남과 북이 총부리의 긴장을 높이며 들끓었다. 그 정점의 사건이 있었으니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수백 년 산속에서 가장 생태적 삶을 살았던 백만에 가까운 민중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화전민의 주거지가 간첩의 근거지로 사용된다는 이유에서 정부는 정책적으로 화전민이주단지를 건설하고 정착지원금을 주면서 화전민을 땅 아래로 소개시켰다. 울진군 소광리 지역주민에 의하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화전민을 소개시키던 60년대 말에는 소광1리, 소광2리 골짜기에 화전민만 300가구가 넘었다”고 한다.

그렇게 내려온 화전민의 일부는 정부가 건설한 화전민 이주단지에 정착하고, 일부는 셋방을 얻어 산 아래의 삶을 시작했다. 울진 소광리에서 금강소나무림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당시 지었던 화전민 이주단지를 지금도 볼 수 있다. 화전민 이주단지는 2가구가 함께 살 수 있도록 연립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모두 9단지 정도가 있었다. 아직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1호와 9호라 적힌 건물은 비워진지 오래된 듯 지붕과 벽들이 무너져 있었다.

깊은 숲에서 사는 방식에 익숙해있던 화전민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 소작농이 되었다. 정부가 정착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50만 원이라는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을 줬지만, 가족이 살아가기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 있는 땅을 살만한 돈은 아니기 때문이다.
순례에서 만난 화전민 터는 이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관목과 습지의 것이다. 관목이 들어섰지만 돌담의 흔적을 보면서 집의 크기를 추정할 수 있고, 습지가 되었지만 논의 원형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던 사람들
화전민은 남북의 대립으로 빚어진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때문에 오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정책 때문에 화전민이 낙후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 아니냐고도 말한다. 또, 화전 때문에 생긴 산림훼손을 막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40년 전 이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난 뒤 남아있는 흔적이라곤 돌담과 놋쇠그릇 정도이다. 그 외에 모든 것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들이야말로 자연의 방법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들만의 삶의 문화를 가졌던 사람들이 그 문화를 잃어버리고,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은 분명히 비극이다. 화전민은 그저 산속에서 특별하게 살았던 소수의 집단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온 민초들이다. 사는 장소와 방법이 조금 다르고 독특했을 뿐이다. 이들의 역사가 사라졌다는 것은 민초들의 삶 중 가장 독특한 산림문화의 주인들이 삶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록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말이다.

– 글 : 보람(녹색연합)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